스님의 주례사 - 법륜
법륜 스님은 <스님의 주례사>에서 결혼이 마음의 문제라고 말한다. 여기서 마음이란 서로를 그리워하거나 애달파하는 애정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스님은 결혼에 임할 때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라고 권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행복해지는 조건은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파악해야 불행해지지 않는다. 극단적인 예시이지만 남편이 바람을 피워도 그가 주는 물질이 있어야 더 행복하다면 결혼을 지속함이 옳은 선택이라는, 다소 부박하게 느껴지는 논리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야 결혼을 이어나갈 수 있다는 얘기로도 풀이할 수 있다. 참고로 이 책의 원제는 ‘사랑 좋아하시네.’였다고 한다.
보통은 자애로운 덕담을 기대하며 찾는 스님의 발언이라 눈에 띄는 것은 사실이지만, 법륜 스님의 말씀은 전혀 새로운 생각이 아니다. 엥겔스는 오래전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이보다 더 직설적이고 딱딱하게 결혼제도의 기원에 대해 갈파한 바 있다. 그는 우리가 영화나 소설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연애 이미지가 지극히 최근에 들어 형성된 것에 불과하다고 한다. 현대인의 환상으로 자리 잡은 낭만적인 사랑이 과거에는 오히려 사랑 이외에는 누릴 것이 없었던 사회적 약자의 유희이자 자기 구제법이었다고 주장한다. 낭만은 유행에 불과한 것이다. 영 ‘마음’에 들지 않는 설명이겠지만, 그에게 결혼과 사랑은 연인들의 거주지가 얼마나 떨어져 있느냐는 거리 문제와 비슷하다. 간단히 말해, 자주 못 보면 헤어진다는 소리다.
법륜 스님과 엥겔스의 공통점은 출발지점이다. 둘은 결혼을 들여다보면서도 통념과 달리 사랑에서 탐구를 출발하지 않는다. 사랑 역시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뿐인가, 국가와 종교, 도덕, 세상의 눈치까지도 보지 않는다. 그들이 결혼에 대해서 얘기하지만 결혼의 밖에서 결혼을 얘기하는 이방인의 태도를 계속해서 고수하는 이유는, 그것들에서 출발하면 오히려 결혼과 사랑의 본질과 실체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지 않던가.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본 결혼은 기질과 취향의 교환이었다. 심지어 이 교환은 불공평하기까지 하다. “더불어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받지 못한다.”는 롤랑 바르트의 말까지 빌지 않더라도 연인의 사랑이 우리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필연이다. 법륜스님과 엥겔스의 차이는 여기서부터 벌어지는데, 법륜스님은 결혼이라는 제도로 연애의 이러한 모순을 덮으려 하지 말 것을 주문한다. 못 살겠으면 참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이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든다면, 사랑하는 정도의 차이가 왜 생기는지 고민해야 한다. 애초에 사랑이란 원래 손익과 평등이란 기준으로 논할 대상이 아니었다. 사랑을 오로지 거래로서만 바라본다면 그것은 용서받지 못할 낭비와 잘못된 자원분배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은 주는 것이다. 더 주겠다는 마음, 그런 사랑이 마음에 있다면 다른 조건들은 문제가 아니다. 결점이 아무리 많아도 살아가는데 문제가 없다.
하지만 평화가 항상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라고 본다. 원래 벌이 없으면 도망치는 재미도 없다. 게다가 프로이트가 한탄했듯이, 호의가 관계를 구원하지는 못하지 않던가. 관계를 구원하는 것은 혼자만의 마음 정리가 아니라 오가는 말이다. “사랑이란 측정 불가능한 맹목의 동력을 가장 긍정적으로 승화시키는 길은 연인들이 서로를 인정하는 것”이란 말을 어딘가에서 읽었다. 극단은 극단과 맞닿는다. 사랑은 서로를 갉아먹던지, 서로를 돕던지의 길밖에 없다.
서평 <이상민/리플 정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