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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잼인 Apr 17. 2021

지나간 술도 다시 보자

마티니

인터넷에 마티니를 검색해보면, ‘남자의 술’이라는 수식어가 줄곧 붙는다. 아무래도 영화 <007 시리즈>의 제임스 본드 때문인 걸까? (영화 주인공인 제임스 본드는 매번 “보드카 마티니, 젓지 말고 흔들어서”라며 마티니를 주문한다.) 하지만 내게는 영화 <캐롤>에서 캐롤이 능숙하게 마티니를 시키던 장면이 떠오른다. 그 장면을 보며 마티니의 맛보다는 ‘능숙하게’ 마티니를 주문하고, ‘표정의 변화 없이’ 마티니를 조금씩 홀짝이고, ‘우아하게’ 올리브를 베어 무는 것에 반했다. 그래서 언젠가 바에 가면, 반드시 마티니를 시키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나의 첫 마티니는 대실패하고 말았다. 어느 겨울(영화 <캐롤>의 계절적 배경도 겨울이었다), 친구와 나는 안양일번가의 캐주얼한 펍에서 만났다. 맥주도 팔고, 칵테일도 팔고, 아무튼 이것저것 파는 곳이었는데, 마침 메뉴판에서 마티니가 눈에 띄었다. 마티니가 무슨 맛인지도 모르면서 캐롤을 따라 하며 능숙한 척 주문했다.

“저는 마티니요.”


  이윽고 올리브가 무심하게 꽂힌 마티니가 나왔다. 첫 입을 마시고는 인상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아, 실패다. 캐롤은 표정의 변화 없이 마셨는데, 나는 이미 망해버렸다. 하지만 허세를 부리고 싶어서 금새 표정 관리하며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음… 어른의 맛이네. 담백하네.”

하지만 속으로는 다시는 마티니를 시키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짭조름하고 향긋한 올리브를 먹으면 쓴맛이 좀 나아질까 하고, 쥐가 갉아 먹는 것마냥 앞니로 올리브를 찔끔 베어 먹었다. ‘이상하다, 캐롤은 분명 올리브도 우아하게 먹었는데… 지금 나는 왜 이렇게 멋없지’ 싶었지만, 그렇게 먹을 수밖에 없었다. 분명 마티니와 올리브가 잘 어울려서 같이 먹는 걸 텐데, 나는 마치 한약을 마시고 초콜릿을 허겁지겁 먹듯 마티니를 한 입 마시고, 입을 정화하고자 올리브를 먹고 있었다. 아, 캐롤이 되긴 글렀다.


  마티니의 쓰디쓴 맛에 된통 당한 나는 오랫동안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전주의 어느 작은 바에서 바텐더의 권유로 마티니에 다시 도전해봤다. 메뉴판 없이 내가 좋아하는 맛이나 향을 말하면, 바텐더가 칵테일을 추천해주는 식으로 주문하는 곳이었다. 내가 대체로 과일 맛은 피하고, 단 것은 안 좋아하고, 모름지기 술에서는 술맛이 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란 걸 파악한 바텐더가 마티니를 추천했다.

“마티니 좋아하실 것 같은데요?”

“마티니요? 으… 예전에 먹어봤다가 써서 죽는 줄 알았어요.”

“이럴 수가…(그녀는 정말 충격받은 표정이었다.) 마티니가 얼마나 맛있는 술인데요! 분명 안 좋은 진을 썼을 거예요. 제가 한 번 만들어드릴게요.”

바텐더가 입맛을 다시면서 마티니를 강력하게 추천하길래, 홀린 듯이 그렇게 해달라고 했다. 공들여 만든 마티니가 나왔고, 처음 홀짝이고는 눈이 동그래졌다. 혀를 강타하는 쓴맛이 전혀 없고, 약간의 풀 향이 나는 깔끔한 맛이었다. 마티니는 쓰기만 하다고 믿던 나의 편견이 깨지는 황홀한 순간이었다.


  실패의 경험 때문에 꽤 오랫동안 싫어한다고 여겨왔던 것들이 있다. 달리기가 그랬다. 학생 시절 내내 나는 만년 꼴찌였기 때문에 달리기라면 질색하던 사람이었다. 이십년 넘게 달릴 생각은 전혀 안 하다가 유튜브에서 어떤 여성이 매일 달리는 모습을 기록한 영상을 보게 됐다. 처음엔 세상의 모든 짐을 발목에 매달아 놓은 것처럼 무거운 발걸음으로 뛰던 그녀가 시간이 지날수록 가볍게 뛰었다. 달리는 표정도 훨씬 밝아졌고, 뭐랄까 일종의 해방감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달리기로 해방감을 느낄 수 있다니, 달리기는 언제나 내게 ‘꼴찌’라는 낙인을 달게 하던 괴로운 운동이었는데. ‘나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 한번 시험 삼아 달려보기나 할까?’라는 호기심으로 달리기 어플의 도움을 받아 달렸다.


  너무 숨이 차서 힘들었지만, 그래도 그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바람을 가르는 느낌, 신발이 바닥을 탁! 탁! 치는 소리,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이 생경했다. 그 감각에 매료되어 꾸준히 달리기를 연습했고, 마라톤에도 나가서 완주했다. 그러니까 안양에서 마셨던 마티니가 학창 시절의 달리기이고, 나에게 마티니를 권유해줬던 전주의 바텐더는 유튜브 영상 속 그녀이고, 전주에서 마신 마티니는 이십대 후반의 달리기라고 비유해도 될 듯하다.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고, 나는 하지 못한다고 선을 그어놓았지만, 타이밍이 안 맞았던 걸뿐, 어쩌면 나와 잘 맞을지도 모른다.


  전주에서 마티니를 맛본 후에 꾸준히 마티니를 마셔오고 있다. 캐롤처럼 우아하게 마티니를 마시지는 못하고, 여전히 올리브를 쥐처럼 갈갈 갉아 먹지만 어쨌든 마티니를 좋아한다. 아니, 생각해보면 마티니는 애초에 우아하게 마실 수가 없는 술이다. 올리브를 한입에 먹어치우기엔 너무 짜고, 다 먹은 올리브의 씨를 뱉는 행위도 멋있을 수가 없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캐롤은 엘레강스 스타일로 마신다면, 나는 마우스(Mouse) 스타일로 마시는 것뿐이다. 이제는 누가 좋아하는 칵테일이 뭐냐고 물어보면 마티니라고 대답할 수 있을 정도인걸.


  내가 외면해온 술이 가장 좋아하는 술이 되어버렸을 때의 쾌감을 아는 사람은 뭘 해도 될 사람이라고 믿는다. 내가 그어놓은 선을 발로 쓱쓱 지울 줄 아는 사람인 거지. 선을 지울 용기와 호기심을 가진 사람인 걸 술에 대한 재도전을 통해 증명해낸 사람이다(그냥 더 많은 술을 마셔보려는 술쟁이의 합리화같이 느껴진다면, 기분 탓이다). 나는 어떤 술을 지나쳐왔는가 굳이 돌이켜볼 필요는 없다. 다만, 살다가 어떤 술을 마주했는데 지난날의 기억 때문에 거부감이 든다면, 한 번쯤은 다시 시도해보는 게 좋다. 그렇게 맛본 술이 내 인생 술이 될지 말지 알 수 없지만, 이럴 때 딱 맞는 명언이 있다.

“할까 말까 할 때는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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