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잼인 May 06. 2021

사랑해, 옌칭

연태고량주와 칭따오맥주


만남과 이별이 공존하는 곳, 공항. 그 공항에서 우리는 대낮부터 ‘옌칭’을 말고 있었다. 옌칭이란 연태고량주와 맥주를 소맥처럼 섞어 마시는 건데, 연태고량주의 파인애플 향이 향긋하게 감돌고, 맥주의 청량감이 만나서 정말 맛있다. ‘출국하기 전에 또는 귀국할 때 마신 건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아니다. 우리는 애초에 술을 마시러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때는 바야흐로 코로나 19가 없던 2018년의 어느 여름날, 인천 끝자락에서 열리는 음악 페스티벌에 들어가기 전 간단하게 한잔할 곳을 물색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 근처에서 한잔할만한 곳이 없었고, 그러다가 눈에 들어온 게 인천공항이었다. ‘아니, 뭐 설마 공항에서 술을 팔겠어?’ 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검색해봤는데, 이게 웬걸? 푸드코트에서 소맥도 팔고, 한식당에서도 술을 마실 수 있다고 나왔다. 푸드코트에서 술을 마시기엔 좀 부끄러워서 한식당에 가서 먹자는 결론을 내렸고, 드디어 페스티벌 당일에 인천공항에서 만났다.


찾아봤던 곳 중 하나인 한식당 앞에 갔는데, 우리는 기와집 모양의 입구에서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한 상차림에 곁들이는 약주의 느낌으로 술을 파는 곳이라 페스티벌 간다고 자유로운 영혼처럼 옷을 입고 온 우리와는 영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 여긴 아닌 것 같다.”

하고 이어서 찾은 곳은 같은 층에 있던 캐주얼한 중식당. 메뉴판에서 연태고량주와 맥주를 보고는 황급히 그 식당으로 들어갔다. 연태고량주와 맥주에 꿔바로우, 짬뽕 그리고 잔뜩 들뜬 마음을 안주 삼아 먹었다. 그날 아침에 비가 와서 페스티벌 공연장이 진흙탕으로 엉망이 되었다더라고 걱정하면서도 우리 셋은 그저 신났다.


옌칭은 방방 뛰어야 하는 콘서트나 페스티벌 전에 마시기에 아주 좋은 술이다. 특히 나와 같은 초보는 맨 정신으로 정신줄을 놓고 공연을 즐기기가 어렵기 때문에 그럴 때 약간의 술이 도움이 된다. 하지만 이때와 어울리는 술에는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첫째, 화장실을 자주 가게 되지 않는 술일 것. 그래서 맥주는 탈락이다. 맥주를 취할 때까지 마셨다가는 물배가 차고, 공연을 보다가 화장실을 가는 건 내 공연 티켓을 버리는 행위와도 같다.

둘째, ‘나 술 마셨어요.’라고 티 내는 술이 아닐 것. 소주야말로 빠르고 쉽게 취하기 좋은 술이지만, 냄새 때문에 탈락이다. 공연장에 입장할 때까지 거쳐 가는 곳이 생각보다 많다는 걸 유념해야 한다. 지하철, 버스, 입장하는 줄에서 술 냄새를 폴폴 풍기는 건 1호선 주정뱅이 아저씨처럼 보이기는 싫다는 나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못한다.

셋째, 너무 쓰지는 말 것. 찡그려질 정도로 쓴 술은 오늘 하루 재밌자고 모인 자리와 어쩐지 결이 맞지 않는다. 그래서 연태고량주를 좀 많이 넣은 옌칭이나 진을 좀 많이 넣은 진토닉 정도가 어울린다. (연하게 타면 화장실을 자주 가게 되는 불상사가 일어나니 평소보다는 좀 세게 타야 한다.)


옌칭과 페스티벌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친구들 덕분에 처음 시도해보게 된 것들이라는 것. 언젠가 친구 D가 우리에게 옌칭이라는 신문물을 배워왔다며 알려줬고, 한 모금을 마심과 동시에 눈이 동그래졌다. ‘고량주라는 건 엄청 쓰고 센 술인 줄 알았는데, 맥주와 섞어 마시면 이렇게 맛있다고?!’ 하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페스티벌도 똑같은데, 사람 많은 곳은 기본적으로 싫어하는 나였기에 처음에는 페스티벌이라 하면 막연히 내가 100% 싫어할 줄 알았다. 하지만 친구 H가 가보자고 하길래, 호기심에 따라갔다가 페스티벌만의 분위기에 처음 눈을 뜨게 되었고, 그 이후로 우리는 매년 가고 있다.


뭐, 물론 친구들과 함께하는 새로운 경험이 항상 성공하는 건 아니다. 3년 전에 친구 D의 제안으로 당시 우리가 반해있던 밴드의 콘서트를 보기 위해 우리는 일본 도쿄로 여행을 갔다. 그런데 떼창 하는 한국 문화와 달리 일본 관중은 정말 조용하게 공연을 봤고, 우리는 가슴을 치며 소리 없는 아우성만 외쳐야 했다. 아니 밴드 콘서트에서 손뼉만 치는 게 말이 되냐고. 콘서트장에서 서로의 황망한 표정이 생각난다. 콘서트가 끝나고 크게 실망한 우리는 계속 얘네는 흥이 없냐고, 어떻게 거기서 소리를 아무도 안 지르냐고 욕했다. 우리의 기대를 충족시키진 못했지만 우리는 지금도 종종 그때 이야기를 하며 깔깔 웃는다. 막무가내로 콘서트를 보겠다고 도쿄까지 간 우리도 웃기고, 조용했던 일본 관중을 보곤 어이없어하는 우리도 웃기고, 잔뜩 뿔이 나서 욕하던 우리도 웃겨서 떠올리면 웃음이 실실 나오는 경험이다.


인간관계를 들여다보면, 유독 이렇게 새로운 걸 같이 하게 되는 친구들이 있다. 서로의 제안에 잘 넘어가 주는 건 ‘이 사람들과는 뭘 하든 다 좋다. 재밌어도 좋고, 재미없어도 좋다.’라는 믿음이 있어서 그렇다. 때로는 내 취향이 아닌 것 같은 경험이 제안되는데, 그 경험이 나랑 잘 맞을지 안 맞을지 판단하기보다는 그냥 그 친구들이랑 같이 노는 시간이 좋아서 응하게 된다.


나와 새로운 술을 마시고, 새로운 장소에 가는 친구들에 대해 생각하며 어쩐지 벨 훅스의 책 <올 어바웃 러브>가 떠올랐다. 그 책에서는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의 영적 성장을 위해 자아를 확장하고자 하는 의지”라는 사랑의 정의가 언급된다. (몇 년 전 책을 읽다가 끄덕였던 문장이라, 언젠가 꼭 써먹고 싶었는데 이번에 써먹게 됐다. 아싸!) 우리가 서로의 “영적 성장”을 위해 옌칭을 말아먹고, 페스티벌에 처음 간 건 아니지만… 어쨌든 우리는 자신과 서로를 위해 기꺼이 새로움을 받아들이는 사이니까, 우리가 하는 이것도 사랑이다. 그래, 사랑이 뭐 별건가. 로맨틱한 사랑만 사랑인 건 아니니까.


“우리 글램핑 가볼래?”

얼마 전, 친구 D가 제안했다. 조만간 카라반 앞에서 이것저것 구워 먹고는 배를 퉁퉁 치고 있을 우리의 모습이 그려진다.




매거진의 이전글 노동자의 하이파이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