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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잼인 Oct 23. 2021

막걸리 회피형 인간

막걸리


안 좋아하는 술을 묻는다면, 나는 3개의 술을 댄다. 

와인, 사케, 막걸리


각기 좋아하지 않는 이유도 다른데, 우선 와인은 언젠가 무제한으로 와인을 주는 집에서 퍼마시다가 다음날 지옥의 숙취를 겪으면서 피하게 됐다. 사케는 그냥 내 입에 맛이 없어서 꺼린다. 마지막으로 막걸리는, 냄새가 나서 찾지 않는다.


막걸리는 대체로 달달하다 보니, 마시다 보면 꼭 누군가는 거나하게 취한다. 그게 내가 됐든, 옆 사람이 됐든. 파전을 간장에 찍으려는 순간, 가벼운 양은 잔이 소매에 걸려 남아있던 소량의 막걸리가 옷에 쏟아지는 일은 허다하고, 사발을 들이킬 때는 급하게 마시다가 막걸리를 줄줄 흘리는 일이 태반이다. 그렇게 나의 옷은 시큼한 막걸리 냄새에 절여진다.


옷만 그러느냐, 그것도 아니다. 술자리가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내 숨에서 미세하게 느껴지는 시큼한 냄새를 맡는다. 그러다가 트림이라도 나올 때면… 내 위장 속 음식물들이 발효되고 있는 상상을 하게 된다. 이대로 냄새를 집까지 끌고 들어갈 수는 없다고 판단하고, 지하철에서 내려 근처 편의점에서 이클립스나 호올스 같은 사탕을 사 먹어도 막걸리의 흔적을 지우기엔 역부족이다. 


캥거루족인 나에게는 술의 냄새가 굉장히 중요한 요소이다. 종종 술을 마시고 들어가서 가족들의 잔소리를 듣기 싫어서 안 마신 척을 한다. 우선 오늘 야근한다고 뻥을 치고, 술을 마시고는 집에 들어가기 직전에 사탕으로 입에서 나는 술 냄새를 잡는다. 그러고는  “피곤해~ 피곤해~” 라고 칭얼대며 바로 샤워를 하고, 자러 들어가는 식으로 잔소리를 피해 왔다. 하지만 막걸리를 마신 날에는 불가능하다. 거짓말을 하기엔 내 온몸에서 나는 막걸리 냄새가 너무나 선명하기 때문에. 


술 마신 걸 가족에게 들키기 싫어하는 이유는 아마도 나의 성장 과정에 있지 않을까 싶다. 우리 집은 이것저것 통제되는 것들이 많았다. 학원 가기 전 비는 시간에 텔레비전 보지 말라고 텔레비전 전선을 자물쇠로 묶어 놓기도 했고, 살찐다고 과자 대신 파프리카를 간식으로 싸주시곤 했다. 물론, 하지 말라고 하는 말을 듣지는 않았다. 어떻게든 텔레비전 전선을 자물쇠에서 풀어서 만화를 봤고, 매점에서 몽쉘 한 통을 사서 혼자 방에서 몰래 다 먹기도 했다. 하지 말라는 건 숨어서 몰래 다 하는 사람으로 성장한 역사 탓에 술을 마실 때도 이 감각이 늘 깨어있다.


내가 술 마신 걸 정말 모를까? 가끔 의문이 든다. 사실은 하지 말라는 걸 몰래 다 하면서 매번 들켰다. 민첩하지 못한 탓에 항상 흔적을 남겼다. 텔레비전 전선을 자물쇠에 느슨하게 묶어놓는다던가 다 먹은 몽쉘 박스를 들키는 식으로 빼도 박도 못하게 말이다. 다행인 건 그때마다 가족들은 어이없어하며 크게 혼내진 않았다는 거다. 오죽 만화를 보고 싶었으면, 오죽 몽쉘을 먹고 싶었으면 하고 넘어갔다. 그러니까 어쩌면 가족들은 내가 몰래 술을 마시고 오는 걸 알고 있지만, 오죽 술이 마시고 싶었으면 하고 굳이 아는 척을 안 하는 걸 수도 있다. 진실은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나는 계속 진실을 회피한 채 몰래 술을 홀짝일 생각이다. 


그러니까 냄새가 폴폴 나는 막걸리는 나의 이런 숨기려는 습성에 맞지 않는 술이다. 그렇다고 영원히 마시지 않는 건 아니고, 집에 이미 술 마시고 들어간다고 얘기를 한 날에는 막걸리를 허한다. 하지만 나의 술 후보 중 낮은 우선순위에 있고, 다른 술에 늘 밀린 탓에 1년에 2~3번 정도만 마신다. 나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막걸리는 늘 아픈 손가락이다. 


자주 마시지 못하는 만큼, 한번 마실 때 맛있는 막걸리를 마시고 싶다. 다음에 막걸리를 마시게 된다면 복순도가 막걸리나 금정산성 막걸리를 마시련다. 두 막걸리 다 마셨을 때 머리 위에 전구가 탁 켜지는 것 같던 느낌이 들었던 탓에 막걸리 하면 계속 생각난다. 막걸리에 두부김치… 누가 나 대신 좀 먹어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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