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이름은.>과 <날씨의 아이> 리뷰
<날씨의 아이>가 개봉하기 전, 신카이 마코토는 NHK와의 인터뷰에서 <너의 이름은.>에 대한 몇몇 비판적 의견에 대해 “꽤 쇼크를 받았다”고 했다. 여기서 비판적 의견이란 ‘실제로 일본에 일어났던 비극적인 재해를 마치 없었던 일처럼 만든 영화다’라는 종류의 견해를 말한다. 실제 적지 않은 이들이 이에 대해 지적했으며, 나 역시 비슷한 비판을 제기한 적이 있다.(일전에 트위터 비공개 계정에서 “<너의 이름은.>이 3.11 이후의 영화임은 자명하지만, 그것이 3.11을 다루는 방식에 있어 적절한 방향성을 가진 영화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심스럽다”라고 적은 바 있다.) 이러한 견해가 수긍할만한 것인지에 대한 논쟁은 잠시 제쳐두고, 해당 인터뷰가 <날씨의 아이>에 대한 인터뷰인 만큼 신카이가 이 ‘쇼크’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래 인용구는 위의 답변 내용 직후에 나온 질문에 대한 그의 답변이다.
“좀 더 비판받는 작품을 만들자고 생각했다. (중략) 분명 <너의 이름은.>에는 일부 관객들을 화나게 했던 뭔가가 그 영화 속에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사람을 화나게 만드는 것은 사실 대단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들을 분노케하고 화를 내게 만드는 무언가가 작품에 있었고, 그것들은 그들의 마음을 어떤 식으로든 움직이게 했을 것이다. 그런 과정을 통해 ‘작가성’이 작품을 통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중략) 만약 비판을 받더라도 이런 과정이 있어야 나 자신이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날씨의 아이>는 찬반양론이 갈리는 영화가 될 거라 생각한다.”
- 신카이 마코토, NHK와의 인터뷰 중에서
눈여겨봐야할 건 ‘작가성’이라는 표현이다. 신카이의 작가성이란? 영화사 연구자 와타나베 다이스케는 「리얼 사운드」에 기고한 <너의 이름은.>에 대한 글에서 신카이가 “<너의 이름은.>을 통해 본인의 작가적 출신지인 ‘세카이계’와 ‘미소녀 게임’에 자각적으로 회귀했다”고 평했다. 결국 그에 대해 논하기 위해서는 다시 세카이계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초기작 <별의 목소리>부터 근작 <날씨의 아이>까지 그의 작품에는 (심지어 그것이 세카이계로 분류되지 않을 때도) 어떠한 일관성이 나타나있었다. 그 중에서도 그가 주로 참고한 것은 세카이계 내부에서 인물 간의 관계가 작동하거나 틀어지는 방식이었다. 그 영향으로 세카이계의 안팎을 오가는 감독임에도 대체로 그의 작업에서는 그가 세카이계의 내부에서 생산해오던 인물이나 관계의 흔적이 나타나곤 했다.
그렇다면 그의 ‘작가성’은 세카이계로 함축 가능한 것일까? 다시 와타나베 다이스케의 글을 가져와보자. 그는 신카이가 자신의 작가적 출신지에 ‘자각적으로’ 회귀했다고 했다. 덧붙여 “그 이후의 시대변화에 잘 올라탄 작품이다”라는 감상을 남기며 <너의 이름은.>이 이전(제로년대)의 세카이계 작품군과는 결정적으로 단절되어있다고도 언급했다. 자신의 글에서 와타나베의 글을 인용한 선정우 평론가 역시 <너의 이름은.>이 ‘세카이계의 총괄’, ‘세카이계의 종점’, ‘세카이계로부터의 졸업’으로 평가받을 만한 작품이라고 평한 바 있다. 두 견해를 종합하면 <너의 이름은.>의 성취는 포스트 제로년대에 이르러 세카이계에서 (다시) 출발해 세카이계의 종점에 도착한 아니메라는 데에 있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상한 점은 <너의 이름은.>의 차기작인 <날씨의 아이>에서 신카이가 <너의 이름은.>을 다시 거쳐가며 이전의 세카이계를 끌어왔다는 것이다. 나는 그가 보인 두 번의 태도 변화에 각자 다른 의미로 적잖이 당혹스러웠고, 그것을 마주하는 것의 난감함에 대해 얘기하곤 했다. 이는 스스로의 작가성과 대면하기 위해 ‘비판받는 작품’을 만들기 위한 선택인가? 이를 위한 신카이의 변화는 무엇이며 신카이에게 있어 <너의 이름은.>과 <날씨의 아이>는 어떻게 내부적으로 스스로를 위치시키는가?
너(<너의 이름은.>)의 위치는?
신카이 필모그래피의 흐름에서 <너의 이름은.>이 갖는 이질성에 대해 정리할 필요가 있다. 와타나베 다이스케는 <너의 이름은.>이 세카이계의 총괄로 평가되는 근거로 타키의 캐릭터 조형을 든다.
분명히 <너의 이름은.>은, 몇 번이고 지적했듯이 스토리적으로나 연출적으로나 지브리나 호소다 애니메이션처럼 ‘국민적 애니메이션’, ‘패밀리 대상’을 명확하게 지향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또한 과거 우리들 젊은 남성 관객이 지지했던 세카이계적 세계관이나 설정을 다분히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너의 이름은.>을 보고 나서 나는 결정적인 위화감도 느꼈습니다. 이 작품은 표면적으로는 세카이계적이면서도, 하지만 어딘가 세카이계와는 다릅니다. 그것은 아마도, 주인공 타키가 ‘세카이계적 나약한 소년’(중략)과는 달리, 그야말로 ‘포스트 제로년대적’으로 주체성을 갖고 행동하며 운명을 바꾸고자 하는 ‘현실(리얼)에 충실한’ 캐릭터상으로 바뀌어 있기 때문입니다.
-와타나베 다이스케 「<너의 이름은.>의 대히트는 어째서 ‘사건’인가? 세카이계와 미소녀게임의 문맥에 의거한 독해」 (2016.09.08)
요컨대 <너의 이름은.>은 제로년대 세카이계 주인공들의 무력함이 아닌,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오타쿠의 시대의 끝자락에서 ‘리얼충화’된 캐릭터를 통해 새로운 아니메의 기준점에 도달한 작품이다. 그가 근거로 제시한 타키 뿐 아니라 미츠하의 캐릭터성을 근거로 하더라도 그의 주장은 타당해보인다. (물론 어김없이 등장하는 낡은 오타쿠 코드의 등장, 그러니까 미츠하가 된 자신의 가슴을 주물러 의식적으로 몸이 바뀌었음을 확인하는 장면을 생각하면 미츠하에 대한 부분은 비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두 인물은 작중에서 제시되는 두 지역인 도쿄와 이토모리 안에서 운동한다. 미츠하의 경우에는 빠져나오려는 움직임, 타키의 경우에는 빼내오려는 제스처를 취한다. 영화는 두 인물의 운동에 의해 추동되며, 이것이 영화를 세카이계적으로 만듦과 동시에 이전의 세카이계와는 단절되도록 만드는 특이한 지점을 형성하게 된다. 그렇다면 두 인물이 운동하는 공간(세계?)은 어떠한가.
공간으로서의 세계와 장소성
신카이에게 어떤 ‘공간’이란 항상 중요한 문제로 제시되어왔다. 공간, 혹은 그 공간의 장소성은 인물들의 공통된 기억을 보존하는 곳으로서 존재한다. (이는 사실적인 작화와 동화에 유독 공을 들이는 그의 스타일과도 연관이 있어 보인다.) 동시에 그는 영화 내에 항상 어떤 틈이 존재하도록 하는데, 이는 개별적인 공간들, 혹은 쪼개지는 시간들에 의해 주로 형성된다. 이와 같은 틈은 곧 인물 사이에 발생하는 분리의 원인, 또는 결과로서 기능한다. 가령 <별의 목소리>에서는 지구와 우주라는 시·공간의 분리가, <초속 5cm>에서는 물리적 거리에 의한 분리가 이루어진다. <언어의 정원>과 같은 경우에는 관계의 속성 자체가 관계의 분리로 이어지기도 한다. 신카이에게 분리와 틈의 발생이란, 관계가 성립하거나 단절되기 위한, 혹은 그 둘이 동시에 일어나기 위한 전제와도 같다. 그리고 그 관계가 일시적인 것이든 지속적인 것이든, 인물들끼리 공유하던 시·공간에 한 사람은 남고 다른 한 사람은 떠난다. 그들에게 기억은 단절과 이별 이후에 차차 보존되는 것으로써 존재하게 된다. 두 사람이 함께 있던 공간은 공통된 기억을 간직하는 곳으로서 일종의 장소성을 부여받은 채 거기에 남는다. 그 안에서 주인공은 관계의 진전을 이루기보다는 무력하게 서있거나 그 장소를 상징하거나 대체하는 무언가에, 혹은 그 장소에 대한 기억을 가진 자의식에 머무른다.
<너의 이름은.>은 이를 기묘하게 비튼다. <너의 이름은.>에는 각 주인공들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이토모리와 도쿄가 등장한다. 흥미로운 건, 미츠하가 잠시 타키를 만나러 도쿄로 떠나기 이전까지 둘은 같은 장소에 동시에 존재하지 않(거나 그러지 못한)다는 점이다. 서로의 몸이 바뀌는 것을 계기로 서로의 삶을 살아볼 뿐 둘이 같은 일상을 보내지는 못한다. 심지어 서로의 몸이 바뀌어있는 중에 실제 자신의 몸이 겪는 일들을 원래의 몸으로 다시 돌아오면 자각하거나 기억하지 못하기까지 한다. 서로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건 오로지 서로의 몸이 바뀌었을 때 뿐이며, 이로 인해 두 인물은 서로 마주치거나 마주볼 수 없다. 둘이 ‘공유’하는 것은 엄밀히 말해 기억이라기보다는 일기나 사진, 그림과 같은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둘이 나란히 서서 공유하는 시간, 그리고 그 시간이 있는 장소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공유’를 위한, ‘보존’을 위한 장소는 어디에 있는가?
미츠하와 타키가 동시에 존재하지 못하는 만큼 이토모리와 도쿄라는 공간들 역시 둘이 만나기 이전까지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토모리는 도쿄(라는 이름을 단 도쿄의 어떠한 도시성)에 그리 관심이 없고, 도쿄 역시 이상할 정도로 이토모리에 관심이 없다. 그저 미츠하만이 도쿄에서의 삶을 동경하는 정도이며, 서로의 몸이 바뀔 때 서로의 장소를 체험해보는 정도다. 이후 드러나는 3년이라는 간극은 두 장소의 거리를 더욱 떨어트려놓는다. 두 장소는 (오타쿠적으로 표현하자면) 루프에 의해 세계선이 이동하기 전까지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 동시에 존재한다고 느낀다면 오로지 미츠하와 타키가 그 매개가 되었기 때문이지 영화 내에서 두 지역이 나란히 놓여 같은 것을 공유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오히려 미츠하가 행동하고 운석이 떨어지기 전까지 두 ‘세계’는 평행해있었다. 신카이는 그 중간지대로 이토모리 마을의 분지 위를 제시하며 미츠하와 타키를 (마침내) 마주하게 만들지만, 그 이후의 재회 역시 망각이라는 조건 하에 성립된다.
예외적으로 두 지역이 같은 것을 목격하는 순간이 있다. 혜성이 갈라지는 순간이다. 그 순간 신카이는 여태까지 의도적으로 비워오던 이토모리와 도쿄의 사이에 제 3의 존재를 끼워넣는다. 이토모리와 도쿄의 사이에 틈입하는 뉴스 보도 장면들과 그들이 만들어내는 일종의 소음, 혹은 웅성거림은 컷 사이사이에서 쏟아져 나와 장면 안으로 침범해온다. 이는 일반적으로 재난 영화가 미디어를 활용하는 방식과는 다르다. 해당 보도들은 자신들이 보도하는 것이 잠시 뒤 재난 상황으로 보도될 것임을 알지 못한다. 아이러니하게도 테시가와라가 “정말로 갈라지고 있어!”라고 말할 때, 뉴스 리포터는 “보십시오, 혜성이 갈라지고 있습니다.”라며 감탄스러운 어조로 그 순간을 중계한다. 타키의 뒷모습과 갈라지는 혜성을 보여주며 “이런 현상을 목격할 수 있다는 건 이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대단한 행운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라며 예찬하는 장면은 긴박한 상황의 이토모리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미츠하가 가장 비극적인 순간을 눈앞에 두고 있을 때, 타키(그리고 도쿄)는 그 순간을 찬미한다.(타키는 “그것은 마치 꿈에서 본 경치와도 같이 아름다운 광경이었다.”라고도 말한다.) 분리된 세계의 분리된 감상이 충돌하고 맞서는 순간이다.
이러한 엇나감은 미츠하와 타키를 움직이게 만든다. 타키는 쿠치카미자케를 마시고, 미츠하는 이토모리의 길을 질주한다. 두 미츠하와 두 타키, 즉 무력하게 죽어버린 미츠하와 이토모리를 탈출하려는 미츠하는 다르며, 혜성을 황홀하게 바라보는 타키와 분지 위에서 미츠하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해 울부짖는 타키는 다르다. <너의 이름은.>의 세계에서는 공통된 재난의 기억 자체가 소거된 채 ‘새로운 장소의 새로운 인물’이 되어야만 새로운 세계, 살아남은 뒤의 세계가 전제된다. 분리된 공간의 합일, 이를 위한 인물들의 운동과 제스처, 새로운 세계와의 만남은 곧 제로년대 세카이계로부터 스스로를 단절시키는 하나의 움직임으로서 작동한다.
너(<날씨의 아이>)의 위치는!
<날씨의 아이>는 새로운 문법의 이행이라기보다는 마치 이전의 문법을 다시 참고하는 것처럼 보인다. <너의 이름은.>이 관객들로 하여금 그것이 세카이계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지 망설이도록 설계된 영화라면, <날씨의 아이>는 불화하는 두 세계와 주인공들에 의해 변화하는 세계를 보여주며 명백히 세카이계의 자장 아래 있음을 드러내는 영화에 가깝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제로년대로의 재-회귀라고 단언하긴 어렵다. 그러기엔 그가 취하는 방식이 상당 부분 <너의 이름은.>을 거쳐가고 있다. 여기서 신카이는 스스로의 영역에서 다른 선택지를 모색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러기 위해 그는 도쿄를 재등장시킨다.
<날씨의 아이>에서 도쿄에 대한 감상을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대사가 있다. “도쿄는 무섭네.” 도쿄라는 거대한 공간 뿐 아니라 대부분의 장소들(호다카의 본가를 포함한다)이 도망쳐나온, 혹은 도망쳐나올 수밖에 없는, 도망쳐나와야 하는 곳들이다. 이후 영화가 진행되면서 신카이는 다시 도쿄를 둘로 분리시킨다. 맑은 하늘을 되찾은 도쿄와 사라진 히나가 있는 하늘 위의 세계. 맑음의 대가로 모인 빗물들이 호다카의 머리 위로 쏟아지듯이, ‘하레온나’로서 행해온 행위의 대가로 히나의 육체는 상실되어 다른 세계로 옮겨간다. 히나가 사라지고 날이 개자 시민들이 그 상황을 반기는 장면에서 뉴스 보도 파편들의 침투는 <너의 이름은.>의 그것과 유사하게 기능하고 있다. 히나가 가장 비극적인 순간을 맞이한 순간, 미디어는 그 순간을 반긴다. ‘세계’는 미디어를 거쳐감으로써 스스로의 존재를 과시하게 되고 두 세계 사이를 엇나가게 만든다. 그 엇나감을 계기로 호다카와 나츠미가 스쿠터를 타고 질주하는 행위와 호다카가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는 행위는 <너의 이름은.>이 그러했듯이 기본적으로 이탈과 탈출이라는 속성을 공유한다. 미츠하의 운동이 이토모리를 벗어나 도쿄로 향하는 움직임으로써의 운동이라면, 호다카의 경우엔 애초에 자신을 쫓는 이들로부터 도망치는 행위(이는 동시에 ‘기존의 도쿄’로부터 탈주하려는 몸짓이기도 하다)와 히나에게로 향하고자 하는 행위가 합일된 운동이다. 그렇다면 <날씨의 아이>는 어디에 도달하고자 하는가의 문제가 남는다. 어디에도 있을 수 없는 아이들이 도달해야할 곳은? 그리고 신카이는 (타키가 <너의 이름은.>에서 외친 “도쿄도 언젠가는 사라질 수 있습니다”를 실현시키기라도 하듯) 그대로 도쿄를 수몰시킨다. <너의 이름은.>이 도착점으로서 도쿄를 설정해두고 미츠하를 탈출시키고자 했다면, <날씨의 아이>는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는 도쿄를 상정해둔 채 인물들은 다시 도쿄로 돌려보낸다.
한 번 더 꼬아서 생각해보자. <날씨의 아이>의 안에서 아이들의 위치를 다시 바라본다면, 그들은 도망치는 이들임과 동시에 ‘추방당하는’ 이들이기도 하다. 히나와 호다카에게 도쿄의 질서, 어른들의 질서는 위협적이거나 무능하거나, 둘 중 하나이거나 둘 모두이다. 도쿄의 질서가 둘을 추방하려는 힘과 히나와 호다카가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힘이 만나며 히나는 도쿄(로 대표되는 세계)로부터 튕겨져나가게 된다. 사라진 히나는 보도되지 않는다. 애초에 질서에 편입되지 않았다는 듯, 원래 거기에 없었다는 듯. 히나를 끌어오는 순간 호다카는 도쿄를 대가로 행동해야한다는 사실을 안다.
결국 <날씨의 아이>는 기억으로서의 공간을 구축시키는 듯 하면서도 어느 순간 그것을 무너뜨린다. 수몰된 도쿄에 히나와 호다카가 공유하던 공간은 거의 사라졌다. 하지만 히나와 호다카는 다시 재회하며 도쿄의 주민들은 변해버린 도쿄에 적응해 여전히 삶을 유지한다. 호다카의 확신에 찬 대사(“우리가 세계를 바꾼거야!”)는 <너의 이름은.>의 태도와는 분명 다르다. <너의 이름은.>의 에필로그가 새로운 존재로의 전이와 이로 인해 발생한 망각에 의해 만들어졌다면 <날씨의 아이>의 에필로그는 침몰하고 변화한 세계(와 스스로가 그 변화의 주체임)의 확인, 그리고 서로에 대한 확인에 의해 만들어진다.
새로운 세계와 살아남은 아이들, 그리고 그 이후
<날씨의 아이>가 자신의 영화 만들기에 있어 근본적 변화를 꾀하거나 전작에서의 선택을 보완하기 위한, 혹은 무너뜨리기 위한 작업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터뷰 내용대로 자신에 대한 비판과 마주하고 스스로의 작가적 영역에서 다른 선택지를 모색하는 과정에 가깝다. <너의 이름은.>이 제로년대에 머물기를 거부함으로써 새로운 규범을 제시하는 영화였다면, <날씨의 아이>는 제로년대 규범과 스스로 선택한 지점을 동시에 재검토함으로써 새로운 태도를 제시하고자 한 영화이다. <날씨의 아이>의 선택에 온전히 동의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신카이가 이후 두 영화의 성취를 진전시키기보다는 다시 멈춰서거나 뒤돌아서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다. 하지만 그렇기에 신카이에게 “더 얘기해보라”며 권유하고 싶어진다. <날씨의 아이>의 다음에 위치할 영화는 어떤 위치를 가질까. <너의 이름은.>에서 새로운 세계의 조건을 말하고, <날씨의 아이>에서 살아남은 아이들을 보여주었다면 그 다음 영화에서 그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참고자료
마에지마 사토시,『세카이계란 무엇인가』, 워크라이프
와타나베 다이스케,「<너의 이름은.>의 대히트는 어째서 ‘사건’인가? 세카이계와 미소녀게임의 문맥에 의거한 독해」
선정우,「<너의 이름은.>과 ‘세카이계’ 애니메이션의 완결」
신카이 마코토 인터뷰 https://www3.nhk.or.jp/news/html/20190718/k1001199494100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