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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잼인 Mar 20. 2022

마실 수 있을 때 더 마실걸

시그니처 칵테일

오랜만에 술 이야기로 돌아왔습니다. 건강상의 이유로 금주를 하게 되면서... 술에 대한 글을 한동안 못 썼지 뭐예요. 여전히 술을 못 마시지만, 옛날에 마신 술을 떠올리며 글을 풀어봅니다. 



지금 하지 못하는 두 가지를 본격적으로 그리워 해보겠다. 음주와 해외여행. 해외여행 가서 밤에 마시는 술처럼 여유로운 술도 없다. 왜 밤에 마시는 술이냐면,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낮술을 하면 급격히 졸려진다. 그래서 관광 일정 중에 맥주 한 잔이라도 마시면 졸린 눈으로 다음 관광지까지 가는 지도를 한참을 들여다 봐야하고, 신경을 곤두세우면서 취기가 금세 사라진다. 


반면 모든 일정을 끝내고 밤에 술을 마시면 다음 일정에 대한 걱정을 내려놓고 편하게 취할 수 있다. 한 모금 마시고 괜히 창밖이나 바의 장식이라든지 술병들을 구경한다. 평소에는 말소리 소음을 싫어하면서도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는 BGM처럼 들려서 눈을 감고 주변의 소리를 가만히 듣기도 한다. 무슨 술이든 좋지만, 이때 여행지에서만 마실 수 있는 칵테일을 마시면 그 순간이 더 특별해진다. 


여행을 가서 그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칵테일을 마시는 재미가 있다는 걸 홍콩의 한 바에서 처음 알았다. 여행 첫날 밤, 친구와 나는 란콰이펑에 위치한 <Quinary>라는 곳에 갔는데, 칵테일 챔피언 바텐더가 있고, 신기한 칵테일이 많다고 해서였다. 저녁 시간의 란콰이펑은 어마어마한 인파로 좁은 길을 줄 서서 가야 할 정도였지만, 신기한 칵테일은 맛봐야 하기에 친구와 꾸역꾸역 인파를 뚫고 바로 향했다. 


우리는 두 가지 칵테일을 주문했는데, 그중 얼그레이 캐비어 마티니가 기억에 남는다. 보드카를 베이스로 하면서 그 위에 분자요리로 형태를 바꾼 얼그레이 차를 올린 술이었다. 캐비어 같은 알을 씹거나 비누 거품처럼 생긴 걸 맛보면 얼그레이 차 맛이 났다. 먼저 맛보고 생경한 식감과 예상하지 못한 맛에 놀라 친구에게 빨리 먹어보라며 잔을 넘겨주었다. 이곳이 아니면 다시는 맛볼 수 없는 칵테일이기에 마시면서도 벌써 아련했다. 나중에 분명히 이 순간을 추억하겠지.


그렇다고 여행지에서의 술이 다 좋았던 건 아니다. 혼자 갔던 치앙마이에서는 우버를 타고 <The Long House>라는 곳을 찾았다. 해외에서 혼자 바에 가는 건 처음이라 잔뜩 긴장한 채 들어갔고, 바텐더와 이야기하는 바 자리는 부담스러워서 테이블 자리에 앉았다. 시그니쳐 칵테일 메뉴 중 고민하다가 버터플라이피와 리치 즙이 들어갔다는 Rim Ping Remedy라는 걸 시켰고, 주문을 무사히 마쳤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해외에 와서 혼자 바에 오다니, 제법 어른 같잖아?’라는 자아도취감도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칵테일은 맛이 없었다. 내가 리치 맛을 안 좋아한다는 사실을 첫입 마시자마자 깨달았다. 값도 비쌌는데, 실패했다니. 자아도취감은 빠르게 식었고, 주섬주섬 전자책을 꺼내 읽으며 미각에 쏠린 내 집중력을 분산시켰다. 어느 정도 다 마셨을 때, 주위를 둘러보니 바에는 백인들만 있었다. 그 바는 태국 물가 대비 비싼 곳이었고, 그런 공간에 백인만 보이니 뭔가… 기분이 나빠졌다. ‘저 기득권층, 비싼 술과 안주를 턱턱 사 먹는구먼…’이라고 혼자 배알 꼴려 하며 바를 나섰다. 


그렇다. 칵테일도 여행지 미화의 법칙을 충실히 따른다. 여행지에서 길을 잃어서 패닉이었어도, 지갑을 잃어버렸어도 나중에는 ‘참 좋았지…’라고 하는 것처럼, 칵테일이 맛없어도 ‘그거 참 맛없없지… 그래도 그때가 좋았다.’라며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다. 그러니 특이한 칵테일을 맛볼 수 있는 바를 끊임없이 검색하고, 평소에 먹던 것보다 좀 더 비싼 칵테일도 사 마실 수밖에. 


사실 굳이 그곳에서만 마실 수 있는 칵테일을 찾아 먹을 필요는 없다. 오히려 여행지를 더 자주 추억하고 싶으면 평소에도 자주 마실 수 있는 클래식 칵테일을 마시고, 돌아와서 한국의 바에서 동일한 걸 시켜 먹으며 떠올리기 쉽다. 그런데도 시그니처 칵테일을 찾는 건 그곳의 우표를 모으는 감성을(우표를 모아본 적 없지만) 놓칠 수 없기 때문이다. 비록 그때 마신 칵테일은 변기를 거쳐 지구 어딘가의 액체가 되었겠지만, 그 공간에서 그 칵테일을 마신 경험은 뇌의 저장공간 어딘가에 남아있으니까 말이다. 



그날의 홍콩에서는, 그날의 치앙마이에서는 몇 년 후에 전염병이 2년 넘게 창궐할 줄도, 잇몸이 아파서 술을 못 마시게 될 줄도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마시고 왔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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