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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잼인 Feb 19. 2023

스타우트의 계절이 지나가고 있다

지쳐있고 불안한 사람의 술

앞선 글에서 새콤한 맛의 사워비어를 가장 좋아한다고 했지만, 겨울에는 즐겨 마시지 않는다. 사워비어를 마시면 신맛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 느낌인데, 추운 날씨에 마셨다가는 더 추워지는 듯한 느낌이 든달까. 대신, 농축된 느낌과 진한 맛 때문에 무게감이 느껴지는 '임페리얼 스타우트(이하 임스)'를 선호한다. 대체로 도수가 높은데, 커피나 초콜릿 맛이 같이 느껴지기 때문에 높은 도수가 커버되는 편이다.


2022년 겨울~현재까지 유난히 이 종류의 맥주를 많이 마셨다. 원래도 좋아했지만, 자주 가는 가게의 직원 분으로부터 '밝은 밤'이라는 맥주를 추천받아 마셨는데, 정말 맛있었다. 라즈베리 잼을 겹겹이 바른 꾸덕한 초콜릿 케이크를 마시는 듯한 맛이었는데, 그 이후로 임스의 매력에 다시 눈을 뜨고는 매번 새로 들어오는 스타우트 종류는 다 먹어보고 있다.


고백하자면, 새로운 맥주를 탐험하는 재미 때문에 마셨다기보다는 맛있게, 빠르게 취하기 좋은 술이었기 때문에 마셨다. 어차피 술을 마실 거라면, 조금만 마셔도 금세 취기가 오르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한 명인데, 위스키, 고량주, 보드카 등 고도수의 다른 술은 써서 꿀떡꿀떡 마시기는 어렵다. 이 임스는 한 모금 마시면 초콜릿 케이크를 맛보는 듯하면서도 목구멍이 조금 뜨거워지는 걸 동시에 느낄 수 있으니, 딱 필요했던 술이다.


술을 마시며 긴장은 풀고 싶은데, 누군가와 약속 잡기가 버거울 때마다 임스를 찾았다. 상대에게 하소연을 할까 봐, 그래서 상대에게 부정적인 영향이 갈까 봐 선뜻 약속을 잡기 어려웠다. 친구가 먼저 약속을 추진하면 나가서 또 즐겁게 놀고 오면서 내가 먼저 약속을 잡는 건 그렇게 어렵더라. 그렇게 성사된 만남이 혹시나 축축 쳐지면 어떡하지 하는 과한 책임감 때문이었고, 그 책임감의 기저에는 불안이 깔려있었다는 걸 안다.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는 성향의 나는 이 불안이 원래도 높은 사람이다. 나를 갉아먹을 때도 있지만, 때로는 동력이 되어 더 열심히 살게 하기도 한다. 다만, 이번 겨울은 '나를 갉아먹는 불안'이 조금 더 높았다. '이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이렇게 살다가는 아무것도 안 될 것 같다' 등 가지각색의 형태가 없는 불안이 겨울 내내 쿡쿡 찔러댔고, 더 쉽게 지쳤다. 예전엔 3분을 쉬지 않고 달릴 수 있었다면, 이제는 1분만 달려도 헥헥대며 숨 고르는 시간을 1분을 가져야 하는 사람이 된 듯했다. 지친 상태로 움츠러들어있던 겨울, 스타우트로 나를 달랬다.


새해가 시작되면서 이제는 정말 이 겨울과 불안을 잘 떠나보내기 위해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아무것도 안 하면 안 될 것 같은 불안함이 들었다. 복싱을 시작하고, 여행을 가기로 했다. 아직 물주먹이지만, 스텝을 밟으며 의미 없는 불안함에 스트레스 받을 새가 없도록 몸을 움직인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서는 가보고 싶은 맛집과 바를 지도에 표시하며 기대감에 차있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번에 날 움직인 것도 불안함이었다. '동력으로서의 불안함'으로 조금씩 겨울과 불안을 떠나보내고 있다.


날이 따뜻해지면, 임스를 잠시 내려놓고 다시 사워비어를 주로 마셔야지. 함께해서 즐거웠고, 다음 겨울엔 좀 더 즐거운 마음으로 마실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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