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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닙 Oct 06. 2022

마음의 리스트

Lisbon, Portugal 10

깊이 들이마신 공기, 그 속에 새겨진 선명한 차가움은 겨울의 질감이 분명했다. 라토역으로 가는 지하철 안, 창밖에는 며칠 동안 내 일상이 되어 준 낯설면서도 익숙한 풍경이 이어졌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건물들, 옅은 민트색 귀여운 신호등, 서로를 무심히 지나치는 사람들. 몇 밤을 더 보내고 나면, 더는 일상이 아닐 이 장면을 고스란히 담고 싶었다. 추억의 한 페이지에 선명히 남기를 바라며.


베르라도 현대 미술관에 도착했다. 햇볕이 비추는 벽돌은 그것만의 독특한 질감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티켓을 구매하려고 지갑을 꺼내는데, 그것을 본 직원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무료로 전시를 볼 수 있는 날이라는 말과 함께 기다란 복숭아색 티켓을 건네주었다. 뜻밖의 선물을 받은 나는 기쁜 표정을 드러내며 전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미술관 특유의 새하얀 벽, 말끔하게 반짝이는 나무 바닥, 그리고 당신의 감상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듯 모두들 숨죽인 공간. 나는 미술관을 좋아한다. 어떤 내용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는지보다, 공간이 주는 고유한 질감을 더 눈여겨보고 그 안에 머물고 있음에 빠져드는 편이다. 물론 공간이라는 그릇이 담아내는 작품이 근사하다면 더욱 만족스럽다. 이곳의 전시는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깊이 있었다. 섬세하고 묵직한 작품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었고,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어딘가 들끓어오는 감정이 맺혔다. 모호하고 먹먹한 느낌. 시끄럽지 않은 자극이었다.


긍정적인 자극을 영감이라고 해야 할까. 예기치 않은 순간에 찾아오는 그 감각은 늘 반갑다. 우연히 틀어 본 영화가 그날의 나를 울릴 수 있고, 친구의 플레이리스트에서 발견한 곡이 꽁꽁 싸매어진 마음을 무장해제시킬 수도 있다. 마음에 쏙 드는 무언가를 발견하면 빠르게 내뿜지 않는다. 오히려 금방 소진될까 봐 더 안쪽에 넣은 채 아껴둔다. 소중한 곡은 쉽게 질리지 않기 위해 조심히 꺼내 듣는 것처럼.


늘 어딘가로 멀리 떠날 때 그 시작점에서 듣는 음악이 있다. 바로 이상은의 <삶은 여행>. 가사와 멜로디에 그녀의 섬세함이 고루 녹아들어 있는데, 들을 때마다 진하고 묵직하게 다가온다. 각 여행의 출발점에서 들었던 이 노래를 재생하면 지나간 그 시간들이 떠오른다. 비가 내리는 이른 아침의 기차 안, 혼자 떠난 추운 겨울의 경주, 작은 미소가 번지는 순간들. 흘러가는 시간을 더욱 풍부하게 물들이는 것을 차곡차곡 쌓아가자. 필요할 때 언제든 꺼내 볼 수 있는 나만의 리스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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