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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콩맘 Mar 04. 2021

너를 낳고 내가 됐다②

기약없는 기다림, 자궁문 10cm가 열릴 때까지

본게임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12일 오전 6시 촉진제 투여. 가장 낮은 단계부터 시작해 점차 투입량을 늘려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배 속이 쪼이고 풀리고를 반복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참을 수 있을 정도의 통증이었다. 

점심시간이 다가왔지만, 아직 나의 자궁문은 겨우 1cm 열려있었다. 아기의 머리가 빠져나올 수 있을 정도인 10cm까지 열려야 비로소 분만 준비에 들어가는데 한참 못미쳤다.


가족분만실에는 아기 심장 박동수와 나의 진통 정도를 그래프로 그려내는 기계가 있다. 진통이 70-100정도일 때 분만 힘주기를 하는데 나는 이날 최대 진통이 50정도 나오다가 다시 20-30대로 떨어졌다. 전날 느꼈던 통증과 '똥 에피소드' 때문에 제대로 잠을 청하지 못했던 우리 부부는 결국 점심시간쯤 지쳐서 잠들어버렸다. 난 식사도 하지 못했다. 혹시모를 응급상황과 게워낼 것을 우려해 금식령이 떨여졌다. 왼팔에 맞는 수액으로 겨우 버티고 있었다. 오후 들어서 다시 진진통을 기다렸는데도 최대 진통세기는 40 안팎이었고, 투입량 대비 진통의 강도가 예상만큼 나오지 않자 내일 다시 시도하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하루가 지났다. 


내가 진전이 없는 사이 옆 가족분만실에서는 8명의 신생아가 태어났다.  그리고 걱정도 됐다. 옆에 아기들은 잘만 태어나는데, 왜이렇게 우리 아가는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걸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어쨌든 인위적인 통증을 만들어내는 것인데, 아기에게 무리가 가지 않을까. 후회도 됐다.


 아기는 초조한 나와는 다르게 느긋했다. 생명의 탄생이라는게 비교나 경쟁을 할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좁고 답답한 공간에 갖혀있다보니 시야가 좁아졌다.. 


다음날인 13일 오전 5시 촉진제 재투여. 이번에는 최대용량을 투입하기로 했다. 슬슬 몸을 누군가 비틀어서 쥐어짜는 통증이 뱃속에서 시작됐다. 1분 정도 이어지는 통증, 이번엔 소리를 지를 수도 없는 정도의 아픔이었다. 내가 병원 침대 난간을 잡고 소리도 못지르고 버티고 있자, 간호사는 나를 보며 '진통 걸렸다'며 오늘 낳겠다고 했다. 이 통증은 오전 내내 약 10분 간격으로 찾아왔다. 뼈가 터질 것 같았는데 할 수 있는건 그냥 쓰나미처럼 몰려온 진통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 뿐이었다. 간호사가 들어와 내진을 했다. 자궁경부는 2.5cm 열렸다. 아직도 가야할 길이 멀었다. 허탈하고 허무했다. 잠도 못자고 진통을 버티고 견뎌왔는데 아직도 이것 밖에 열리지 않았다니.


오후 1시.  아기 심박수를 표시하는 기계에서 이상기운이 돌았다. 120정도를 왔다갔다하던 아기 심박수가 80까지 떨어졌다. 갑자기 간호사들은 수시로 들락날락했다. 아기가 힘들다는 표현이라고 했다. 덜컥 겁이 났다. 나는 아프다고 말이라도 하는데, 우리 아가는 말도 못하고 얼마나 힘들까. 게다가 막달에 출산과 관련해 찾아본 유튜브 동영상 중에서 자연분만만 고집하다가 아기가 질식돼 죽은 채로 태어난 사례를 본게 생각났다. 무서웠다. 결국 의사선생님을 불렀다. 오후 3시까지 아무런 진전이 없으면 제왕절개 수술을 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담당 의사선생님이 오셨다. 선생님은 초음파 기계를 들고와서 아기 상태를 살펴봤다. 하늘 본 아기는 이제 엄마 옆구리를 보고 있다고 했다. 아마 회전하려고 했던 것 같다. 나는 상당히 건강한 산모였기 때문에 한번도 제왕절개를 고려해본 적이 없다. 당연히 다른 사람들의 제왕절개 후기도 찾아보지 않았다. 자연분만에 대한 아쉬움이 남았고 미련도 남았다. 하지만 진이 빠져있었다. 결국 수술을 위한 동의서 작성을 했다. 대략 "출혈로 외부 피 수혈시 부작용이 있을 수 있으며 더러는 과다출혈로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 이런 내용이었다. 출산 과정을 두고 사람들이 왜 목숨을 거는 일이라고 하는지 실감났다. 하지만 자연분만에 대한 미련이 계속 남았던 것일까. 나의 이런 마음을 담당 교수님도 읽으셨는지 당장 수술하지말고 한번 더 분만을 시도해보자고 하셨다.


오후 4시. 너무나 신기하게 기적이 일어났다. 갑자기 자궁문 4cm가 열렸고 진진통이 걸려서 분만을 향한 속도가 빨라졌다. 진진통의 느낌은, 뼈가 폭파되는 것 같은 몸 속에서 터지는 느낌. 출산후기를 보면 하늘에서 별이 보인다는데, 그건 너무 낭만적인 묘사였다. 윽, 소리를 내는 것도 버거웠다. 침대 난간을 웅켜잡고 버텼다. 너무 힘줘서 잡아서 이때 오른쪽 팔목 관절이 너덜너덜해졌다.


급하게 마취과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나는 옆으로 누워 새우등 처럼 구부렸고 날카롭고 묵직한 바늘이 내 척추에 들어갔다. 무통주사를 놓자마자 소리지를 수 도 없이 아팠던 고통이 씻은듯 없어졌다. 너무 신기했다. 그제서야 한숨을 돌렸다. 그렇게 6cm, 8cm, 10cm까지 내 자궁문은 완전히 열렸다.


오후 7시, 하지만 우리아기는 아직도 엄마 뱃속에 있는게 좋았나보다. 자궁문만 열리면 아기를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아기가 아직 자궁 밑으로 내려오지 않은 것이다. 당직 의사선생님은 내진을 하면서 아기 머리를 만져보시더니 다시 심각한 이야기를 꺼내셨다. "아기 머리가 부어있어요. 이대로 가면 아기도 너무 힘들어해서 수술해야할 것 같아요."


내가 생각하지도 못한 시나리오였다. 수술은 피하고 싶어서 이 고통을 견뎠는데, 자궁문 다 열리고 나서 수술하는 분만 중에 최악으로 꼽히는 전개다. 억울했다. "자궁문 다 열렸는데 왜 분만을 못하는 거지"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자궁수축 정도가 70에서 100정도가 나와야 그 힘과 산모가 주는 힘이 합쳐져서 아기가 엄마 몸에서 나올 수 있는데 나는 최대 수축 수치가 50정도에 불과했다. 이미 아기도 나도 지칠대로 지쳤던 것이다. 당직 의사선생님은 수축제 투여를 중단하도록 했다.


오후 9시. 퇴근했던 담당 의사선생님이 전화를 받고 황급히 분만실로 오셨다. 선생님은 나에게 수술하라고 하진 않았다. 다만 아기의 상황을 차분하게 설명해주셨다. "제가 판단했을 때 아기가 위급한 상황은 아니에요. 응급 제왕절개로 가는건 아닌데, 지금 여러번의 수축을 겪어서 아기 머리가 조금 부어있어요. 그리고 아직 엎드리지도 못했고, 앞으로 1시간 안에 분만하지 못하면 그때는 정말 응급수술을 해야해요."


갑자기 친정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이 모든 상황을 설명해줬다. 그런데도 친정엄마는 다시 자연분만을 고집했다. 아기가 아직 나올 때가 안되어서 그런 거라고. 당장 촉진제 끊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수술은 안 된다고! 이때까지 참았던 억울함, 서러움, 두려움, 걱정, 아기에게 든 미안함 모든 부정적 감정들이 짬뽕되어서 엉엉 눈물이 나왔다. 옆에서 남편은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지켜보고 있었다.


모든 출산 과정의 궁극적인 목표를 다시 생각해봤다. 아기가 건강하게 세상에 태어나는 것 아닐까.  더이상 시간을 지체하면 안됐다. 나는 결단을 내렸다. 수술하기로 결정하고 자연분만을 고집하던 친정엄마에게 울면서 말했다. "엄마, 정말 미안한데 나 다시 시간 못돌려. 아기가 지금 힘들어하니까 수술하고 나올게. 정말 미안해, 전화 끊을게."


옆에서 의사선생님과 간호사 모두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정말 시끄러웠던 분만실 분위기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한 간호사는 내 손을 잡아주면서 "그래도 최선을 다했잖아요. 그냥 수술 해버리는 분도 많은데 도전하는 것 자체가 멋진 거에요." 괜히 그 말에 또 한번 울음이 터졌다. 그래, 나 진짜 최선을 다했어...


자연분만을 하면 산모의 회복이 빠르고 전신마취를 하지 않으니 부작용이 적다. 하지만 아기는 최대의 고통을 겪는다. 자연진통을 견딘 아기는 이걸 이겨내겠지만, 우리 아기는 이미 2박 3일동안 촉진제와 씨름하면서 진이 다 빠졌을 것을 생각하니 작은 생명에게 너무 미안했다. 이때까지 나는 아기를 위해 자연분만을 해야한다고 했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깨달았다. 자연분만은 오직 나를 위한 욕심이었다는 것을.


그렇게 난 수술실에 들어갔고, 약 20분 뒤 우리 아기는 너무나도 건강하게, 그렇지만 촉진제와 씨름하느라 양수에 퉁퉁 부은 모습으로 세상에 나왔다. 아기는 태어나보니 3.67kg으로 작지 않았다. 우리엄마가 알려준 출산후기에서 들어본 아기와는 다른 크기였다. 의사 선생님께서도 그때 수술하기를 잘했다고, 이정도면 순산한 거라고 했다.


누구에게나 출산스토리는 특별하지만 나에겐 더욱 그렇게 다가온다. 서로 내외하던 남편과는 목숨을 건 여정을 함께 버티고 겪으면서 '찐' 친구가 됐고, 뱃 속에서 태동으로 존재를 알렸던 우리 아기는 세상에 첫 발을 내딛었다. 그렇게 우리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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