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잼인 May 01. 2021

노동자의 하이파이브

소주

퇴근 5분 전, 친한 동료들끼리의 단체 카톡방 메시지 알림창이 슬그머니 올라온다.

“6시 땡 하면 퇴근. 알죠?”

그러면 “ㅇㅇ”, “넹. 금방 따라 나갈게요~” 등의 답장이 이어진다. 잔업을 남기지 않으려고 온종일 미친 듯이 일하다가 이런 카톡을 보면 입가에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술꾼에게 술자리를 앞둔 그 순간만큼 설레는 시간이 있을까? 6시가 되면, 컴퓨터를 후다닥 끄고 외투를 허겁지겁 입고는 도망치듯 퇴근한다. 영화<나의 결혼원정기>의 정재영 배우가 싱글벙글 웃으며 달려가는 짤(일명 “택배 왔다 짤”)처럼 동료들과 술집으로 향하는 그 순간부터 엔도르핀이 마구 돌기 시작한다. 술 마시러 간다!


“소주? 맥주? 뭐로 마실래요?”

라고 묻는 동료에게 나는 단호하게 소주라고 답한다. 맥주도 사랑하지만, 고단하게 일한 날에는 아무래도 소주가 제격이다. 단맛과 쓴맛이 엎치락뒤치락하지만 대체로 쓴맛이 강한 소주야말로 쓰디쓴 노동이라는 행위에 딱 맞는 술이다.


어떤 사람은 특정 브랜드의 소주만 고집하는데, 나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편이다. 소주라고 불리는, 초록 병에 담긴 투명하고 쓴 술이면 다 즐거운 마음으로 마시는데, 그 말은 즉 슨 소주의 섬세한 맛은 음미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맛이 아니라면 뭐 때문에 나는 망설임 없이 소주를 주문하는 걸까. 우선, 소주잔끼리 부딪칠 때 나는 청명한 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술자리를 시작하는 건배, 대화 흐름이 끊긴 것 같은 순간에 하는 건배, 누군가를 위로한 후에 힘내자며 하는 건배 등 수많은 순간에 들리는 그 소리. 물론 맥주로도 건배를 할 수 있지만, 맥주잔의 둔탁한 건배 소리는 크리스털로 만든 종이 울려 퍼지는 것만 같은 소주잔의 건배 소리를 절대 따라올 수 없다.


각자 소주잔 아랫부분을 잡고 짠하면 정말 크리스털 종소리가 나는데, 가끔 이 소리가 엄청나게 듣고 싶은 날이 있다. 사무실 전화에 불이 나는 날이면 집에 가는 길에도 귓가에 전화벨 소리가 들리곤 하는데, 그럴 때 소주잔이 내는 아름다운 소리를 들으면 귀가 정화될 것만 같다. 조상님들은 음복에 청주를 귀밝이술로 마셨다면, 나는 소주를 귀씻기술로 마시고 싶어 한다.


그리고 소주를 마시며 서로의 잔을 갖다 대는 행위가 좋다. 동료들과의 건배는 결코 단순한 행위가 아니다. ‘먹고 살기 쉽지 않지… 야, 오늘 하루도 우리 고생했다’라는 메시지를 주고받는 정겨운 행위와도 같다. 스포츠 경기를 뛰고 있는 선수들끼리 서로를 응원하는 의미로 하이파이브를 한다면, 노동자는 그 대신 소주잔을 부딪치는 것 아닐까? 누군가 “짠~”하며 소주잔을 가운데로 들이밀면 하나둘씩 각자의 잔을 갖다 대는 모습은 스포츠 선수들이 손을 모아 “아자! 아자!”라고 외치며 하이파이브를 하는 장면을 보는 듯하다.


술자리에서는 세상 친하고, 서로를 끔찍이 아껴주는 동료 관계인 것 같지만, 사실 사무실에서는 각자 일하기 바빠 우리가 같은 배를 타고 있는 동료라는 걸 인지하지 못할 때가 많다. 당신의 업무가 내게 넘어올까 봐 선을 긋기도 하고, 업무적인 문제에 대해 나의 책임은 없노라고 자기 방어하기 바쁘다. 회색빛의 삭막하고 긴장감이 흐르는 사무실. 하지만 술자리에서는 그런 긴장감을 내려놓고 서로를 보게 되고, 그때마다 그들도 나와 같은 사람이었고, 우리는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라는 걸 새삼 느끼게 된다. 이런 이유로 건배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나는 건배를 자주 주도하게 되고, 그때마다 빨리 취하곤 한다.



처음부터 소주의 정겨운 매력을 알았던 건 아니다.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약 2년간은 내게 소주는 그저 ‘눈물 젖은 술’이었다. 그렇다. 소주를 마시고는 세상 서럽게 울곤 했다. 술자리에서 우는 거야말로 진상인데, 그게 바로 나였다. 나와 같이 소주잔을 기울이던 선임들은 집에 가서 가족들에게 분명 “우리 신입 있지? 걔 또 울었어. 지겹다, 지겨워.” 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때 나는 제법 심각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는데, 오랫동안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우울감은 술을 마시면 증폭되었고, 그럴 때마다 나는 자신을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으로 여기곤 했다. 선임들은 그런 나에게 “그래도 어쩌겠니. 버텨야지.”라고 위로해줬다. 이제는 ‘버티자’는 말이 선임으로서 후임에게 ‘우리 계속 같이 일해보자. 이 고비를 잘 넘겨보자.’라는 따뜻한 마음을 전하고 싶을 때 하는 말이란 걸 알지만, 그때는 그 말이 ‘해결책은 없고, 이 고통에 네가 무뎌지는 수밖에 없어.’라고 들렸다. 그 말이 또 아파서 털어내 버리려고 또 소주를 들이켰고, 참 썼다.


다행히 해결책은 있었다. 나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심리상담센터와 정신과 치료를 병행했고, 직장에서 구조적인 변화가 생기면서 상태가 많이 좋아졌다. 여전히 직장생활은 크고 작은 고통의 연속이지만, 나를 한참 괴롭혔던 거대한 고통은 사라졌다. 나를 짓누르던 커다란 혹을 떼어낸 후에는 술자리에서 동료들과 나누는 즐거움이 뭔지 조금씩 알게 되었다. 동료들과의 술자리에서 더는 나의 우울에 압도되지 않기 시작하며 그들과의 대화, 함께 나누는 감정, 웃음에 재미가 들렸다. 극내향인이라 모임을 주도하는 걸 어려워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동료들에게 “오늘 한 잔 하쉴?”라고 메시지를 보내며 번개 모집을 자주하고 있었다. 한숨 섞인 푸념으로 술자리가 시작되어도 서로의 소주잔을 부딪치다 보면, 끝은 항상 시끌벅적하게 웃으면서 끝나는 게 좋다. 힘들어서 마시던 소주는 쓰고 아팠지만, 재밌어서 마시는 소주는 쓰지만 맛있다.


그래서일까? 내 입에는 동료들과 마시는 소주가 제일 맛있다. 가끔 집에서 가족들과 마시거나 친구들과 마실 때도 있지만, 이상하게 얼마 마시지 못하고 금방 멈추게 된다. 이 기묘한 현상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해봤는데, 아무래도 가족이나 친구들과는 노동의 쓰디쓴 맛을 나누는 데에 어느 정도 한계가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일을 함께 하는 동료들이 아닌 이들에게는 “그 내가 하던 A프로젝트 있잖아. 어? 기억 안 난다고? 그 왜 있잖아… 외부랑 협업하다가 틀어졌다던 그거. 어, 근데 알고 봤더니 또 이런 문제가 있던 거야. 무슨 문제였냐면…” 라고 하나씩 설명하다가 지쳐버리기 일쑤다. 상대가 내 설명을 이해했는지를 신경 쓰다가 그만 공감받고 싶던 감정이 짜게 식어버리는 일도 허다하다. 하지만 동료와는 이럴 일이 없다. 직장생활의 A부터 Z까지 설명하지 않아도 서로의 사정을 알고 있는 동료야말로, 최고의 소주 메이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지나간 술도 다시 보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