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놀이는 생존이다

아무 쓸모 없는 것들을 사랑하는 법

by 골디오션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지만,
아무것도 결여되지 않은 것.
그것이 바로 놀이


<프롤로그: 종이 뭉치 하나의 우주>

새벽 세 시, 나는 글을 쓰다 말고 멈췄다. 책상 아래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몸을 숙여 들여다보니, 고양이가 조금 전 내가 구겨 버린 A4 용지 한 장과 진지하게 대치 중이었다. 세상 어디에도 없을 표정으로. 귀는 정찰기의 안테나처럼 앞으로 쏠려 있고, 동공은 보름달을 삼킨 듯 둥글게 부풀어 있다. 엉덩이는 몇 번이나 좌우로 흔들렸다. 그리고 마침내, 점프. 종이 뭉치는 도망치지 않았다. 저항도 하지 않았다. 영양가도 없고, 장난감도 아니고, 심지어 내가 버린 실패한 원고의 잔해였다. 그러나 고양이에게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 순간 내 방의 좁은 책상 아래에는 사바나가 펼쳐져 있었고, 구겨진 종이 한 장이 가젤이 되어 달아나고 있었다. 문득, 내가 쓰다 만 그 문장보다 이 장면이 훨씬 더 완성된 무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완결된 것. 그 자체로 완전한 것.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지만, 아무것도 결여되지 않은 것. 그것이 바로 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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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없음의 성역>

우리는 '쓸모’라는 단어와 너무 오랜 시간을 함께 살아왔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오늘 내가 할 일은 무엇인가. 이 일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 내가 쏟는 이 시간은 얼마의 값어치가 있는가. 커피 한 잔을 마시는 시간조차 우리는 '잠시 쉬어야 다시 집중할 수 있으니까’라는 정당성을 부여한다. 휴식조차 생산성의 연료가 되어야 하는 시대. 우리는 어쩌다 이토록 철저하게 효율의 언어로 삶을 번역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을까. 하지만, 고양이는 그 질문의 바깥에 산다. 고양이가 종이 뭉치를 쫓을 때, 그는 어떤 결과를 기대하지 않는다. 그것을 잡아서 무엇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다. 잡는 순간 놀이는 끝나버리므로, 사실 고양이에게 가장 흥미로운 것은 '잡기 직전의 그 상태’다. 긴장, 몰입, 떨림, 도약의 찰나. 결과가 아니라 과정 그 자체. 목적이 아니라 움직임 그 자체. 그의 놀이에는 어떤 외부적 보상도, 사회적 인정도, 미래를 위한 투자도 없다. 그저, 지금 이 순간이 있을 뿐이다. 네덜란드의 역사철학자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는 1938년, 『호모 루덴스(Homo Ludens)』라는 책을 통해 놀라운 주장을 내놓았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이성(호모 사피엔스)도, 도구 사용 능력(호모 파베르)도 아닌, 바로 '놀이’라고. 그는 놀이가 문화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가 놀이에서 태어났다고 말했다. 법, 예술, 시(詩), 철학, 심지어 전쟁의 의례까지도 본질적으로는 놀이의 구조를 품고 있다는 것이다. 하위징아는 놀이를 이렇게 정의했다.


“자발적으로 수용된 규칙 안에서,
일상의 바깥에서 행해지며,
그 자체 외에는 어떤 목적도 갖지 않는 행위.”

이 문장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은 마지막이다. 그 자체 외에는 어떤 목적도 갖지 않는 행위. 고양이가 종이 뭉치를 쫓는 것, 그것은 정확히 놀이의 정의에 부합한다. 아니, 어쩌면 고양이는 하위징아의 정의를 몸으로 살아내는 가장 순수한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는 책을 읽지 않고도 호모 루덴스의 진리를 알고 있다. 놀이는 정당화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놀이는 그 자체로 완결되어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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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 없는 행위의 존엄>

나에게는 오랫동안 의문이었던 장면이 있다. 고양이는 왜 병뚜껑 하나에 그토록 진지해질까. 왜 아무것도 아닌 그림자에 온 신경을 집중할까. 왜 내가 공들여 사 준 고급 장난감은 거들떠보지 않고, 택배 상자의 포장끈 하나에 밤새도록 매료되는 걸까. 오래 지켜보면서 나는 한 가지 가설에 도달했다. 고양이에게 사물은 '그것이 무엇인가’로 정의되지 않는다. '그것이 지금 어떻게 움직이는가’로 정의된다. 병뚜껑은 병뚜껑이 아니다. 굴러가는 것, 튕기는 것, 예측 불가능하게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그림자는 그림자가 아니다. 흔들리는 것, 사라지는 것, 다시 나타나는 것이다. 포장끈은 포장끈이 아니다.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대는 것, 움켜쥘 수 있는 것, 입에 물면 부드럽게 저항하는 것이다. 고양이에게는 사물의 '기능’이 없다. 오직 사물의 '현상’만이 있다.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시선인가. 우리는 사물을 볼 때 거의 자동적으로 그것의 용도를 먼저 떠올린다.


컵을 보면 ‘마시는 것’,
책을 보면 ‘읽는 것’,
펜을 보면 ‘쓰는 것’.


우리의 눈은 이미 기능으로 오염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사물을 '본다’기보다 ‘알아본다’. 진짜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확인할 뿐이다. 그러나 고양이는 사물을 ‘본다’. 매번, 처음 보듯이.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도구로서의 존재’와 '그저 있음으로서의 존재’를 구별했다. 망치가 망치로 쓰이는 동안 우리는 망치를 보지 못한다. 망치가 부러져서 더 이상 쓸모없어졌을 때 비로소 우리는 망치 자체를 본다. 존재는 기능의 정지 속에서 드러난다. 고양이는 모든 사물을 그렇게 본다. 기능의 정지 속에서, 순수한 존재로서. 그리고 그 시선 속에서만 놀이가 피어난다. 쓸모가 멈춘 자리, 거기서만 즐거움이 태어난다. 나는 때때로 궁금해진다. 내가 고양이를 보면서 '위로받는다’고 느끼는 이유는, 어쩌면 고양이가 내게 이 세상을 다시 보는 법을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잊어버린 첫 번째 시선을. 효율이라는 필터가 씌워지기 전의, 세상을 처음 만났을 때의 그 눈빛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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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성이라는 감옥>

아주 오랫동안 놀지 못했다는 사실을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나는 쉬었다. 취미 생활도 했다. 여행도 다녔다. 책도 읽었다. 그러나 그 모든 행위에는 항상 어떤 '이유’가 달라붙어 있었다. 쉬어야 내일 일할 수 있으니까. 취미를 가져야 삶이 풍요로워지니까. 여행은 시야를 넓혀 주니까. 독서는 자기계발이 되니까. 모든 즐거움은 더 큰 효율을 위한 투자가 되어 있었다. 심지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조차 나는 정당화해야 했다. ‘멍 때리기가 뇌에 좋다더라’, ‘번아웃을 막아 준다더라’. 무위(無爲)마저도 효능을 입증받아야만 허락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놀이는 사라졌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놀이는 '여가’라는 이름으로 갈아입고, 생산성 시스템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우리는 놀기 위해 놀지 않는다. 더 잘 일하기 위해 논다. 놀이조차 자기관리의 일부가 된 것이다. 이 지점에서 하위징아의 경고가 섬뜩하게 다가온다. 그는 20세기 중반, 이미 현대 문명이 놀이의 순수성을 잃어버리고 있다고 진단했다. 놀이가 진지함에 의해 오염되고, 모든 것이 경쟁과 효율의 언어로 환원되고 있다고. 그는 이것을 '푸에릴리즘(puerilism)'이라고 불렀다. 어른들이 진짜 놀이의 정신은 잃어버린 채, 유치한 대체물에 매달리는 현상을. 진정한 놀이는 어린아이 같지 않다. 오히려 가장 성숙한 정신의 표현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금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고양이의 놀이에는 푸에릴리즘이 없다. 그는 종이 뭉치를 쫓을 때 완전히 진지하다. 동시에 완전히 자유롭다. 그 두 가지가 모순되지 않는다. 몰입과 자유, 진지함과 즐거움이 한 몸이다. 반면 우리는 진지해지려 할수록 경직되고, 즐거워지려 할수록 산만해진다. 왜일까. 우리는 놀이와 일의 경계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일할 때는 즐겁지 않고, 놀 때는 집중하지 못한다. 두 영역이 서로를 오염시킨 채 우리를 짓누른다. 나는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가 고양이를 그토록 사랑하는 이유는, 그가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놀이와 삶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 매 순간이 그 자체로 완결되는 존재 방식. 우리가 한때 알고 있었으나 잊어버린 언어를, 고양이는 여전히 몸으로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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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가 내게 가르쳐 준 것>

저녁이었다. 나는 마감에 쫓겨 며칠째 제대로 잠을 못 잤고, 노트북 앞에서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그때 고양이가 슬며시 다가왔다. 무릎 위가 아니라, 내 손 근처에. 나를 올려다보지 않았다. 대신, 내 옆에 놓여 있던 펜 뚜껑 하나를 앞발로 톡, 건드렸다. 뚜껑이 책상 위를 굴러갔다. 고양이는 그것을 쫓아갔다. 다시 톡, 건드렸다. 또 굴러갔다. 또 쫓아갔다. 그 반복은 단순했다. 너무 단순해서, 처음엔 나도 모르게 '이게 뭐 재밌다고…'라는 생각이 스쳤다. 나는 계속 지켜보았다. 지켜보다 보니, 어느 순간 일을 잊고 있었다. 펜 뚜껑이 다음엔 어디로 굴러갈지, 고양이의 앞발이 어느 각도로 움직일지, 뚜껑이 책상 모서리에 걸려 멈출지 떨어질지. 나는 그 하찮은 드라마에 몰입해 있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 순간이 내가 며칠 만에 처음으로 진짜 ‘쉰’ 순간이었다는 것을. 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효율을 위한 재충전도 아니었다. 그것은 목적 없는 무엇인가에 온전히 마음을 두는 것이었다. 결과를 기대하지 않는 관찰. 의미를 요구하지 않는 바라봄. 그 안에서 시간은 비로소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나를 다그치는 직선의 시간이 아니라, 둥글게 머무르는 시간으로. 하위징아가 말한 '일상의 바깥’이란 아마도 이런 것일 것이다. 물리적으로 다른 장소가 아니다.


같은 책상, 같은 의자, 같은 방이지만,
시간의 성격이 달라진 자리.
쫓기지 않는 시간. 재어지지 않는 시간.
자기 자신의 속도로 흐르는 시간.

고양이는 그 시간을 여는 열쇠였다. 나는 그날 이후로 종종 일부러 '아무 의미 없는 일’을 한다. 창밖을 보는 일. 뜨거운 차가 식는 것을 지켜보는 일. 고양이의 수염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바라보는 일. 그것들은 어떤 성과도 남기지 않는다. 블로그에 올릴 사진도, 남들에게 말할 경험도 되지 못한다. 그저 사라질 뿐이다. 그러나 그 사라짐 속에서 나는 이상하게도 살아 있음을 느낀다. 어쩌면 진짜 생존은 거기에 있는 건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무엇이 되려 하는 삶 속이 아니라, 잠시 아무것도 되지 않아도 되는 순간 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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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는 왜 생존인가>

“놀이는 생존이다.” 이 말은 처음 들으면 어쩐지 반어처럼 들린다. 생존이란 보통 필요의 영역이다. 먹는 것, 자는 것, 번식하는 것, 위험을 피하는 것. 반면 놀이는 잉여의 영역처럼 보인다. 남는 에너지로 하는 것,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 그러나 동물행동학자들은 오래전부터 놀이가 단순한 잉여가 아니라는 사실을 관찰해 왔다. 새끼 고양이들이 서로 엉켜 뒹구는 놀이 속에는 미래의 사냥 기술이 프로그래밍되고 있다. 강아지들의 장난스러운 싸움 속에서 사회적 서열과 절제의 규칙이 학습된다. 심지어 어른 동물들조차, 생존에 직접 필요하지 않은 순간에도 놀이를 즐긴다. 돌고래는 파도를 타고, 까마귀는 눈밭에서 미끄럼을 타며, 여우는 나뭇잎을 공중에 던지고 받는다. 놀이는 진화적으로 '남아도는 행위’가 아니다. 놀이야말로 생명이 자신을 연습하는 방식이고, 자신에게 기쁨을 선물하는 방식이다. 하위징아는 인간 문명 전체가 바로 이 '잉여의 기쁨’에서 태어났다고 보았다. 법정은 언어의 놀이에서, 시는 리듬의 놀이에서, 철학은 사유의 놀이에서, 종교 의례는 몸짓의 놀이에서 태어났다. 생존에 꼭 필요한 것만 했다면, 인류는 여전히 동굴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쓸모없어 보이는 것들을 향한 그 무상(無償)의 애정이야말로 문명을 창조한 동력이었다. 그러므로 놀이는 잉여가 아니다. 놀이는 생존의 가장 깊은 층위다.


호흡이 생존이듯,
놀이도 생존이다.


우리가 놀지 못할 때, 기능하는 도구로 전락한다. 마음이 말라 간다. 세상이 회색이 된다. 모든 것이 해야 할 일의 목록으로 환원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날은 '낭비된 날’로 낙인찍힌다. 그러나 그런 삶 속에서 우리는 서서히 죽어 간다. 심장은 뛰지만 영혼은 멈춘 채로. 고양이는 그 반대의 생존을 보여 준다. 하루 중 열여섯 시간을 잔다. 사이사이, 깨어 있는 짧은 시간 동안 그는 충분히 먹고, 충분히 그루밍하고, 그리고 충분히 논다. 놀이에는 과시도, 축적도, 계산도 없다. 그저 살아 있음의 표현이 있다. 그것을 '최소한의 삶’이 아니라 '최대한의 삶’이라고 부르고 싶다. 덜어낼 것이 없기에 완전한 삶. 더할 것도 없기에 풍요로운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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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쓸모 없는 물건들의 목록>

어느 날부터 고양이가 사랑한 '아무 쓸모 없는 것들’의 목록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찢어진 영수증. 떨어진 단추. 깨진 샤프심. 구겨진 포장지. 빈 약병. 고무줄. 머리끈. 택배 박스의 운송장 스티커. 내가 실수로 떨어뜨린 과일 씨앗. 창문으로 비쳐 들어오는 햇빛의 조각. 빨래를 개고 남은 자투리 실. 내 슬리퍼의 보풀. 이 목록을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따뜻해진다. 세상의 어떤 카탈로그에도 오르지 못할 것들. 쓰레기통으로 향하던 중간에 잠시 붙잡힌 것들. 누군가에게는 먼지에 지나지 않을 것들. 그러나 고양이에게는 그 모두가 한때 우주의 중심이었다. 이 목록은 내게 철학적인 질문을 던진다.


'가치’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이 소중한지 어떻게 정하는가.


흔히 가치를 희소성과 유용성으로 측정한다. 금은 희소하기에 귀하고, 물은 생존에 필수적이기에 귀하다. 그러나 고양이의 세계에서는 그 기준이 전혀 작동하지 않는다. 다이아몬드 목걸이와 빈 두루마리 휴지 심이 같은 가치다. 아니, 후자가 훨씬 더 귀하다. 후자만이 '놀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놀이의 세계에서 가치는 외부에서 부여되지 않는다. 그것은 관계 속에서 매번 새롭게 태어난다. 내가 이 사물과 어떻게 만나는가, 순간이 어떻게 흐르는가, 몸이 이 대상 앞에서 어떻게 살아나는가. 가치는 그 관계의 생생함에서 피어난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삶에서 가장 빛났던 순간들도 대개 그런 것이 아니었던가. 비싼 레스토랑보다, 비 오는 밤 편의점에서 나눠 먹은 컵라면의 맛. 고급 여행지보다, 이름 없는 골목에서 길을 잃고 웃었던 순간. 어떤 훌륭한 책의 문장보다, 오래된 친구가 건넨 말도 안 되는 농담 한 마디. 가장 쓸모없어 보이는 것들이, 가장 오래 남는다. 가장 사소한 순간이, 가장 깊이 새겨진다. 이것은 고양이가 알려 준 비밀이다. 혹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었으나 잊은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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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미한 시간을 즐기는 법>

그래서, 어떻게 해야 우리는 다시 놀 수 있을까. 이 질문 자체가 이미 함정이다. '어떻게’를 묻는 순간, 놀이는 방법론이 되고, 방법론은 또 하나의 과제가 된다. 놀이가 효율적으로 되는 법, 놀이로 창의성을 높이는 법, 놀이를 통한 자기계발 ― 이런 문장들을 보면 고양이는 아마 우리를 비웃을 것이다. 그러니 나는 '방법’이 아니라 '태도’를 이야기하고 싶다. 첫 번째는, 정당화하지 않는 것이다. 무언가를 하고 싶을 때 '이것이 내게 어떤 도움이 될까’라는 질문을 잠시 멈추는 연습. 그저 해보고 싶으니까 한다. 끌리니까 머문다. 기쁘니까 계속한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자신의 모든 행동에 변명을 달아 왔다. 그 변명의 습관을 조금씩 내려놓는 것. 그것이 놀이로 돌아가는 첫걸음이다. 두 번째는, 결과를 기록하지 않는 것이다. SNS 시대의 놀이는 대부분 '보여지기 위한 놀이’다. 우리는 여행을 하면서 사진을 찍고, 사진을 공유하고, 반응을 확인한다. 놀이가 끝나는 순간, 그것은 콘텐츠가 된다. 그러나 진짜 놀이는 증발한다. 사라진다.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그 사라짐을 허락하는 것.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기쁨을 가지는 것. 그것이 놀이의 순수성을 지키는 방법이다. 세 번째는, 사소한 것에 시간을 쓰는 것이다. 하루에 단 오 분이라도, 아무 의미 없는 일에 자신을 내어 주는 연습. 창밖을 보는 일. 손톱의 반달을 들여다보는 일. 오래된 노래를 끝까지 듣는 일. 차가 식는 걸 바라보는 일. 이 작은 시간들이 쌓여 어느새 우리 안에 작은 성소(聖所)가 생긴다. 바쁨이 침범할 수 없는, 고요한 놀이의 방. 네 번째는, 고양이를 바라보는 것이다. (혹은 고양이가 아니어도, 아이,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창틀 위의 햇살이어도 좋다.) 그들의 시간을 함께 사는 것. 그들의 리듬을 빌려 오는 것. 우리는 스스로 놀지 못할 때, 놀고 있는 존재 곁에 앉아 그 기운을 쬐일 수 있다. 햇볕을 쬐듯이. 난롯불을 쬐듯이. 그것만으로도 우리 안의 얼어 있던 무언가가 조금씩 녹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용기를 가지는 것이다. 그렇다. 놀이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시간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용기. 쓸모없는 일에 진심이 될 용기. 남들이 뛰어갈 때 멈춰 설 용기. 모두가 결과를 자랑할 때, 결과 없음을 사랑할 용기. 이것은 작은 용기가 아니다. 오히려 이 시대에 가장 급진적인 용기일지도 모른다. 놀이야말로 저항이다. 생산성이라는 거대한 시스템 안에서, 자신의 영혼에 작은 자유의 섬을 지키는 일. 고양이는 그 섬을 매일같이 지킨다. 우리도 그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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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가의 고양이, 그리고 시간>

해가 질 무렵, 나의 고양이는 늘 창가에 앉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쫓지 않는다. 그저 앉아서, 서서히 물들어 가는 하늘을 본다. 혹은 보지 않고 그저 거기 있는다. 그의 눈은 반쯤 감겨 있고, 꼬리는 규칙적으로, 천천히 흔들린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도 아니다.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존재한다. 존재하는 일에 온통 몸을 맡긴다. 그 옆에 앉아 그를 지켜본다. 처음엔 고양이의 평온이 부러웠다. 그 다음엔 내 안의 소란이 부끄러웠다. 시간이 더 흐르면, 나도 모르게 고양이의 리듬에 물들어 간다. 창밖의 나무가 흔들리고, 어딘가에서 자동차 소리가 멀어지고, 방 안의 공기가 조금 차가워지는 것이 느껴진다. 세상이 크고 느리게 숨쉬고 있다는 것이, 내 몸의 어느 자리에선가 감지된다. 이 시간은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다. 시간은 어떤 기록에도 남지 않는다. 그러나 이 시간이 없다면, 나는 아마 이 모든 글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놀이가 문명을 낳았듯,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모든 의미 있는 것의 어머니다. 비어 있음이 충만함의 조건이고, 목적 없음이 모든 목적의 근원이다. 이 진리를 증명하기 위해 태어난 작은 선생 같다. 고양이는 책을 쓰지 않는다. 강의를 하지 않는다. 다만 매일, 묵묵히, 온몸으로 보여 준다. 살아 있다는 것은 얼마든지 더 단순할 수 있다고. 얼마든지 더 자유로울 수 있다고. 얼마든지 더 기쁠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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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다시, 종이 뭉치 하나>

글을 마무리할 즈음, 그 종이 뭉치가 다시 생각난다. 새벽 세 시에 고양이를 사로잡았던 그 작고 구겨진 원고. 나는 다음 날 아침 그것을 쓰레기통에 넣지 않았다. 책상 한쪽에 그대로 두었다. 언젠가 고양이가 다시 그것을 발견할지도 모르니까. 또 한 번, 그의 작은 사바나가 열릴지도 모르니까. 종이 뭉치는 여전히 거기 있다. 아무 쓸모도 없이. 의미도 없이. 그러나 그 쓸모없음이야말로 그것의 가장 큰 값어치다. 고양이에게도, 어쩌면 나에게도. 나는 요즘 사람들에게 자주 묻고 싶어진다. 당신에게는 당신만의 종이 뭉치가 있습니까. 쓸모로 환산되지 않는 무엇. 누구에게도 자랑하지 않는 기쁨.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는 몰입. 당신의 손을 저절로 움직이게 하는, 그 아무 것도 아닌 무엇. 없다면, 오늘 하나 만들어 보시기를.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하찮을수록 좋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수록 좋다. 설명할 수 없을수록 좋다. 그 하찮고 이해받지 못하고 설명할 수 없는 한 줌의 시간 속에서, 당신의 호모 루덴스가 다시 깨어날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때야 비로소 알게 될 것이다. 놀이는 삶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는 것을. 놀이는 삶 그 자체라는 것을. 고양이는 오늘도 창가에 앉아 있다. 햇살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눈부신 일에 몰두해 있다. 그리고 나는, 그 옆에 앉아 이 글을 쓴다. 이것 역시, 어쩌면 하나의 놀이일 뿐. 그것으로 충분하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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