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잼인 May 20. 2021

술을 머리로 마시지는 않잖아요?

위스키


2021년 2월 5일  

    발베니 12년 : 꿀 맛 나는디?  

    맥켈란 12년 : 초코향이 난다.  

2021년 2월 12일  

    라프로익 10년 : 훈제 향이 엄청 난다.  

 2021년 3월 12일  

    아벨라워 12년 : 바나나향! 약간 짭짤하기도? 재밌는 맛이네   



요즘 새로운 위스키를 마실 때마다 휴대폰 메모장에 나름대로의 감상평을 남기고 있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에는 너무 단순하고, 짤막한 평이지만 그래도 맛을 기억하는 데에는 도움이 된다. 맛을 기억하는 건 상당히 중요한데, 내가 어떤 걸 먹었고, 그 위스키의 어떤 맛을 좋아하는지를 알아 둬야 바텐더에게 내가 좋아하는 맛도 잘 설명할 수 있다. 그렇게 추천받은 위스키가 내 취향에 또 맞을 때 눈이 번쩍 뜨이는 순간을 즐기기 위해 취기가 오르는 와중에도 메모장을 켠다. 


 사실 한동안 나는 ‘호부호형’을 못했던 홍길동처럼 위스키를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했다. 마셔본 위스키가 많지 않고, 위스키에 대해 아직 잘 모르는 게 부끄러웠고, 경험이나 지식이 많아야만 입을 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위스키를 만드는 증류소 사장의 가족사부터 줄줄 읊는 척척박사들의 글이 많기에 내가 함부로 위스키에 대해 말했다가는 “흠,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그런데 그 위스키는 사실 다른 위스키와 달리 무슨 오크통에서 숙성되어 미묘한 맛의 차이가 있습니다...”라는 식의 반응이 있을 것만 같았다. 술과 관련된 정보를 담고 있는 유튜브를 돌아다니다 보면 꼭 그런 댓글이 달린 것을 봤고, 내 글에도 그런 반응이 있을 거라고 상상하면 머리가 지끈지끈하는 바람에 말하고자 하는 의지가 꺾였다. 아마도 이 땅에서 여성으로 살아오면서 축적된 경험이 만들어낸 방어 기제였으리라.


 그런데도 내가 위스키에 대해 입을 열기 시작한 건 특별하고, 비장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다. 나보다 위스키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도 위스키를 좋아한다고 말하고 다니는 걸 보고는 용기를 얻었다. 마치 클럽하우스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스피커로 나타나 신나게 떠들어대는 걸 보고는 안도감을 얻고는 슬그머니 손을 드는 것처럼. 언젠가 위스키를 좋아한다는 지인에게 나는 위스키를 물에 섞어 먹기도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때 그는 위스키를 어떻게 물에 타 먹냐, 위스키에 대한 모독이다 라는 식으로 말하면서 내가 위스키를 마시는 방식을 깎아 내렸다. 알고 보니, 위스키를 마시는 방법 중에 ‘트와이스 업’이라고 있는데, 내가 마시는 것처럼 술에 물을 희석시켜 먹는 방법이었다. 심지어 향과 풍미를 더 잘 느낄 수 있다고도 한다! 나는 나에게 맞는 방식으로 마셨을 뿐인데, 실제로 통용되는 방법이라고 하니 나의 혀에 박수를 보내고 싶었고, 그 일로 나는 용기를 얻었다.


 아마도 위스키에 대한 배경지식이 많으면, 맛을 음미할 때 더 풍부한 표현을 구사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아이리쉬 위스키니 아일라이 위스키니… 무슨 오크통을 쓰니 마니는 나의 관심 밖이다. 내가 원하는 건 오로지 하나. 맛 보는 것! 머리로만 그 술에 대해 알면 무얼하나, 자고로 술은 혀로 맛을 봐야 그 술에 대해 알게 되는 거라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어떤 걸 좋아하면, 깊숙히 파야 한다고 생각해서 언젠가는 꼭 위스키 증류소 투어라는 걸 가보고 싶어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안다. 양조장에서 위스키에 대한 설명을 들을 때 하품만 엄청 하고, ‘언제 시음해볼 수 있지’ 하고 딴짓만 할 거라는 걸… 마치 초등학교 때 과자 회사에 견학 갔을 때, 그 회사의 역사를 발표하는 직원에게 “과자는 언제 줘요?”라고 묻던 애들처럼 말이다. 나중에 내가 아일랜드를 여행하게 된다면, 증류소 투어할 돈으로 차라리 바에서 종류별로 맛보기나 해야지. 


 내가 위스키를 즐기기 시작한 건 나의 미각적 본능을 따르면서부터였다. 지인으로부터 위스키 한 병을 선물 받았는데, 초심자였던 나로서는 스트레이트로 먹는 게 거부감이 들었다. 그렇다고 언더락으로 먹자고 얼음을 얼리기에는 귀찮았다. 그래서 생각해낸 게 위에서 언급한 것 처럼 물에다가 타먹는 거였다. 계량을 하지 않고 그냥 눈대중으로 위스키를 섞어 먹었는데, 훨씬 쉽게 마실 수 있었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는데 짜장면을 젓가락에 휘휘 돌려 말아 먹어서 가족들을 깜짝 놀래켰던 나의 미각적 본능이 또 이렇게 발휘되었다. 


 그렇게 위스키에 스며들면서 다양한 위스키를 맛보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다. 내가 위스키를 좋아하는 건 어쩌면 위스키의 맛이라기 보다는 다양한 종류일 수도 있다. 집에 위스키를 보틀로 2병 사놓고는 자꾸만 밖에서 다른 종류를 마시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바의 메뉴판을 보면서 다채로운 이름의 위스키를 쭉 보고, 하나씩 하나씩 시도해 보는 재미가 있고, 내가 좋아하는 맛과 향은 뭔지 알아가는 것도 좋다. 


 하지만 위스키의 종류만큼이나 가격도 워낙 천차만별이라 까딱하다가는 가산을 탕진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나름의 원칙을 세웠는데, ‘한 잔에 2만 원 이하, 보틀은 15만 원 이하까지만 마시기’이다. 이것도 정말 여유롭게 잡은 거고, 보통은 한 잔에 1만 원내외, 보틀은 10만 원 이하짜리를 마신다. 어떤 술을 좋아한다고 해서 그 술의 고급 버전을 꼭 맛 봐야 하는 건 아니니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까지만 맛보기로 했다. 에잇 기분이다! 하고 너무 비싼 위스키를 사 마셨다가는 집에 가는 길에 괴로워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이걸 어떻게 아나면, 예전에 한 맥주 집에서 맥주가 비싸 봤자 얼마나 비싸겠냐며 가격표도 안 보고 병을 집어 왔는데, 계산할 때 한 병에 5만 원짜리였다는 걸 깨닫고는 내 잔고와 마음이 불행해진 적이 있다. 


 여전히 위스키에 대해 잘 모르지만, 나는 위스키를 즐겨 마신다고 말하고 다닌다. 앞서 말한 댓글처럼 이 글에도 “하나의 술 종류를 충분히 즐기려면 그 배경지식까지 다 아는 게 술에 대한 예의죠.” 같은 댓글이 달릴 수도 있다. 그런데 뭐, 술을 머리로 마시는 건 아니니까 그런 댓글은 쿨하게 지나치고 뚝심있게 그냥 계속 말하련다. 


“위스키를 즐겨 마시고요, 초콜릿 향이 나는 위스키가 좋더라고요. 보통 스트레이트로 먹고, 가끔은 물에 희석해서 마셔요.”




매거진의 이전글 사랑해, 옌칭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