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되 소유하지 않는다

거리두기 - 무심함의 미학

by 골디오션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하늘의 바람이 너희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허나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허나 사랑에 구속되지는 말라. 함께 서 있으라. 허나 너무 가까이 붙어 있지는 말라

-칼린 지브란(Kahlil Gibran), [예언자] 중-




<질식시키는 사랑의 비극>

사랑한다는 명분 아래, 우리는 얼마나 자주 서로를 가두려 할까? 우리는 사랑하는 대상을 온전히 나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 늘 눈앞에 머물러 주기를, 내가 원할 때 언제든 만날 수 있기를, 그리고 나의 모든 생각과 감정에 기꺼이 동조해 주기를 바라곤 한다. 이것을 우리는 '친밀함'이라는 예쁜 이름으로 포장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실상은 '소유욕'과 '통제하고 싶은 마음'이 투영되어 있을 때가 많다. 관계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비극은 대개 이 지점에서 싹을 틔운다. 너무 가까이 다가간 나머지 서로의 숨통을 조이고, 상대를 내 뜻대로 조종하려다 소중한 마음을 부서뜨리기도 한다. 사랑이 집착으로 변질되는 순간, 그토록 원했던 안식처는 어느새 서로를 옥죄는 지옥이 되고 만다. 아기나 강아지는 이러한 우리의 소유욕을 어느 정도 받아들여 준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혹은 종의 특성상 끊임없는 관심과 밀착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양이는 다르다. 지친 퇴근길, 반가운 마음에 고양이를 와락 껴안으려 한다면 그는 1초도 망설이지 않는다. 뒷발로 당신의 배를 가볍게 밀어내거나 유연하게 몸을 비틀어 품을 빠져나간다.(물론, 기다렸다듯이 인사하고 반기는 고양이도 있다) 그러고는 적당한 거리에서 털을 고르며 고요한 눈빛을 보낸다. 마치 "나의 허락 없이 나의 영역을 침범하지 말아 줘"라고 말하는 듯한 그 단호함 앞에서 우리는 문득 멈춰 서게 된다. 고양이는 우리에게 '우아한 거절'을, 그리고 '건강한 거리두기'를 가르쳐준다. 그들은 집사를 깊이 사랑하고 신뢰하면서도, 자신만의 고유한 공간과 시간을 침해받는 것만큼은 용납하지 않는다. 사랑과 소유가 결코 같은 길을 걷는 것이 아님을 그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나는 너를 좋아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너의 것이 되는 건 아니야"


이 무심한 듯 단호한 태도야말로 우리가 고양이에게 배워야 할 세 번째 철학, 바로 '거리 두기의 미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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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슴도치의 딜레마와 고양이의 우아한 해결법>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인간관계를 '고슴도치의 딜레마'에 비유하곤 했다. 시린 겨울날, 추위를 이기기 위해 서로의 온기가 필요한 고슴도치들은 본능적으로 서로에게 모여든다. 하지만 너무 가까이 밀착하는 순간, 서로의 날카로운 가시에 찔려 고통을 겪고 다시 멀어지기를 반복한다. 우리도 이와 참 많이 닮아 있다. 외로움에 이끌려 타인에게 손을 뻗지만, 관계가 깊어지고 가까워질수록 의도치 않은 상처를 주고받으며 피로감을 느끼곤 한다. 이 풀기 어려운 딜레마 앞에서 고양이는 아주 우아한 해답을 내놓는다. 이른바 '평행놀이(Parallel Play)'의 고수들이다. 당신이 책을 읽거나 컴퓨터 작업에 몰두하고 있을 때, 고양이는 굳이 무릎 위를 차지하려 들지 않는다. 대신 책상 한구석이나 의자 옆 바닥처럼, 손을 뻗으면 닿을 듯 말 듯 한 적당한 거리에 슬그머니 자리를 잡는다. 서로의 존재를 온기로 느끼면서도 각자의 활동을 방해하지 않는 거리. 고양이는 바로 그 틈새에서 가장 깊은 편안함을 느낀다. 우리는 이것을 '무관심'이라 오해하기도 하지만, 사실 고양이식의 깊은 '존중'이다.


"나는 내 시간을 충분히 즐길 테니, 너도 시간을 온전히 누려봐. 우리는 같은 공간에 함께 머무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연결되어 있으니까."


고양이는 침묵으로 이렇게 속삭이는 듯하다. 굳이 몸을 비비거나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침묵 속의 공존만으로 충분한 사랑을 나눌 수 있음을 온몸으로 보여준다. 적막을 견디지 못해 억지로 말을 이어가거나, 불안한 마음에 "나를 사랑하냐?"라고 거듭 확인해야만 안심하는 우리의 서툰 애착과는 차원이 다른 성숙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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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나의 소유가 아닌 ‘고귀한 우주’이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타인의 시선을 통해 나의 자유가 박탈당하는 기분을 느꼈다고 말한다. 누군가 나를 빤히 바라볼 때, 나는 스스로 결정하는 '주체'에서 누군가의 시선에 갇힌 '대상'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슬프게도 우리는 가장 가깝다는 연인 관계에서도 종종 상대를 나를 만족시키기 위한 '대상'으로 여기곤 한다. 나의 외로움을 달래줄 도구로, 혹은 나의 자존감을 채워줄 트로피로 상대를 곁에 두려 하는 마음 말이다. 하지만 고양이는 결코 누군가의 '대상'이 되어주지 않는다. 고양이의 신비로운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본 적이 있나? 그 깊은 눈망울은 때로 인간의 내면을 꿰뚫어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어느 날 벌거벗은 자신을 쳐다보는 고양이의 시선 앞에서 묘한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그 순간 그는 깨달았다. 동물이란 단순히 본능으로 움직이는 기계가 아니라, 나를 응시하고 사유하는 또 다른 '타자'임을 말이다.

고양이는 나를 단순히 '밥을 주는 주인'으로 보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과 동등한 '묘격(猫格)'을 가진 주체로서 우리를 대한다. 우리가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그들이 매번 달려오지 않는 이유는 명확하다. 그들에게는 그들만의 의지가 있고, 자신만의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누군가의 부름에 응답하기 위해 존재하는 부속물이 아니라, 자기 삶의 당당한 주인공이다. 우리는 고양이의 그 '도도함'에 매료되어 사랑에 빠지곤 한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왜 정작 소중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상대의 독립성을 견디지 못할까? 왜 연인이 연락을 조금만 늦게 받아도 서운함이 앞서고, 자녀가 자기만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으면 단절감을 느끼는 걸까? 어쩌면 그것은 상대를 독립된 인격체가 아니라, 나의 세계를 완성해 줄 소유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고양이를 사랑하듯, 우리 곁의 사람들을 사랑해 보는 건 어떨까? 내가 부르면 언제든 오고 가라면 가는 존재가 아니라, 나로서는 결코 다 알 수 없는 '자신만의 세계를 가진 존엄한 우주'임을 인정해 주는 것이다. 상대를 소유하려 하기보다 그저 그 존재 자체를 존중할 때, 우리의 사랑은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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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하지 않는 사랑, 집착의 매듭을 푸는 법>

불교의 오랜 가르침은 우리에게 말한다. 모든 고통의 뿌리는 무언가를 꽉 쥐려는 '집착(Upadana)'에서 시작된다고 말이다.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히 곁에 두려 할 때, 그리고 내 뜻대로 되지 않는 타인의 마음을 내 방식대로 휘두르려 할 때 우리의 마음에는 깊은 생채기가 난다. 사랑이 때로 괴로움이 되는 이유는 그 다정한 이름들 앞에 '내 것'이라는 욕심의 꼬리표를 붙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 남편", "내 아이", "내 친구"라는 말속에 상대를 향한 소유의 의지가 숨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고양이를 곁에 둔 사람들은 안다. 엄밀히 말해 우리는 결코 고양이를 소유할 수 없다는 사실을. 법적으로는 '보호자'라는 이름이 적혀 있을지 몰라도, 심리적으로 고양이는 그 누구의 소유도 아니다. 고양이는 그저 자신의 의지로 이 집에 잠시 '머물러 주는' 고귀한 존재일 뿐이다. 문이 열려 있고 밖이 더 매력적이라면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자유로운 영혼들이다. 고양이를 모시는 집사들은 이 엄연한 사실을 매일 아침 겸허히 배운다. 그래서 고양이가 어느 날 문득 곁에 다가와 나지막한 '골골송'을 들려줄 때, 그것을 당연한 권리가 아니라 세상이 내게 건네는 '기적 같은 선물'로 여긴다. 이 투명한 마음가짐을 인간관계에도 조심스레 옮겨와 본다면 어떨까? 연인이 나를 사랑해 주는 것을 당연한 의무가 아니라, 자유 의지를 가진 한 사람이 수많은 인연 중 나를 선택해 준 기적이라 믿는다면 말이다. 부모가 자식을 나의 분신이나 소유물이 아니라, 잠시 이 세상에 머물다 갈 '귀한 손님'으로 대한다면 어떨까? 그 순간 마음속의 집착은 스르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맑은 감사가 차오를 것이다. 소유하려 들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상대를 온전히 마주할 수 있다. 고양이 집사들이 바라는 유일한 소망이 그저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만 있어 다오"인 것처럼, 사랑의 가장 순수한 본질은 그가 그저 그곳에 존재해 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기뻐하는 마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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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이 빚어내는 다정한 타이밍 (츤데레의 철학)>

고양이는 흔히 '츤데레'라 불리곤 한다. 싫은 척 쓱 지나치다가도 어느새 발치에 머리를 비비고, 무심한 듯 보여도 마음이 헛헛한 순간이면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곁을 내어주곤 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비밀은 바로 '타이밍'이다. 고양이는 내가 원할 때가 아니라, 오로지 '자신이 원할 때' 다가온다. 초보 집사들은 고양이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 조바심을 내며 그 뒤를 쫓아다니곤 한다. 하지만 사랑도, 고양이도 쫓아가면 갈수록 멀어지기 마련이다. 역설적이게도 집사가 자신의 일에 푹 빠져 있을 때, 고양이는 슬그머니 다가와 따뜻한 온기를 나누며 곁을 지킨다. 이것은 관계의 소중한 황금률을 일깨워준다.


"사랑은 애원하며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빛나는 자석이 되어 상대를 자연스럽게 끌어당기는 것"


상대방에게 매달리며 "왜 연락이 없느냐", "나를 좀 봐달라"라고 조를수록 상대는 질식할 것 같은 기분에 뒷걸음질 치게 된다. 반면,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꾸려가며 스스로 빛을 내는 사람에게는 향기로운 꽃에 나비가 모여들 듯 자연스럽게 사람이 머문다. 고양이처럼 혼자서도 즐겁게 시간을 보낼 줄 아는 사람, 자신의 털을 윤기 나게 가꾸는(그루밍) 사람, 고독의 무게를 견디며 홀로 설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결국 타인과도 건강하게 사랑을 나눌 수 있다. 기다림은 결코 힘없이 포기하는 수동적인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상대를 위해 마음 한 편의 빈 공간을 정성스레 비워두는 '적극적인 배려'이다. 고양이가 스스로 마음을 열고 다가올 때까지 묵묵히 지켜봐 주는 마음, 꽃이 제때에 피어날 수 있도록 재촉하지 않는 마음. 그 고요한 기다림의 시간 동안 우리는 비로소 타인을 온전히 품을 수 있는 넉넉한 어른으로 성숙해 간다.


<혼자여도 충분히 따스한, 고독이라는 선물>

우리는 종종 혼자 남겨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혼자 밥을 먹거나 영화를 보는 풍경을 어딘지 모르게 쓸쓸하고 처량한 것으로 여긴다. 우리는 잠시의 공백도 견디지 못한 채 끊임없이 SNS에 접속해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안도감을 확인하려 애쓴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외로움(Loneliness)'이 혼자 있는 고통이라면, '고독(Solitude)'은 혼자 있는 즐거움이라는 사실을. 고양이는 이 고귀한 고독을 즐길 줄 아는 최고의 달인이다. 그들은 하루의 대부분을 혼자 보내면서도 결코 지루해하지 않는다. 창밖의 새를 가만히 관찰하고, 허공에 떠다니는 먼지를 느긋하게 따라다니며, 시간에 따라 이동하는 햇볕의 경로를 따라 가장 따뜻한 곳에서 낮잠을 청한다. 고양이는 혼자 있어도 결핍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스스로 충만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누군가와 건강한 관계를 맺기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바로 이 '혼자 있는 능력'이다. 혼자서도 충분히 행복한 두 사람이 만났을 때, 그 관계는 서로를 갉아먹지 않고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반면, 홀로 서는 것이 두려워 누군가에게 무작정 기대려 하는 관계는 필연적으로 상대를 지치게 만든다. 한 사람이 다른 쪽의 삶의 무게까지 온전히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고양이도 맛있는 사료 캔을 따는 소리에는 누구보다 먼저 달려오지만, 그 외의 시간 동안은 정서적으로 아주 단단히 독립되어 있다. 그래서 고양이가 가끔 보여주는 애정 표현은 더욱 가치 있고 특별하다. 그것은 어떠한 필요에 의한 비굴함이 아니라, 독립된 주체가 건네는 가장 순수하고 투명한 호의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도 고양이처럼 스스로의 고독을 사랑해 보기를 제안한다. 나의 내면이 단단한 뿌리를 내리고 있을 때, 타인과의 거리 두기는 서로를 가로막는 '단절'이 아니라 서로가 기분 좋게 숨 쉴 수 있는 '맑은 창문'이 된다. 내가 먼저 나를 온전히 사랑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타인의 우주를 침범하지 않고도 그 곁에 머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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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꽉 쥔 손을 펼 때 비로소 머무는 것들>

모래를 한 움큼 손에 쥐어본 적이 있나? 꼭 잡으려 힘을 주면 줄수록 모래는 야속하게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하지만 오히려 손바닥을 평평하게 펼쳤을 때, 모래는 그 위에 고스란히 남아 부드러운 촉감을 전해준다. 사랑도 참 이와 많이 닮았다. 내 곁에 묶어두려 통제하고 소유하려 할수록, 사랑은 어느새 저만치 달아나 버리곤 한다. 고양이는 우리에게 그 꽉 쥔 손을 펴는 법을 가르쳐준다. 다가오면 반갑게 맞아주고, 멀어지면 그저 묵묵히 지켜봐 주는 것.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서 조바심 내거나 화내지 않는 것.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며 평행선 위를 함께 걷는 것. 이것이야말로 고양이가 몸소 보여주는, 세상에서 가장 쿨하고도 다정한 사랑법이다. 시인 칼릴 지브란은 이렇게 노래했다.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라고 말이다. 거문고 줄이 서로 따로 떨어져 있어야 비로소 아름다운 선율을 연주할 수 있듯이, 너무 밀착된 관계는 오히려 소리를 낼 수 없게 만든다. 당신과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도, 하늘의 바람이 춤출 수 있는 넉넉한 공간을 허락해 주자.

오늘 밤, 당신의 고양이가 저 멀리 떨어져 앉아 당신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다면, 마음 한구석을 서운함으로 채우는 대신 이렇게 나지막이 읊조려 보자.


"아, 우리는 지금 가장 완벽한 거리에서 서로를 사랑하고 있구나."


그리고 당신도 고양이처럼, 당신만의 고유한 세계에 깊이 몰입해 보자. 그러면 언젠가 예기치 못한 순간, 그 부드러운 털 뭉치가 당신 곁으로 다가와 말없이 온기를 나눠줄 것이다. 그때 당신이 느끼는 온기는 서로를 옥죄는 구속이 아니라, 가장 자유로운 영혼들이 나누는 '기적 같은 선물'일 것이다.



고양이는 절대적인 정직함을 가지도 있다. 인간은 감정을 숨기기 위해 노력하지만 고양이는 그렇지 않다.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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