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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콩맘 May 26. 2021

호르몬의 노예

아기 낳고 계속 울었던 이유

13일 금요일 저녁 10시 12분, 드디어 10달 동안 내 배 속에서 살아 숨쉬던 우리 아기가 세상 밖으로 나왔다. 분만 과정에서 너무 많은 에피소드를 겪은터라 나는 출산할 때 전신마취를 했고 아기가 세상에 나오는 장면을 볼 수는 없었다.


의사선생님이 "한숨 푹 주무시고 일어나세요~"라고 말한지 3시간쯤 흘렀을까. 다음날 새벽 1시쯤 제왕절개 수술을 마친 나는 회복실에서 남편을 만날 수 있었다. 잠자고 있던 감각이 깨어났기 때문인지 마취가 풀리면서 너무 추웠다. 영하 20도로 내려간 지난 겨울을 코트 하나로 이겨낸 나였지만, 그때 느꼈던 추위는 비교불가였다. 마취가 풀리지도 않은 상태로 "튜워... 너므 튜워요...(추워요)"만 외쳤다.


남편은 나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 내가 거의 목숨을 걸고 오직 아기를 위한 결정을 어렵게 내리는 과정을 보고는 나를 위해서 평생 살겠다나 뭐라나. 나 역시 의리로 내 곁을 지켜준 남편을 보고 앞으로 내가 더 잘하겠다는 다짐까지 했으니 출산 과정이 우리 부부에겐 큰 터닝포인트였다.  


남편에게 아기 사진을 보여달라고 했다. 남편이 찍은 사진에는 퉁퉁 양수에 불어서 눈코입 윤곽조차 살에 파뭍혀진 핏덩이가 있었다. "얘가 내 아기야???" 내가 상상했던 우리 아기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낯선 작은 존재가 있었다. 아무리봐도 낯선 느낌. 남편이 또 다른 사진을 보여줬다. 아기가 태어난지 한시간 뒤에 씻고 나온 모습, 그제서야 우리 부부의 얼굴이 아기에게서 보였다. 그 사이에 퉁퉁 부은 모습은 붓기가 빠져서 귀여운 아기 얼굴을 하고 있었다. 보고있어도 또 보고싶었다. 너무 예뻤다.


코로나 때문에 남편과의 면회는 10분으로 제한됐다. 이제 6박7일을 병원에서 혼자 지내야했다. 아쉽지만 남편을 집으로 보내고 나는 병원에서 오로지 회복을 위해 힘쓰기로 했다. 내가 선택한 병원은 보호자 및 외부인 출입을 금하는 대신 간호인력들이 산모를 1대1로 케어해주는 시스템이었다. 나는 자연분만 시도했다가 자궁문이 다 열린 상태로 수술을 했기 때문에 출혈이 심했고, 스스로 움직이는건 불가능했다.


제왕절개 첫날은 허리를 세워 앉을수도 없었다.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건 병원 침대 옆에 달린 리모컨으로 상체를 일으켜세우거나 눞히는 것,또 간호사선생님을 호출하는 버튼을 누르는 일 뿐이었다.

 자연분만을 한 산모들은 첫날부터 쌩쌩하게 걸어다니고 아기를 보러 지하에 있는 신생아실까지 다녀왔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갈 수 없었다. 남편이 찍어둔 사진 몇장으로 우리 아기 모습을 그려볼 수 밖에 없었다.


 이튿날, 소변줄을 뺐다. 이제 목표는 스스로 일어서서 아기를 보러 신생아실에 가는 것. 그 전에 해야할 숙제가 있다. 스스로 화장실에서 소변을 봐야하고 무엇보다 방구가 나와야 한다! 방구가 나왔다는 신호는 안에 있던 장기들이 제자리를 찾아갔다는 의미다. 제왕절개를 하며 뱃속 근육, 자궁을 절개하고 아기를 꺼냈으니 열달 동안 아기가 차지하고 있던 공간에 내 장기들이 재배치돼야 한다. 화장실 까지는 딱 열걸음이면 다녀올 수 있는데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니까 조금씩 몸을 가눌 수 있었다. 어찌저찌 겨우 몸을 일으켜세워 신생아실로 한발자국 한발자국 내딛어 걸어갔다. 장기가 쏟아지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아기를 만난다는 생각에 내 몸에서는 행복 전달 호르몬이 나오고 있었는지 참을만했다. 겨우 도착한 신생아실은 블라인드로 가려져있었다. 코로나 확산으로 산모들조차 아기 면회 시간이 오후 7시30분부터 딱 30분으로 제한됐기 때문이다. 제 시간에 갈 수 없었던 나는 이날도 아기를 볼 수 없었다.


 내가 낳은 아기인데, 아직도 아기 얼굴을 보지도 못하다니 그야말로 생이별이었다. 아기를 볼 수 없는 대신 신생아실 앞 의자에 앉아서 유리창 너머로 들리는 아기 울음소리를 가만히 들었다. 눈으로 볼 수 없으니 소리로라도 아기를 그려봤다. 갑자기 서러웠던건지, 아니면 난생 처음 들어보는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그저 감사하고 벅찼던건지 그 자리에서 엉엉 울음이 터져나왔다.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울음 섞인 소리로 전화하니 남편도 적지않게 당황하는 눈치였다. 남편은 오히려 내가 말로만 듣던 산후우울증에 걸린게 아닌가 걱정했다. 내가 엉엉 울고있는 이유를 나도 몰랐다. 하지만 확실한건 긍정적인 방향에서 나오는 벅찬 마음 때문이라는 거다.


수술한지 사흘째 되는 날, 드디어 아기를 보러가기로 했다. 처음으로 아기에게 젖을 물릴 수 있는 모유수유 시간도 예약했다. 병원에서는 오후 6시에 저녁식사가 나오고 오후 7시부터 선착순으로 면회 예약을 받는다. 저녁식사가 나오자마자 미역국에 밥을 말아 들이키고 세수와 양치를 하고 머리도 빗었다. 그리고는 아기를 만나러 신생아실로 내려갔다.


벌써 산모들이 하나둘씩 모여있었다.  한번에 3명씩 3분 정도 아기를 볼 수 있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블라인드가 올라가는 순간, 나는 "응?" 소리가 날 정도로 놀랐다. 눈을 뜬 아기의 얼굴은 내가 생각했던 아기 얼굴과 달랐다. 내 아기 맞나 싶어서 이름표도 확인했는데 내 아기가 맞았다.


그제서야 눈, 코, 입, 머리카락, 얼굴형, 보이는 모든걸 세세하게 관찰했다. 눈은 남편을, 입매는 나를 쏙 빼닮았다. 아기의 검정색 눈동자가 초롱초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직 시야가 발달하지도 않았는데 아기는 내쪽을 보면서 무언가를 말하는 것 처럼 입을 오물오물 거렸다.


갑자기 또 왈칵 눈물이 터져나왔다. "하아 .. 달콩아... 엄마야... 엄마가 얼른 안아줄게... 달콩아... 사랑해..."

옆에 다른 산모들도 조용히 아기를 보고 있는데, 나 혼자 그야말로 멜로영화를 찍었다. 세상에 태어났는데 아직도 엄마가 아기를 안아주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 이틀동안 잘 자라고 있어줘서 고마운 마음, 엄마 아빠에게 선물처럼 와줘서 하늘에 감사한 마음 복합적인 감정 때문에 신생아실 앞에서 또 엉엉 울어버렸다.


이어지는 모유수유 시간, 처음으로 아기를 안아보았다. 팔뚝만한 길이에 생각보다 무게가 별로 나가지 않아 가볍게 한팔로 들어올릴 수 있었다. 아직 젖이 돌지 않아서 아기가 빨아먹을게 있을까 걱정했는데, 간호사선생님은 "아기는 먹지않아도 무언가를 빠는 행위에서 만족감을 느껴요"라고 안심시켜줬다.


처음으로 아기에게 젖을 물렸다. 아기는 아기새처럼 입을 쩍쩍 벌리더니 내 가슴이 아플정도로 세게 젖을 빨았다. 아기는 내 가슴 한쪽당 20분, 양쪽해서 총 40분을 내 품에서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젖을 열심히 빨았다.  젖먹던 힘까지 힘내! 라는 말이 생각났다. 미약한 힘이 아니라 진짜 강력한 힘 끝까지 내라는 말이었다.

 

한쪽팔은 아기 머리를 지탱하고 있었고 다른쪽 팔은 아기 발가락을 열심히 더듬어봤다. 앙상한 발가락이 꼬물꼬물 움직이더니 발가락으로 아기는 내 손을 꽉 쥐었다. 깜짝 놀랐다. 마치 엄마를 알아보고 손으로 나를 잡는 느낌이었다. 이때 또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나는 정말 우리 아기를 위해 살아야지..." 또 다시 울컥했다.


그날 저녁 병실로 돌아온 나는 쉽게 잠을 잘 수 없었다. 아기를 처음으로 안았을 때의 따뜻한 느낌, 아기 발가락이 나를 잡는 느낌, 아기가 나의 가슴을 힘껏 빠는 느낌, 새생명에서 느껴지는 에너지가 아직도 생생하다. 남편에게 전화했다.


"나,는, 흑흑... "

울면서 전화하니까 남편이 무슨 일이냐며 걱정하는 목소리로 괜찮냐고 했다.

"나,는 흑흑 그렇게 착하게 살지도 않았는데, 하늘에서 나에게 천사를 내려주셨어! 흑흑"

남편도 가만히 듣고있다가 말했다.

"따흑(눈물 참는 중)... 난 이제 무조건 달콩이(:태명)를 위해 살꺼야. "


이날의 전화통화는 우리 부부가 서로를 놀리는 에피소드가 됐다. 이젠 무슨 일만 해도 "나, 는! 따흑" 이러면서 서로를 놀린다. 아기가 태어나고 그날만큼 많이 울었던 적은 없었다. 그래도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을 꼽으라하면 그날이 떠오른다. 기뻐서 울었던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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