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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잼인 Apr 03. 2021

테킬라 선라이즈

테킬라

이태원 어느 바에서 두 여자가 높은 의자에 어정쩡하게 앉아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한 여자는 격앙된 표정으로 무언가 하소연하고 있고, 다른 여자는 애잔하다는 표정으로 동조하고 있있다. 그때 서버가 그녀들이 주문한 피자와 두 번째 테킬라를 갖다줬는데, 두 여자의 표정이 좋지 않다. 냉동 피자를 막 해동한 것만 같은 피자에 실망했나보다. 그래도 빈속을 일단 채워야 하니까 우적우적 피자를 한입 먹고는, 두 번째 테킬라 잔을 들이킨다. 취기가 오른 두 여자는 제스처가 커지고, 웃음이 많아졌다. 테킬라를 주문하는 속도가 더 빨라졌고, 대여섯 잔 먹었을 때쯤, 그녀들은 사라졌다.



미국 영화에서 ‘걸스 나이트 아웃(Girls Night Out, 여자들끼리 놀러 나가는 날)’ 장면이 나올 때면, 빠짐없이 등장하는 술이 있다. 바로 테킬라! 작은 잔에 담긴 테킬라를 친구들끼리 짠 하고 원샷을 때리고, 광란의 파티를 즐긴다. 내게 테킬라는 ‘세상만사를 다 잊게 해주는 술’로 인식되어 있었고, 그래서인지 세상만사를 다 잊고 싶었던 날 들이붓게 됐다.


그날은 충격적이고 절망적인 인사발령을 잊고 싶었다. 오후 5시 59분에 인사발령 공지가 떴고, 떨리는 손으로 누가 이쪽으로 오는지 확인했다.

“미친”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험한 말이 나왔다. 보고 싶지 않은 이름을 보자 눈앞이 캄캄해지고,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대책을 세울 정신은 없고, 지금 이 분노를 당장 잠재우고 싶었다. 그럴 때 필요한 건 뭐? 술. 술이 필요해서 퇴근길에 친구에게 SOS를 쳤다.

“먹고 죽자!!!”


사람이 넘쳐나는 이태원역 2번 출구 앞에서 친구와 만나 근처 저렴한 술집에 들어갔다. 안주로는 무난해 보이는 피자를 시키기로 했는데, 술을 못 고르고 있었다. 그때 메뉴판에서 ‘테킬라’가 눈에 들어왔고, 영화에서 그녀들이 테킬라를 마시던 장면을 떠올렸다.

“테킬라 마셔볼래? 그 왜, 외국 영화에서 마시는 거 있잖아, 소금이랑 레몬이랑 곁들이는 거.”

술에 대한 호기심과 도전의식이 높은 친구도 오케이를 외쳤다. 주문한 피자와 테킬라가 나오기 전까지 나는 어떻게 그가 여기로 올 수 있느냐며 분노를 토해냈다. 말을 속사포처럼 쏟아내다가도 허공을 보고 “말도 안 돼”를 자꾸 되뇌었다. 그러다가 피자와 테킬라가 나왔는데, 우리는 잠시 허접한 피자의 행색에 실망했다. 얇은 반죽의 피자인데, 누가 봐도 코스트코에서 파는 냉동 피자를 간신히 데워온 것 같은 비주얼이었다. 하지만 피자는 중요하지 않았다. 속을 버리지 않기 위해 먹는 음식에 불과하니까. 피자는 질겅질겅 대충 씹어 넘기고는 오늘의 술, 테킬라를 원샷했다. ‘그래, 이 맛이지. 테킬라를 샷으로 연거푸 마시던 영화 속 그녀들처럼 우리도 그렇게 마시면 인사발령쯤은 잠깐 잊을 거야’라고 생각하며…


사대주의에 세뇌된 우리는 정말 영화 속 그녀들처럼 “연거푸” 테킬라를 시켰다. 한 잔, 두 잔… 다섯 잔, 여섯 잔… 잔뜩 취해서 무슨 대화를 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세상만사를 다 잊기 위해 마셨던 테킬라가 제 역할을 너무 잘해버렸다. 혀가 꼬이기 시작했고, 눈이 풀렸고, 속이 메스꺼워져 화장실로 다급하게 뛰어가던 것만 생각난다. 그 와중에 멀쩡한 척한다고 똑바로 걸으려고 애쓴 것까지도 기억난다. 화장실을 다녀와서는 친구와 나는 서로 말도 없이 각자 헤어졌다. 정신 차려보니 택시를 타고 집에 가고 있었다.


다음날 나는 어마어마한 숙취에 시달렸다. 나중에 알게 된 건데, 테킬라가 워낙 숙취가 심한 술이라서 그 숙취를 일컫는 용어(테킬라 선라이즈)가 따로 있을 정도이다. 엄청난 구토와 두통이 내 분노의 대가라니, 더 짜증이 났다. 단순히 그 사람을 향한 분노만 있던 건 아니었으며,  때문에 또 벌벌 떨고 있는 나에 대한 한심함이 분노로 돌변했다.  사람으로 인해 힘든 시간을 보낸 후에는 다행히 좋은 동료들을 만났고, 해보고 싶었던 업무도 하고 있어서 더이상 출근길에 차에 치이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던 때였다. 잘 지내고 있는 스스로를 보면서 강해지고 있구나 싶었는데, 이렇게 또 순식간에 무너지려 하는 나를 보곤 실망했다. ‘나는 어쩔 수 없는 사람인가?’ 하는 자조 섞인 분노가 그에 대한 분노를 만나 나를 폭주기관차처럼 만들어버린 밤이었다.


주말 내내 술병을 앓으면서 분노의 감정은 사그라지고, 자포자기 상태가 되어갔다. 침대와 화장실을 번갈아가면서 진이 다 빠져버린 나는 ‘만약 또 그 일하게 된다면 한두 달 참아보다가 그만두자. 그래, 이 핑계로 그만두자. 원래 그만두고 싶었잖아.’라는 시시한 결론을 내렸다. 결과적으로는, 다행히 직접 일적으로 겹칠 일은 없었고, 그래서 못(안) 그만두고 계속 다녔다.


아직도 테킬라를 보면 그날의 분노와 숙취가 떠올라서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테킬라 맛을 보는 순간 이태원 2번 출구 앞의 그 술집과 형편없는 피자, 그리고 테킬라가 떠오를 것만 같아서다. 종류가 참 다양해서 궁금했던 주종이었는데, 그렇게 나는 테킬라를 탐색해볼 의지를 영영 가질 수 없게 되어버렸다. 한편으로는 내가 그날 마신 게 소주가 아니라 다행이다. 평소에 자주 마시는 소주를 마셨더라면, 소주만 보면 그날이 떠올라서 소주를 멀리하게 됐을 테니까. 오늘의 교훈, 화가 나서 술을 마실 때는 평소에 안 마시는 술로 달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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