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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딩 피플 Sep 18. 2018

사랑의 파괴

사랑의 파괴 - 아멜리 노통브


유년기의 '나'는 특별하다. 이때의 자아는 일종의 원리주의자다.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단하나의 원칙만을 맹종한다. 원칙은 확신과 전능감을 부여한다. 하지만 근거가 자신뿐이기에 아이는 흔들리기 쉽다. 필연적으로 '나'를 증명하려는 시도가 이어진다. 그러다 아이는 결국 자신이 대단치 않다는 자조와 위대하다는 자만을 함께 품게 된다. 달리 말해, 유년기의 '나'는 원리주의를 외치는 무원리주의자다. 만사를 맘대로 행동하는 철부지인 것이다. 외부와 타자가 결여된 채로 만사가 확장된 '나'로 점철된 신화의 시기, 나는 그것을 유년기라 기억한다.

<사랑의 파괴>는 유년기의 순수한, 그래서 더 잔혹한 사랑을 다룬 이야기다. 외교관인 부모님을 따라 중국에서 살던 주인공이 첫사랑을 하게 되며 겪는 일들이 주요 사건이다. 계속 거절당하자 괴로워하던 주인공은, 고민 끝에 어머니에게 조언을 구한다. 어머니는 요즘말로 밀당을 해볼 것을 충고한다. 효과는 절대적이었다. 첫사랑인 엘레나가 자신을 쫓아다니게 됐다. 역설적이게도 주인공의 진짜 고통은 그때부터 시작된다. 좋아하는 사람을 반대로 밀어내야만 하는 것이다. 주인공은 고민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인가. 이것이 사랑이란 말인가?


주인공인 나는 앞서 말한 ‘나’인 상태다. 어린아이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는 다름 아닌 자신’이라는 확신이 그녀에겐 있다. 때마침 배경은 세계와 단절된 세상, 문화혁명기의 중국이다. 덕분에 그녀는 ‘내면의 열정’을 남보다 오랫동안 간직할 수 있었다. 중국이 만들어낸 ‘시차’다. 그녀는 ‘시선을 한정시키지 않고, 무한히 확장’시키며 중국을 자신의 자아로 물들인다. 그곳에서 자라나는 잎사귀, 우뚝 서 있는 만리장성, 공산주의조차도 자신을 칭송하기 위한 ‘군중’에 불과하다.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다른 아이들과의 ‘위대한 전쟁’에 몰두하느라 ‘거의 책을 읽지 않았’기에 그녀는 자신의 착각을 바로잡을 기회가 없었다. 그녀에게 이 명제는 진실했다. ‘세계는 나의 존재를 위해 존재한다.’


그러나 갑자기 세상의 중심은 다른 곳에 있었음이 밝혀진다. 사랑이다. ‘세상의 중심은 국적이 이탈리아였고, 이름은 엘레나였다.’ 나는 처음 보는 순간부터 엘레나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 애를 본 순간 너무나도 당연하게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그 애는 누구보다 아름다웠고, 그래서 그 애를 사랑했으며, 따라서 그 애가 세상의 중심이 되었다. 나는 이 운명적인 변화를 ‘권력 이양이 아니라 정신적인 자리바꿈’이라 설명한다. 엘레나와의 만남 이후 세상의 중심은 내 밖에 있었고, 중심으로 접근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노라 말한다.


물론 전부 어린아이의 치기어린 허세다. 아니면 훗날 유년기를 돌아보며 화자가 꾸며낸 멋진 말이던지. 나는 ‘나’를 놓은 적이 없다. 나는 엘레나에게 “내가 널 사랑하니까 너도 날 사랑해야 해.”라고 말한다. 그녀는 ‘세상의 중심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으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자신의 ‘열정을 달래기 위해’ 엘레나에게서 ‘어떤 것이 되었든 간에 진정한 감정’을 불러일으켜야 했다고도 고백한다. 게다가 엘레나는 ‘자신 이외에는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아이다. 엘레나는 주인공과 꼭 닮은 주인공 그 자체다. 주인공이 자신의 모든 걸 투사한 분신이다. 나의 연장으로서 엘레나를, 나는 나를 사랑한 것이다.


주인공이 엘레나의 세계로 비집고 들어갈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이미 세상의 중심인 자신의 내면에서 더 들어갈 중심은 없기 때문이다. ‘혼자서, 오직 혼자서 스스로에게 완벽하게 만족하고 있는’ 사람에게 다른 사람에게 내어줄 여유 공간은 없다. 엘레나가 권력을 선택하고, 별 볼 일 없는 남자아이를 쫓아다녀 수치스럽게 느껴지더라도, ‘기묘하게도 그 사실 때문에 그 애를 더욱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도 다름 아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이 보잘 것 없고 형편없다는 것을 알아도 스스로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그런 존재다.


다만 이 기만이 사랑의 몇 가지 속성을 말해주는지도 모른다. 모든 사랑은 나를 사랑하는 것, 너가 내가 되는 것, 내가 너가 되는 것, 너와 나의 경계가 사라지는 것. 그런 모든 것들이 너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착각일지라도 자타를 구분할 수 없는 지점에 너를 두는 행위이다. 이제 <사랑의 파괴>라는 제목의 함의도 얼핏 드러난다. 사랑은 너를 나로 여기는 자기 파괴이며 동시에, 나를 사랑하는 것인 사랑의 파괴다. 이 책의 제목은 곧 사랑의 이음동의어이다.


그런 의미에서 엘레나의 관심을 끌지 못해 괴로워하던 주인공에게 어머니가 해준 충고는 의미심장하다. “그 애처럼 행동해. 그러면 그 애는 널 사랑하게 될 거야.” 어른인 어머니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사랑을 둘러싼 수많은 수식어와 낭만적인 표현들은 금방 눈처럼 녹아 사라져버리고, 그 눈이 녹은 자리에 드러나는 것은 결국 더러운 진흙, 자아의 콘크리트임을 말이다. 우리는 새하얀 눈이 티 없는 맑음으로 자신의 눈을 덮고 있을 때만 진정한 관심사가 자신뿐이라는 사실을 잊을 수 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사랑을 찾아다니고 거듭해서 노래하는 것일 테다. 협소한 자신의 공간을 조금이라도 넓혀보려고 말이다.


비록 사랑이 첫눈 같은 것임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집중해서 바라보아야할 곳은 나를 향한 시선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너를 나로서 바라보며 시선이 옮겨가는 순간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 작가 아멜리 노통브도 사랑의 그 모든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자폐적인 자기만족으로만 치부해서는 안 된다고 <후기>를 통해 말한다. ‘엘레나는 실명이며, 내가 묘사한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고 비판한 것이다. 작가는 실존인물인 엘레나가 뒤늦게 책을 읽고 수정을 요구했지만, 거절했고 만나주지도 않았다. <사랑의 파괴>에서는 사랑에 대해 냉소적인 어투로 얘기하지만, 현실에서 작가는 여전히 자기만을 사랑했던, 지금 이순간도 어딘가에서 자기만을 사랑하고 있을 엘레나를 부정하고 있다. 나에 대한 사랑을 수집하기보단 타자를 나로써 사랑하기를 권하고 있다. 끝내지 못한 유년기를 뒤로하고 어른이 되라고 고하고 있다.


Photo by Jared Rice on Unsplash
서평 <리플/이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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