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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gle Sep 13. 2023

몇 평 늘리는 게 이렇게 어렵다니

내가 살아온 주(住)에 대하여


 2020년 5월, 살면서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세종시에 위치한 어느 공기업 인턴에 합격했다. 그리고는 본가를 떠나 처음 자취를 시작했다. 고등학교 시절은 기숙사 학교를 다녀 본가를 떠나 있었으며, 군 복무를 하면서는 어쩔 수 없이 그랬다. 하지만, 이는 내가 내 손으로 누울 자리를 마련한 것이 아니었기에 완전한 독립이 아니었다.


 셔틀버스가 닿는 저렴한 오피스텔을 급하게 계약하고 인턴을 시작했다. 집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내 커리어가 이제 시작하는구나' 하는 기대감이 더 컸다. 혼자 산다는 막연한 설렘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월세가 주변보다 더 싼 곳을 고른 것은 내가 살아온 삶의 방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방식은 지독하게 잘 바뀌지도 않는다.


 처음에는 나를 짓누르는 적막을 견디기 힘들었다. 그래서 음악을 크게 틀지 않을 수 없었다. 집에 들어오면 공허하고 적막한 저녁이 남아있어서 일단 노래를 틀어 몸을 움직이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 습관이 아직도 배어있다. 재즈와 함께 내 퇴근 후의 삶은 시작된다. 재즈가 왜 좋은지는 다른 글에서 밝힐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것도 며칠, 적막을 뒤로하고 혼자 산다는 자유감이 금방 찾아왔다. 사실 우리 부모님은 꽤나 보수적이셔서 같이 살면서 힘들 때가 있었다. (참고로 나는 아버지, 어머니를 정말 사랑한다) 자유감은 때로는 일탈로, 때로는 내가 꾸려가는 삶을 만들어줬다.


 처음엔 요리도 하고 청소도 열심히 했다. 혼자 사는 로망을 펼쳤다. 사실 인턴이라는 것이 업무적으로 어려운 것이 아니었으므로 퇴근 이후의 삶이 있었다. 또한, 5평 남짓한 방이었지만 짐이 얼마 되지 않아 꽤나 넓었다고 느껴진다. 지난 몇 년을 돌이켜보면 살면서 왜 이리 살림이 늘어나는지 모르겠다. 그때는 무엇을 채워야 할지 고민했다면 지금은 무엇을 비워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



  현재 3년째 다니고 있는 직장에 합격하여 광명으로 이사했다. 정확히는 금천구청역에 있는 한 오피스텔로 이사했다. 역시 6평이 안 됐다. 그때도 급하게 구했다. 수요일에  합격 소식을 듣고 바로 다음 주 월요일에 입사했으니, 주말 동안 집을 몇 개 못 보고 계약했다. 급하게 구해서 월세일 수밖에 없기도 했다. 좀 더 볼 걸하면서도 정신이 하나도 없었고 그런 생각들은 금방 잊혀졌다. 그렇게 신입사원의 생활이 월세와 함께 시작됐다.


 서울의 월세는 가혹했다. 40만 원에 관리비까지 하면 50만 원을 족히 넘었다. 작은 집이었으며 8차선 도로 앞 엄청난 소음을 겪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 월세는 지금 생각해도 영 아니었다. 하지만 월세 계약은 1년이기 때문에 금방 적응했고 금방 지나갔다. 안 좋은 이야기만 한 것 같은데, 물론 좋은 추억들도 많았다. 자의로 또는 타의로 그 집에 와서 나라는 사회 초년생을 위로했던 사랑했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음 집을 고를 때는 가장 중요한 것이 소음이었다. 밤새 배달을 다니는 오토바이의 부릉거림은 일찍 출근해야 해서 일찍 자야 하는 나에게는 너무나 큰 고통이었다. 새벽에도 벌떡 일어났는데, 지금 생각해도 재밌는 게 내가 왜 깼는지 모른다. 소음은 벌써 지나갔기 때문에. 희미한 오토바이 소리에 다시 희미하게 잠들곤 했다.  


 그래서 정말 조용한 원룸 빌라로 골랐다. 기간을 오래 두고 골랐기 때문에 좋은 집을 고를 수 있었다. 시간만 있다면 부동산을 알아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신기하기도 하고 재밌기도 하다. 이성적으로 가격과 위치, 평수와 인프라 등을 철저히 따지지만, 막상 집을 보러 가면 갔을 때의 느낌과 감에 의존하기도 한다.  


 또한, 이때 전세를 처음 계약했는데, 그때는 이자도 굉장히 저렴했으므로 월에 나가는 고정비를 반의 반으로 줄일 수 있었다. 참고로 이 집은 지금 2년 가까이 살고 있는 집이다. 7평 남짓으로 넓지는 않지만 안락했다. 잠이 부족한 나에게는 아무도 모르게 잠들 수 있는 집이었다. 또, 나름 내가 꾸미고 싶은 만큼, 사고 싶은 게 있는 만큼 투자해서 지금의 집을 만들었다. 2년은 생각보다 길어서 지금 생각하면 많은 일들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공간에 추억이 남는다.


 하지만 두 번의 여름동안 고생을 좀 했다. 안락한 만큼 해가 안 들고 통풍이 안 되었다. 곰팡이와 습기를 잡기 위해 사투를 벌였다. 그들과의 싸움에서 졌을 때의 그 퀴퀴한 냄새는 나를 무기력한 패잔병으로 만들었다. 다음에는 반드시 남향에 통풍이 잘 되는 곳을 가리라 다짐했다. 숨통이 트이고 밝은 곳에서 살고 싶었다.  

  


 다가올 10월에 이사 갈 집을 얼마 전에 계약했다. 원래는 똑같이 오피스텔로 가려고 했었다. 지금 집보다 두세 배는 높은 보증금을 내면서 한두 평 더 넓힐 수 있는 신축 오피스텔로 가려고 했다. 한두 평만 넓어져도 넓다고 느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막상 집을 알아보러 갔을 때, 생각보다 답답했다. 다시 이렇게 원룸에 들어가는구나 생각이 들었다. 몇 평 늘리는 게 이렇게 어렵다니.


 그러던 와중 많이 내가 따르는 직장 선배와 오랜만에 술자리를 하게 되었는데, 구축 아파트를 선택지로 둬보는 것도 좋다고 조언을 주었다. 풀옵션이며 잠만 자는 오피스텔 보다 직접 살림도 꾸리고 사람 사는 곳 같은 아파트에서 살면 삶을 보는 시각이 달라질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살아왔던 집들은 부모님께서 살아오시면서 부모님의 손으로 일궈놓은 공간들이었다. 그게 비록 월세나 전세였더라 하더라도.


 어른이 된다는 것은 편한 옵션 속에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돈을 지불하더라도, 불편하더라도 내가 선택하는 것들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에 몇 주 동안 구축 아파트를 알아보고 지금 집을 선택했다. 살아가면서 필수요소가 의식주라고 했던가, 지금은 어느 하나도 제대로 된 것이 없다. 일단 "주"부터 바로 잡아봐야겠다. 그러면 "의"와 "식"은 따라오지 않겠는가. 내 손으로 일구는 내 삶은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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