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하게 추락하는 법

회복탄력성, 고양이에게 배우는 낙법의 철학

by 골디오션


"인간의 위대함에 대한 공식은 운명애다.
즉, 어떤 다른 것을 갖기를 원치 않는 것이다.
앞으로도 아니고 뒤로도 아니고 그리고 영원토록 아니다."


— 프리드리히 니체,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




<프롤로그: 저 뻔뻔함은 어디서 오는가?>

나는 오랫동안 웃지 못했다. 녀석이 창틀을 향해 도약하는 순간은 아름다웠다. 뒷발로 바닥을 박차는 힘, 앞다리를 뻗으며 포물선을 그리는 몸의 곡선, 공중에서 잠시 멈추는 것 같은 그 찰나. 그러나 무언가에 삐끗했다. 앞발이 창틀 가장자리에 아슬아슬하게 걸쳤다가 미끄러졌다. 0.2초의 공중회전. 그리고 소리 없는 착지. 그 뒤가 압권이었다. 녀석은 착지한 자리에서 0.5초 정도 멈춰있었다. 마치 방금 일어난 일이 자신과 전혀 무관하다는 듯, 앞발을 들어 천천히 귀 뒤를 핥기 시작했다. 한 번, 두 번, 정성스럽고, 여유롭고, 무심하게. 나는 그 광경을 보며 웃음이 터져 나오다가, 이내 묘한 감정이 밀려왔다. 웃음과 질투가 뒤섞인,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 저 뻔뻔함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저렇게 무너질 수 있으면서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능력, 실패를 즉각 흘려보내고, 자신을 핥아 다독이며, 다음 순간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저 재주를 인간이라면 어땠을까. 창틀에서 미끄러진 사람은 아마 얼굴이 빨개졌을 것이다. '누가 봤으면 어쩌지?' 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을 것이다. '아, 창피해. 왜 이렇게 조심성이 없지? 역시 나는 뭘 해도 안돼.' 그리고 그날 밤, 이불속에서 그 순간을 다시 한번 재생했을 것이다. 어쩌면 일주일 후, 한 달 후에도 생각날 것이다. 하지만 녀석을 보자. 고양이는 철학을 공부하지 않는다. 인류가 수천 년에 걸쳐 애써 배우려 했던 것을 본능으로 살아낸다. 추락하되 상처받지 않는 법. 실패하되 자신을 잃지 않는 법. 넘어진 자리에서 우아하게 일어나 다음 발걸음을 내딛는 법. 그 뻔뻔하고도 우아한, 오래되고 어려운 생존 기술에 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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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는 어떻게 추락하는가?>

과학의 역사에서 고양이의 추락은 꽤 오랜 수수께끼였다. 1894년, 프랑스 생리학자 엔티엔 줄스 마레이(Étienne-Jules Marey)는 초당 60 프레임의 크로노포토그래피(chronophotography) 기술로 추락하는 고양이를 연속 촬영하는 데 성공했다. 그 사진들은 당시 물리학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뉴턴 역학에 따르면, 회전하지 않은 채 자유낙하하기 시작한 물체는 공중에서 스스로 방향을 바꿀 수 없다. 각 운동량은 보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양이는 분명히 해냈다. 회전하지 않고 떨어지기 시작했지만, 착지 때는 네 발이 아래를 향하고 바닥에 착지하였다. 오늘날 '고양이의 정위반사(Cat Righting Reflex)'라 불리는 이 능력의 물리학적 원리는 다음과 같다. 고양이는 추락을 감지하는 순간 눈과 내이(內耳)의 전정기관을 동시에 작동시켜 위아래를 판단한다. 그다음 몸의 앞부분과 뒷부분이 서로 다른 축을 중심으로 회전하도록 허리를 구부린다. 앞다리를 안쪽으로 집어넣어 앞부분의 관성모멘트를 최소화하고, 뒷다리를 밖으로 뻗어 뒷부분의 관성모멘트를 최대화한다. 이 비대칭으로 인해 앞부분이 빠르게 회전하는 동안 뒷부분은 반대 방향으로 상대적으로 느리게 움직인다. 그런 다음 반대로 앞다리를 펴고 뒷다리를 집어넣어 뒷부분을 더 빠르게 회전시킨다. 이 두 단계를 필요에 따라 반복하며 고양이는 마침내 완전한 180도 회전을 완성한다. 전체 각운동량은 보존되지만, 신체의 각 부분이 관성모멘트를 교대로 조절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방향 전환을 이루어내는 것이다.


이 반사는 생후 3~4주부터 나타나고 6~9주에 완성된다. 배운 것이 아니다. 경험으로 터득한 것도 아니다. 그냥 몸 안에 새겨진 앎이다. 2026년 일본 히구라시 박사팀의 연구는 고양이의 흉추(가슴 부분 척추)가 인간의 목처럼 회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정밀하게 밝혀냈다. 인간의 흉추는 갈비뼈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어 비틀림이 거의 불가능하지만, 고양이의 흉추는 360도에 가까운 유연성을 가진다. 이 구조적 유연성이 고양이를 낙법의 달인으로 만드는 해부학적 기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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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메커니즘을 공부하면서 계속해서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 고양이의 낙법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기적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이 완전히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패닉도 없고, 저항도 없고, 과도한 힘의 개입도 없다. 추락하는 힘을 이기려 하지 않는다. 그저 힘 안에서, 힘과 함께, 가장 안전한 자세를 찾는다. 철학적으로 읽으면 이것은 스토아 철학의 핵심 명제와 놀랍도록 닮아 있다. 통제할 수 없는 것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마라. 통제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라. 추락 자체는 막을 수 없다. 중력은 피해 갈 수 없다. 그러나 어떻게 떨어지는가, 어디에 발을 짚는가는 — 단 0.3초라는 시간 안에서도 — 조율이 가능하다. 고양이의 몸은 이 구분을 안다. 아니, 더 정확히는 이 구분이 고양이의 몸 자체에 새겨져 있다.


우리는 실패 앞에서 이것을 잊는다. 미끄러지기 시작한 순간, 미끄러졌다는 사실을 부정하거나, 그 미끄러짐이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 과장하거나, 혹은 미끄러지는 동안 '왜 내가 이 상황에 처했는가?'를 분석하느라 착지 준비를 잊는다. 공중에서 패닉에 빠진 우리, 고양이가 착지에 성공하는 것은, 추락하는 동안 추락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상황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지금 가능한 것에만 집중하는 것. 이것이 고양이의 몸에 새겨진 철학이다.



<뻔뻔함의 미덕: 그루밍이라는 의식(儀式)>

점프에 실패한 고양이가 즉각 그루밍을 시작하는 장면은, 목격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반드시 웃음을 터뜨리게 만든다. 웃음의 이유를 분석해 보면 흥미롭다. 우리는 그 상황에서 당연히 '당황함'을 기대하기 때문에 웃는 것이다. 당황함이 없다는 것, 아니 더 정확히는 당황함이 즉각 해소된다는 것이 코믹하게 느껴진다. 잘 생각해 보면, 당황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고양이가 실수했다. 그리고 착지했다. 다쳤는가?, 죽었는가?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동물행동학에서 그루밍을 하는 행동은 '전위 행동(displacement behavior)'으로 분류된다. 긴장이나 갈등 상황에서 본래 맥락과 무관해 보이는 행동이 돌출되는 현상. 고양이는 스트레스를 받거나 불확실한 상황에 처했을 때 그루밍을 한다. 그루밍은 베타-엔도르핀을 분비시켜 통증과 긴장을 완화하고, 자율신경계의 부교감신경을 활성화시켜 몸 전체를 진정시킨다. 체온도 조절한다. 즉, 실패 직후의 그루밍은 일종의 생리적 리셋이다. 몸이 스스로 자신을 다독이는 방식이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그 리셋의 속도와 철저함이다. 고양이는 실패를 처리한 뒤 다음 순간으로 이행하는 것이 아니다. 실패와 다음 순간 사이에 어떤 내러티브도 끼워 넣지 않는다. 실패는 이미 지나간 사건이고, 지금 이 순간은 지금 이 순간이다. 두 사건 사이에 인과관계가 없다. 이전의 실패가 현재의 자신을 정의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떠한가. 실패를 현재 진행형으로 산다. 어제의 실수가 오늘 아침 식탁에서 불쑥 떠오른다. 3년 전 발표에서 말문이 막혔던 기억이 새로운 발표 직전 다시 살아난다. 실패를 저장하고, 분류하고, 정기적으로 꺼내 다시 생각해 낸다. 심지어 우리는 다시 생각하는 활동을 '자기 성찰'이라 부르며 미덕으로 포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경계는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가. 자기 성찰은 언제든 자기 징벌로 이어진다.


'내가 왜 그랬을까'는 '나는 왜 이 모양인가'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자기비판적 반추(self-critical rumination)'라고 부른다. 자기비판적 반추는 우울과 불안의 가장 강력한 예측 인자 중 하나다. 자신에게 가혹한 사람은 회복이 느리고, 다음 시도를 두려워하며, 에너지를 새로운 도전보다 과거의 실수를 처리하는 데 소진한다. 연구결과들은 반복적인 자기비판이 실제 행동의 변화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도 보여준다. 오히려 자기비판은 다음 시도에 대한 두려움을 키우고, 결국 더 많은 실수를 만들어낸다. 잘못을 인정하되 자신을 짓밟지 않는 것, 책임감은 있되 자기 처벌은 없는 것 — 이것이 고양이가 매번 점프에 도전하는 비밀이다.


자기 자비(self-compassion) 연구의 선구자 크리스틴 네프(Kristin Neff)는 수십 년의 연구를 통해 이것을 실증했다. 자신에게 친절한 태도, 즉 자신을 마치 좋은 친구를 대하듯 따뜻하게 대하는 태도가 오히려 더 높은 책임감과 더 강한 동기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자신을 가혹하게 몰아붙이는 것이 더 나은 성과를 만든다는 믿음은 실증 데이터와 정반대다. 자기 자신에게 관대해야 진짜 성장이 가능한 것이다.


고양이는 이것을 안다. 더 정확히는, 고양이는 이것을 모른 채 실천한다. 그리고 그것이 더 부럽다. 지식 이전에 무의식으로 새겨진 지혜. 이론을 이해한 뒤에야 실천할 수 있는 인간과, 이론 없이 이미 실천하고 있는 고양이 사이의 이 거리. 나는 그 거리가 때로는 수천 년의 철학으로 채워야 할 간격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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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아모르파티: 추락을 사랑하는 법>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1882년 『즐거운 학문(Die fröhliche Wissenschaft)』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필연적인 것들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법을 점점 더 배우고 싶다. 아모르파티(Amor Fati): 이것이 지금부터 나의 사랑이 되게 하라! 나는 추한 것들에 맞서 전쟁을 선언하지 않으려 한다. 나는 비난하지 않으려 한다. 비난하는 자가 되는 것조차 원하지 않는다. 외면하는 것으로 충분하리라! 그리고 총체적으로, 나는 언젠가 오직 긍정하는 자가 되기를 원한다!" 운명애(運命愛).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 그러나 이 개념은 너무도 자주 오해를 일으킨다. 많은 사람들이 아모르파티를 피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수동적 체념으로 받아들인다. '어차피 정해진 운명이니 그냥 받아들이자'는 식으로. 니체가 말하는 아모르파티는 그런 굴복과 전혀 다르다. 니체의 운명 개념은 '힘의 의지(Wille zur Macht)'와 분리해서 이해할 수 없다. 니체에게 운명이란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의지와 선택, 그리고 그 선택이 만들어낸 필연적 결과의 총체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을 극복해 나가는 존재여야 하며, 그 과정에서 만나는 저항과 고통은 성장의 연료다. 그러므로 '운명을 사랑하라'는 것은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좋아'가 아니라, '나의 의지로 선택한 길, 그 길에서 만나는 모든 것 — 고통까지 포함하여 — 을 긍정하라'는 뜻이다.


니체는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에서 더 직접적으로 말했다."인간의 위대함에 대한 공식은 운명애다. 즉, 어떤 다른 것을 갖기를 원치 않는 것이다. 앞으로도 아니고 뒤로도 아니고 그리고 영원토록 아니다."이것은 지금 이 순간의 자신을,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그리고 앞으로 걸어갈 길을 있는 그대로 포용하겠다는 선언이다. 실패, 상처를 포함하여, 모든 순간들을 포함하여.


니체는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이 문장은 종종 무모한 낙관주의로 소비되지만, 그 진정한 의미는 더 깊다. 고통에서 도망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외면하지 말라는 것이다. 직면하라. 당당히 그 안으로 들어가라. 저항과 고통 속에서만 사명은 뚜렷해지고, 의지는 강해진다. 고통은 제거해야 할 장애물이 아니라 통과해야 할 과정인 것이다. 이것을 고양이의 점프 실패에 적용해 보자. 고양이는 실패한 점프를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부정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실패는 그냥 일어난 일이다. 추락은 추락이고, 그루밍은 그루밍이고, 다음 점프는 다음 점프다. 각각이 완전하고 독립적인 사건으로 존재한다. 이전 실패가 다음 시도에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는다.


니체의 아모르파티는 '영원회귀(ewige Wiederkehren)' 사상과도 깊이 연결된다. 영원회귀는 니체의 가장 근본적이고 도전적인 사유 실험이다. 만약 당신의 삶이 단 하나의 변경도 없이 무한히 반복된다면, 당신은 그 삶을 긍정할 수 있는가? 그것도 의지적으로, 실패한 점프들, 어색했던 순간들, 후회스러운 선택들이 모두 그대로 다시 펼쳐진다. 그 모든 것을 포함하여 '그래도 좋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니체는 그것이 가능한 사람만이 진정으로 자신의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한다. 실패를 없애려 하지 않고, 실패를 포함한 자신의 전체 여정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운명애(運命愛)다. 고양이는 영원회귀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고양이의 삶은 그 자체로 영원회귀를 실천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제의 실패가 오늘을 물들이지 않는다. 매 순간이 처음이다. 이 무심한 현재중심성이 니체가 수백 페이지에 걸쳐 철학적으로 도달하려 했던 지점과 얼마나 닮아 있는가. 또한 니체는 '위대한 건강(die grosse Gesundheit)'에 대해 말했다. 그것은 다른 자신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하나의 숙명처럼 받아들이겠다는 결의다. 이 결의 위에서만 아모르파티가 가능하다.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되려는 욕망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자신의 실패까지 포함한 전체를 사랑할 수 있다.





<스토아의 평정심: 에픽테토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그리고 세네카>

니체의 아모르파티가 실패를 '사랑의 대상'으로 끌어안는다면, 스토아 철학은 실패를 다른 방식으로 처리한다. 그것은 무관심도 아니고 회피도 아니다. 오히려 더 철저한 직면이다. 그리고 직면의 방향이 다르다. 스토아는 묻는다. 이것이 '내 통제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 스토아 철학의 핵심은 단순하고 강력하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것이 있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통제할 수 없는 것.'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나의 생각, 판단, 반응, 의도이다. 결과, 타인의 평가, 날씨, 시장, 건강, 명예 — 이것들은 나의 통제 밖에 있다. 스토아는 말한다. 통제 밖의 것에 감정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은 어리석다. 통제 안의 것에만 집중하라.


에픽테토스(Epictetus)는 이 구분으로 『엥케이리디온(Enchiridion)』의 첫 문장을 시작한다."어떤 것은 우리의 힘 안에 있고, 어떤 것은 우리의 힘 밖에 있다. 우리의 힘 안에 있는 것은 의견, 충동, 욕망, 혐오 — 한마디로 우리 자신의 행위다. 우리의 힘 밖에 있는 것은 육체, 명예, 지위, 권력 — 한마디로 우리 자신의 행위가 아닌 것이다." 에픽테토스는 노예였다. 로마 황제 네로의 비서인 에파프로디투스의 소유물이었다. 주인은 언제든 그를 때릴 수 있었고, 실제로 때렸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에픽테토스의 다리는 주인에게 비틀려 영구히 불구가 되었다. 그런데 그는 다리가 부러지는 순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은 지금 그것을 부러뜨릴 것이오." 그리고 다리가 부러지자, "보시오, 내가 말했지 않았소"라고 했다. 이것이 스토아적 평정심의 극단적 표현이다. 육체는 빼앗길 수 있다. 건강도, 명예도, 심지어 자유도 빼앗길 수 있다. 그러나 판단은, 즉 이 상황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하는 내면의 태도는 빼앗길 수 없다. 에픽테토스는 노예의 몸으로 살았지만, 그의 정신은 한 번도 노예가 아니었다.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는 반대 편 극단에 있었다. 역사상 가장 광대한 제국의 황제. 그의 치세는 재난의 연속이었다. 게르만족과의 끝없는 전쟁, 제국을 휩쓴 전염병(안토니우스 역병), 반란, 그리고 아들 코모두스의 방탕함. 그러나 그는 밤마다 일기를 썼다. 자기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후대에 『명상록(Meditations)』으로 알려진 그 기록들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어떤 장애물이 앞을 막더라도, 행동하려는 의지를 막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마음은 그 어떤 장애물도
자신의 목적에 맞게 조정하고 전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길을 막는 것이 곧 길이 된다."


이것은 역경을 환영하라는 낙관주의가 아니다. 역경이 없다고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역경은 인정한다. 그러나 역경에 의해 '나'가 정의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점프에 실패했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그러나 그 실패가 '나는 형편없다'로 연결되지 않는다. 추락은 물리적 사건이다. 자존감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또 다른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Seneca)는 더 인간적인 언어로 말했다."우리는 상상 속에서 고통받는 것이 실제 고통받는 것보다 더 자주, 더 길게 고통받는다."실제 점프 실패는 0.2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자기비판적 반추는 0.2시간, 0.2일, 심지어 0.2년이 될 수 있다. 실제 사건보다 그것에 대한 우리의 서사가 우리를 더 많이 해친다. 스토아는 이 서사를 단절시키는 훈련이다. 스토아 철학자들이 말하는 '평정심(아타락시아, ataraxia)'은 감정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감정의 노예가 되지 않는 상태다. 파도가 없는 바다가 아니라, 파도에 흔들리지 않는 닻이다. 스토아의 이상적 인간은 슬픔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슬픔을 느끼되 그 슬픔에 압도당하지 않는 사람이다. 실패 앞에서 좌절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좌절을 느끼되 그 좌절이 다음 행동을 막지 않는 사람이다.


고양이의 낙법을 다시 생각해 보자. 고양이가 착지에 성공하는 핵심 조건 중 하나는 몸의 이완이다. 만약 고양이가 공중에서 공포에 질려 몸을 경직시켰다면, 정위반사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유연한 척추가 움직이지 않고, 관성모멘트 조절도 불가능해진다. 고양이가 착지에 성공하는 것은, 추락 중에도 몸이 이완되어 있기 때문이다. 두려움이 몸을 굳히지 않는다. 이것이 스토아적 평정심의 생물학적 표현이다. 우리의 많은 실패가 공포가 만들어낸다. 발표 중의 실수는 실수 자체보다, '실수하면 어떡하지'라는 불안이 경직시킨 몸이 만들어내는 경우가 많다. 시험에서의 백지는 무지 때문이 아니라, '틀리면 안 된다'는 압박이 뇌의 작동을 방해하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스토아가 가르치는 것은 결국 이것이다. 추락은 막을 수 없다. 그러나 추락하는 동안 어떤 자세를 취하는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그리고 그 자세는 이완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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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를 자아로 연결하지 않는 법: 행동과 존재의 분리>

현대 심리학에서 '자기 동일시(self-identification)'는 자신의 행동, 성과, 역할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정도를 말한다. 자기 동일시가 과도하게 높은 사람에게 실패는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에 대한 판결이다. "나는 실패했다"와 "나는 실패자다"의 거리는 그들에게 종잇장처럼 얇다. 이 과도한 동일시는 어디서 오는가. 대부분 어릴 때부터의 조건화다. 성적으로, 등수로, 수상 경력으로 자신의 가치를 평가받아온 아이는 성과와 자존감을 분리하지 못하는 어른이 된다. 잘하면 사랑받고, 못하면 무시당하는 환경에서 자란 사람은 성과를 잃는 순간 존재 자체가 위협받는 느낌을 받는다. 한 번의 실수가 '나는 이 분야에 소질이 없어'로, '나는 어디서도 인정받지 못해'로, 결국 '나는 가치 없는 존재야'로 점점 아래를 향해 미끄러진다. 이 미끄럼틀은 한번 타기 시작하면 멈추기 어렵다.


고양이는 이 끝나지 않는 미끄럼틀을 타지 않는다. 고양이에게 점프 실패는 그냥 '이 점프가 실패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나는 형편없는 고양이'를 의미하지 않는다. 점프의 실패와 존재의 가치는 별개의 우주에 속한 이야기다. 이 분리가 고양이의 뻔뻔함을 가능하게 하고, 고양이를 다시 점프하게 만든다. 불교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탈동일시(dis-identification)'라고 부른다. 명상 수련에서 가장 어려운 과제 중 하나는 생각이나 감정을 관찰하되 그것과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화가 났다'가 아니라 '화남이 일어나고 있다'로. '나는 실패했다'가 아니라 '실패가 일어났다'로. 사건은 사건이고, 나는 나다. 이 단순한 거리 두기가 엄청난 심리적 자유를 만들어낸다.


서구 심리치료에서도 최근 이런 접근이 주목받고 있다. ACT(수용전념치료, Acceptance and Commitment Therapy)는 고통스러운 생각이나 감정과 싸우는 대신 그것을 관찰자의 시점에서 바라보도록 훈련시킨다. 핵심 기술 중 하나가 '인지 탈융합(cognitive defusion)'이다. "나는 실패자야"라는 생각을 "나는 '나는 실패자야'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구나"로 바꾸는 것. 이 간극 하나로 생각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 생각이 행동을 지배하는 힘은 현저히 줄어든다. 자기비판이 때로는 위장된 자기 보호임을 알아야 한다. '내가 먼저 나를 비판함으로써 남의 비판을 예방한다'는 방어 기제. 혹은 '내가 충분히 자책했으니 이번에는 넘어가도 된다'는 심리적 면죄부를 위한 것. 그러나 이 전략은 효과가 없다. 자책은 이해를 대체하지 못하고, 고통은 학습을 보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과도한 자기비판은 상황을 객관적으로 분석하는 인지 능력을 방해한다. 감정적으로 압도당한 뇌는 학습하지 못한다.


고양이는 이 모든 심리학적 함정을 피해 간다. 실패가 일어나면, 실패가 일어난 것이다. 자신의 신체적 상태를 점검하고(그루밍), 진정하고, 다음 순간으로 이동한다. 실패라는 라벨 붙이지 않는다. 기록도 하지 않는다. 과거의 실패와 현재의 실패를 연결하는 서사또한 만들지 않는다.



"장애물이 행동을 방해한다.
하지만 마음의 자세는 적응하고 전환한다.
길을 막는 것이 곧 길이 된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Meditations)』



<낙법의 철학: 유연함이 진짜 강함이다>

유도의 '낙법(受身(일본식 한자), ukemi)'은 글자 그대로 '몸을 받는다'는 뜻이다. 쓰러지되 다치지 않는 법. 힘으로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힘을 분산시키고 흘려보내는 기술. 낙법을 처음 배우는 사람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것은 몸을 이완시키는 것이다. 떨어질 때 본능적으로 몸에 힘이 들어간다. 딱딱하게 경직된 몸은 충격을 그대로 흡수한다. 반면 이완된 몸은 충격을 분산시키고 흘려보낸다. 고양이의 착지가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힘을 이기기 때문이 아니라, 힘과 함께 흘러가기 때문이다. 중력을 거슬러 추락을 막으려 하지 않는다. 추락을 받아들이면서, 그 안에서 최선의 착지자세를 찾는다. 착지 직전에는 등을 약간 구부리고 다리를 벌려 충격을 분산시키고, 발바닥의 두꺼운 패드가 나머지를 흡수한다. 이 모든 것이 저항이 아닌 수용의 기술이다.


노자(老子)는 『도덕경』에서 물을 가장 강한 것의 비유로 삼았다. 物之剛强者、水之柔弱者之敵(물질에서 단단하고 강한 것은, 물처럼 부드럽고 약한 것을 이기지 못한다). 물은 돌을 공격하지 않는다. 돌의 형태를 따라가면서 결국 돌을 깎는다. 부드러움이 딱딱함을 이긴다(柔弱勝剛强). 고양이의 낙법은 이 동양 철학의 몸으로 된 실천이다. 추락이라는 힘에 저항하지 않고, 그 힘의 방향을 따라가면서 가장 안전한 자세를 찾는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이렇게 썼다."불을 태우는 것을 화재 장애물이라고 하지 않는다. 장애물은 불의 먹이가 된다." 우리가 직면하는 역경들이 실은 성장의 연료라는 것. 저항이 클수록 의지는 뚜렷해지고, 마찰이 클수록 빛이 밝아지는 원리. 장애물을 장애물로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물을 길의 일부로 삼는 것.


회복탄력성(resilience)을 단순히 '빠르게 원래 상태로 돌아오는 능력'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충분하다. 최근의 심리학 연구들은 회복탄력성을 좀 더 복잡하게 재정의한다. 그것은 원래 상태로의 복귀가 아니라, 변화된 상황 속에서 새로운 균형을 찾는 능력이다. 물리학의 비유를 쓰자면, 탄성이 있는 고무가 원래 모양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유연한 나무가 폭풍에 휘면서도 꺾이지 않는 것처럼. 회복탄력성은 강함이 아니라 유연함이다. 딱딱한 것이 부러지지만, 유연한 것은 살아남는다.


고양이의 척추가 유연하기 때문에 낙법이 가능하듯이, 자아가 유연하기 때문에 실패 후 회복이 가능하다. 자아가 딱딱하게 경직된 사람—자신에 대한 단일하고 취약한 이미지를 가진 사람—은 그 이미지가 흔들릴 때 무너진다. 반면 자아가 유연한 사람—실패를 포함한 자신의 복잡성을 수용하는 사람—은 실패 앞에서도 본질적인 자신을 잃지 않는다. 유연한 자아는 충격을 흡수하고, 딱딱한 자아는 부서진다.




<착지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다음 점프를 향하여>

고양이의 정위반사에는 또 하나 주목할 만한 특성이 있다. 착지 직전, 고양이는 등을 약간 구부리고 다리를 살짝 벌린다. 단순히 충격을 줄이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 자세 자체가 이미 다음 움직임을 위한 준비 자세다. 착지는 완결이 아니라 다음 도약을 위한 출발점이다. 고양이는 착지 후 즉각 그루밍하고, 그루밍 후 다시 이곳저곳을 탐색한다. 착지한 그 자리에 주저앉아 '나는 왜 실패했는가'를 곱씹지 않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잠시 처리하고(그루밍), 곧 다음 관심사로 이동한다. 그다음 점프가 언제 이루어질지, 어디를 향할지는 모른다. 그러나 고양이는 항상 준비되어 있다. 과거의 실패가 몸의 준비 태세를 방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도 이 원리는 적용된다. 회복탄력성이 높은 사람들의 공통적 특징은 '실패에 의미를 과도하게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실패를 인생 전체의 서사로 편입시키지 않는다. 실패는 그냥 실패다. 그리고 다시 시도하는 것은 그냥 다시 시도하는 것이다. 두 사건 사이에 자기 서사를 끼워 넣지 않는 것, 그것이 빠른 회복의 핵심이다. 인간이 이것을 어려워하는 것은 우리가 '의미를 만드는 동물(homo narrans)'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뇌는 사건들을 연결하고 패턴을 찾도록 설계되어 있다. 한 번의 실패를 과거의 다른 실패들과 연결하고, 그것을 미래의 예측으로 확장한다. "나는 항상 이런 식이야", "나는 어차피 이걸 못해", "내가 뭘 해도 이렇게 되더라." 이 자기 서사는 일종의 감옥이다. 스스로 만들고, 스스로 갇히는 감옥.


니체는 '자기 자신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것'을 이야기했다. 자기 한계를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이 하나의 과정이며, 그 과정 전체—실패와 성공, 추락과 착지—를 포함한 것이 '나'임을 받아들이는 과정인 것이다. 특정 실패가 나를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실패를 포함한 전체 여정이 나다. 그렇게 보면 실패는 나의 일부가 되지만, 나를 지배하지는 않는다. 파도가 바다의 일부이지만, 바다 자체가 아닌 것처럼. 착지 후 그루밍하는 고양이는 이 철학을 실천하고 있다. 실패가 일어났다. 나는 그것을 처리했다. 이제 다음이다. 과거는 완결되었고, 현재는 새롭고, 미래는 열려 있다. 이 단순한 시간 감각이 고양이를 언제나 다시 점프하게 만드는 동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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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나는 오늘도 연습한다>

나는 여전히 실수를 한다. 중요한 자리에서, 별것 아닌 순간에,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그리고 나는 여전히 그 실수를 밤새 되새긴다. '왜 그랬을까', '어떻게 했어야 했나', '저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까', '나는 왜 이 모양인가'. 고양이가 아무렇지 않게 그루밍을 시작하는 그 순간을, 나는 여전히 흉내 내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조금씩 배우고 있다. 아모르파티가 '실패를 사랑하라'라고 말할 때, 그것은 실패를 기뻐하라는 뜻이 아니라는 것을. 그것은 실패 앞에서도 자신의 의지를 포기하지 말라는, 그리고 그 실패를 포함한 자신의 여정 전체를 긍정하라는 뜻이라는 것을. 스토아의 평정심이 '감정을 없애라'라고 말할 때, 그것은 돌처럼 냉담해지라는 뜻이 아니라는 것을. 그것은 감정의 파도 속에서도 닻을 잃지 말라는, 통제할 수 없는 것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고 지금 가능한 것에 집중하라는 뜻이라는 것을. 그리고 고양이가 점프에 실패한 뒤 그루밍을 시작할 때, 그것은 '아무것도 없었던 척'이 아니라는 것을. 그것은 '이미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고, 지금 이 순간은 지금 이 순간이다'라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어려운 지혜의 실천이라는 것을.


우아하게 추락하는 법은 추락하지 않는 법이 아니다. 그것은 추락하는 동안 하늘을 보는 법이다. 공중에서 몸을 비틀어 발이 아래를 향하도록 조율하는 법이다. 착지의 충격을 온몸으로 고루 나누는 법이다. 그리고 바닥에 닿는 순간, 그것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의 자세임을 아는 법이다. 고양이는 오늘도 점프한다. 실패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고양이를 멈추지는 않는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연습한다. 실패했을 때 조금 더 빨리, 조금 더 우아하게 착지하는 것을. 추락을 추락으로만 두는 법을. 그리고 착지 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혹은 있었다고 해도 이미 지나간 일이라는 듯이 — 앞발을 들어 귀 뒤를 한 번 핥고, 다음 순간을 향해 걷는 법을. 이것이 고양이가 매일 아침 가르치는, 가장 단순하고 가장 어려운 철학이다. 아모르파티. 운명을 사랑하라. 그 운명 안에는 추락도 있다. 그리고 모든 추락 안에는 착지가 있다. 모든 착지 후에는, 다음 점프를 위한 자세가 있다.




"어떤 것은 우리의 힘 안에 있고,
어떤 것은 우리의 힘 밖에 있다.
이 구분이 지혜의 시작이다."

— 에픽테토스, 『엥케이리디온(Enchirid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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