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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gle Sep 15. 2023

전 여자친구를 마주쳤다

그게 무슨 감정인지 알게 되었다

 전 여자친구를 마주쳤다. 헤어진 후 몇 년 동안 우연히 마주치지도 않았다. 그렇게 죽고 못살아 매일 같이 만났었는데 헤어지고 나서는 한 번도 마주치지 않는다는 게 참 신기했다. 심지어 몇 년 동안은 같은 동네에 살았었다. 만날 때 오히려 너무 많이 봐서 그런 걸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기억이 희미해져 갔었다. 고향 친구들과 동네에서 술 한잔 하면서 "이제는 마주쳐도 아무렇지도 않을 것 같다. 만나면 반갑게 인사할 거다. 잘 봐라." 하면서 허세를 부리기도 했었다. 인사는 무슨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술을 자주 마신다는 것은 만날 때부터 익히 알았지만 역시나 새로 생긴 술집에서 마주쳤다. 익숙한 얼굴은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잘 보인다는 법칙을 오랜만에 경험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반가움이었다. 그 반가움에 분명 술을 마시는데 술이 하나도 안 취했다. 그냥 손에 쥐어지니 마셨다. 온 신경이 그 테이블로 집중되어 있었다. 그 애도 나를 봤을까.   


 그렇게 시간이 좀 지나고 그쪽이 테이블을 정리하고 나가려고 했다. 그냥 가서 오랜만이라고 인사만 하고 와야겠다 싶었다. 인사하러 갔을 때, 내가 있는 걸 인지하고 있었는지 "어떻게 인사를 할 생각을 했네?"라고 말했다. 그 한마디에 바로 몇 년 전으로 돌아갔다. 너무 오래 지나서 예상 못했었다. 수 없이 해왔던 장난 같은 말들 중 하나였다. 그렇게 몇 마디 대화를 하고 가려는데, 친구들도 다 같이 술 한잔 하자고 해서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 이쯤에서 이 글을 읽는 사람 중 내가 쓰레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해 버리면 할 말이 없지만, 만나는 사람도 없었고 소개팅과 같은 가벼운 관계에 허무함을 느끼던 시절이었다. 양해를 해주시면 감사드리겠다.


 다음날 마음이 싱숭생숭해졌고, 며칠 동안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분명 사랑은 아니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그 애와 헤어진 이후 만나오던 사람들과의 관계들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도 만났고 진심이 아닌 사람도 만났었다. 이별을 통보받기도 했으며, 이별을 고하기도 했었다. 가벼운 관계들도 있었고 허무함에 헛웃음이 나오는 순간들도 있었다. 그 애는 처음 사귄 여자친구였으며, 가장 오래 만났고 진심으로 사랑했었다. 서툴렀지만 성숙해져 갔었다. 지금까지 만났던 관계들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둘이 따로 보자고 연락했다. 이게 무슨 감정인지 알아야만 했었다. 이래도 되는 건가 고민이었지만 제대로 독대를 해봐야 알 것만 같았다. 만났을 땐, "아 이래서 이 아이를 사랑했었지" 하는 부분도 있었고, 시간이 많이 지났기 때문에 서로 많이 달라진 부분도 있었다. 대화를 할수록 그 애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내가 그렇게 만들 자신은 없었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헷갈리게 하지 않아야 이 친구가 더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감정이 무슨 감정인지 알게 되었다. 건강하게 잘 지내 인사하며 헤어졌다. 앞으로 만날 일은 없겠지만 진심으로 응원하겠다고 생각했다.   


 또 일 년 가까이 지났다. 어질러진 본가 내 방을 정리하면서 먼지 쌓인 추억 박스를 꺼냈다. 나는 추억 박스에 뭐든 넣어둔다. 그때는 차마 못 버린 편지들이 남아있었다. 사랑이 담긴 편지였다. 그렇다 그 친구와의 사랑은 좋은 추억으로 남았다. 그 추억들을 다 버리면서 그 친구를 진짜로 보내주게 되었고 보내주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야 누굴 만날 수 있게 되었다"라는 결말은 아니다. 원래도 누굴 만날 수 있었다. 관계란 한순간에 정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정리하는 관계도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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