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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호 Nov 13. 2019

교육이란 무엇인가?

<학생부 종합형 교과서> 저자의 교육에 대한, 의한 고민의 첫 발자국

 교육한다. 혹은 교육학한다. 그것은 나에게 일상이었다. 덕분에 내 걸어온 길(혹자는 스펙이라고 부르는)은 모두 "교육"이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 결국 나를 소개할 때, 교육이라는 단어 없이는 나를 제대로 소개할 수 없는 지경에 놓여있다.


하지만 그런 내가 "교육한다" 혹은 "교육학한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시작이 언제였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늦게나마(?) 중학교 2학년부터 공부를 시작했던 나는 교사에 대한 작은 존경을 가져왔고, 그것이 고등학교에서는 학교교육/교육제도에 대한 분노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분노에 대한 고민, 실천은 나를 교육학과로 입학하게 하였다.


 그 이후, 나는 사단법인 Teach For Korea, 삼성 드림클래스 등을 통해서 소외계층 학생들의 영어 교과 학습을 지도하기도 하였다. 물론, 과외도 병행하여 내 씀씀이에 보탬하기도 했고, 특히 관심을 가졌던 대입제도에 대한 활동으로 유스쿨이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하였다. 아주 멋지고, 능력있고, 선한 대학생들과 함께 3년 동안 100명이 넘는 학생들을 멘토링하고 <학생부 종합형 교과서>라는 책을 집필하기도 하였다. 내가 입시 분야에서 어느정도 급이 되는지는 확실하게 평가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책을 쓰고 고액의 컨설팅이 가능한 정도라면 무시할 만한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된다.


 자랑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나에게 교육이라는 것이 얼마나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여타의 활동을 거치면서 내 마음 속에는 교육에 대한 모종의 확신이 생겼다. 즉, "교육은 ~~해야된다"라는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어떤 문제라도 교육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는 믿음 또한 생기기 시작했다. 특히 교육학을 공부하고 있는 학도로서, 내 생각을 몸소 실천하고 있다는 차원에서 나름의 뿌듯함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이 매우 짧은 시간에 뒤집히게 되었다.


 그 계기는 너무 웃프게도, "시험준비"었다. 본교 교육학과에서 개설되는 교육사회학 강좌는 이전에도 선배, 동기, 후배 모두에게 "저학년에게 매우 어려운 과목"으로 낙인되어 있었고, 나는 그 강좌가 열리는 매주 목요일에 고정된 일정이 있어서 2년간 미뤄오다가 이번년도에 수강하게 되었다. 어렵다고 평이 난 강의였으나, 다음과 같은 이유료 이 과목의 시험에 대한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1. 나는 교육에 관한 나름의 실전 경력이 많다.

2. 다른 교육학 과목에서 높은 성적을 유지했었다.

3. 시험문제를 미리 공개하시고, 그 중에서 2개를 선택하는 시험이다.

4. 나는 이 과목을 제외하고, 다른 시험은 다 3일 전에 종료된다.

5. 실제로 강의 내용을 들어봤을 때, 그것이 이해가 되었다.

6. 논리적인 글쓰기, 말하기, 읽기를 선호한다.

6. 적어도 "저학년"은 아니지 않느냐..


 상당히 합리적인 판단으로 높은 학점을 기대하며 수강을 신청하였고, 열심히 8주간 수업을 듣고 예상문제를 받아보았다. 당연지사, 예상문제를 받자마자 한 것은 "출제자의 의도" 파악이었다. 7개의 문제가 공개되지마자, 문제를 하나씩 분석하였다. 하지만 문제를 분석하면서, 나는 흠칫 놀라게 되었다.


1. 공부의 의미(왜, 어떻게, 어떤 결과를 낳는가?)
2. 공부와 교육의 관계 (어떤 행위, 양상/의의)
3. '성년식'으로서의 교육 (이론, 사회통념)

4. 2015 개정 교육과정의 교육관 (역량, 교육관)

5. 학교라는 장치 (역사, 보편성, 학교제도)
6. 최초의 학교
7. 교육학의 학문적 지위


 보통 대학 학부 수준의 강의 (특히 개론 수준)는 상당히 넓은 범위를 가지고 수업을 하기 때문에, 그 각각의 문제가 서로 다른 개념이나 대상을 향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특히, 이 수업 또한 교수님이 많은 내용을 전달식으로 강의하고 계셨기에 당연지사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해당 문제를 분석해보니 모든 문제가 공통적으로 하나의 질문에 대한 고민, 통찰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인간에게 교육이란 무엇인가?"


 질문 자체로 봐서는 참. 답변하기 쉬워보인다. 나 또한 실제로 문제를 분석하고 나서는 오히려 더 답변하기 쉽겠다고 생각했다. 하나의 답만 명확해지면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는지만 잘 생각하면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에 답변하기 위해, 8주간의 강의 노트를 정리하면서 이 질문이 가지고 있는 무게에 숨이 막혔다.


 도저히, 교육이 무엇인지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이를 답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변해야 했었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가?"

"다르다면 어떤 부분에서 다른가?"

"다르다면, 왜 달라지게 되었는가?"

"그것이 역사 속에서 하나의 인간의 우연적 변화인가?"


이에 대해서 답변하려고 하면, 또 다음과 같은 질문이 따라왔다.


"인간은 어떻게 공부하게 되었는가?"

"인간은 왜 공부하는가? 혹은 왜 공부해야 하는가?"

"인간이 공부하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인간은 당장 필요없지만, 앞으로 필요있는 것을 추구해야 하는가?"


그리고 이에 답변하려고 하면, 또 다음과 같은 질문이 따라왔다.


"공부는 강제되어야 하는가?"

"공부를 강제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공부를 강제하는 것은 교육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교육과 공부는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가? 왜 맺어야 하는가?"

... 등등..  


 숨이 턱 막혔다. 나는 지금껏 교육하고 있다고 생각해왔지만, 그리고 심지어 어느정도 교육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지만 정작 내가 하고 있는 것이 교육인지 아닌지조차 고민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누구나 내가 하는 것을 교육이라고 인정해주고, 교육이라고 불러왔으니깐 그저 그냥 교육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해서 명쾌한 답은 만들지 못할 망정 질문에 질문이 꼬리가 물리니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래서 교수님이 준 모든 읽기 자료를 읽어보았다.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논문을 읽고, 함께 공부하는 선배와 논의하였다. 내가 가지고 있는 고민 혹은 질문에 대해서 학자들이 어떤 답을 내놓았는지를 점점 감을 잡게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풀리지 않는 의문들이 너무 많았다. 딱 하나 명확한 답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이리보면 이렇고 저리보면 저런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의문들을 정리해보니 이정도의 추론은 할 수 있었다.


1. 인간은 다른 동물과 똑같다.

2. 하지만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질문을 한다. (태생적 차이)

3. 질문은 답변될 수 있다. (혹은 인간이라면 답변하고자 한다.)

4. 결국 누군가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


4. 답변이 인간에게 공유될 수 있다.

5. 하지만 다른 인간에게는 그 답변 자체는 "보인"다.

6. 따라서, 인간은 태생적으로 답변에 대해 묻지 않는다. (보이니깐.)

7. 결국, 이전의 인간의 질답을 반복할 뿐이다.


8. 공부를 통해 그 답변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본 결과"임을 깨닫는다.(혹은 깨달아야 한다.)

9. 그것을 안다면, 또 다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으로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질문한다.

10. 그렇게 질문과 답변이 쌓여서 지식을 이룬다.

11. 지식은 결국 인간의 시작점을 다른 동물보다 높게 만든다.


 이 또한 상당한 급전개이며, 사실상의 각 문장별로 반박될 여지가 너무나도 충분하다. 하지만 내가 읽었던 자료들과 고민했던 것들의 공통적인 전개는 이러하다.  그리고 그렇게 고민하고 읽다보니 정작 주어진 문제에 답변하는 것은 뒷전이었다. 그래서 문제를 미리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답안지를 쓰지 않고 시험에 임하게 되었다. 시험이 끝났지만 쉴 수 없었다. 시험이 끝난 것과는 별개로 내 질문은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또 다시 관련된 자료를 찾기 시작했고, 여타의 질문에 대해서 답변하려고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질문이 생기기 시작했고 그것에 또 다시 답변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제는 한 문장 정도는 확실하게 답변할 수 있다.


"교육은 문명과 호모 사피엔스를 지속적으로 관계지으며 동물을 인간다운 삶의 형식으로 진입시켰다."


 그것을 어떻게, 왜 했는지는 정말 의문이다. 하지만, 하나 명확한 것은 그 결과만큼은 이러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와 같은 답변을 얻으면서 처음으로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내가 해야하는 것"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뭔가 나의 적성, 역량, 흥미 등을 고민하면서 내가 미래에 할 수 있는 것들을 골라내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좀 다르다. 당장, 이와 같은 고민에 대해서 (교육을 어떻게, 왜 했는지?) 답변하고,  그 다음에 파생될 질문(그렇다면 교육은 어떻게,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어서 답변해야 할 것만 같다.


인간이 "더 잘 살아보자"라는 목적으로 만들어내었던 공학/과학의 지식들이

인간의 노동력을 향상시키는 차원에서 벗어나, 인간의 노동을 불필요하게 만들고 있다.

어쩌다보니, 인간이 만들어 낸 것으로 인해 인간이 존재 이유를 잃는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나 또한 그런 상황에 대한 많은 걱정을 해왔고, 특히 교육에 종사하고자 하는 사람으로서, 데이터를 머리 속에 넣을 수 있는 시대가 오면 교육이 큰 의미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교육이 단순히 "정보 전달"만의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의 형식"을 뿌리내리게 하는 활동이었으므로 오히려 이와 같은 사회적 변화는 교육의 기회 혹은 높은 책임으로 이어진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것이 진짜 "교육학"한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 아닐까. 혹자 이런 고민을 토로하면, "대학원을 갈 것 같다."며 이야기한다. 실제로도 고민하고 있는 것이지만, 당장 내가 가지고 있는 질문은 꼭 내가 대학원을 가야지만 답할 수 있는 것도 아니거니와, 특정한 어떤 교육학 분과를 선택할 수도 없는 처지이다. 어떤 직종, 어떤 분야를 가든 이제 질문을 가지기 시작했으니 평생 안고 가야할 것이라고도 생각된다.


 그래서 오히려 나보다 먼저 이에 대해서 (교육의 본의미) 고민하셨던 선학의 질문과 답변을 찾아보는 것이 더 현명한 선택이 아닐까 싶어, "학문과 교육(상)"을 구매하였다. 앞으로 이 책을 읽고 한 파트씩 정리하는 차원에서 브런치를 운영하려고 한다. 기존에 내가 겪었던 혹은 행했던 "교육"이라고 불렀던 경험들을 되짚어보는 좋은 기회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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