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의 수용, 고양이에게 배우는 철학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살아있을 때 죽음은 오지 않았고,
죽음이 왔을 때 우리는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 에피쿠로스(Epicurus)
사료그릇에 가득 찬 사료가 그대로 놓여 있다. 늘 눕던 햇살 자리에 아무도 없다. 집 안 구석구석을 뒤졌지만 녀석은 보이지 않았다. 며칠 전부터 눈의 초점이 흐릿해지고, 그루밍을 멈추고, 밥을 거의 먹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챘지만 설마 했다. 그러다 그날 아침, 녀석은 그냥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이,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나중에 이웃집 울타리 아래 깊숙한 곳에서 녀석을 발견했다. 눈을 감은 채 웅크려 있었다. 고요했다. 잠든 것처럼, 아주 편안하게. 고양이는 왜 혼자 그곳으로 갔을까. 왜 자신의 마지막을 그토록 조용하고 담담하게 받아들였을까. 왜 그것이 인간의 마지막과 이토록 다를까. 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슬프기도 했고, 이상하게도 숙연하기도 했다. 무언가 엄청나게 오래된 진실을 목격한 것 같은 느낌. 그 진실을 인간은 수천 년 동안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되찾으려 했지만, 고양이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죽음을 향해 조용히 걸어가는 법. 이 에세이는 그 마지막 걸음에 대한 이야기다.
고양이는 자신의 죽음을 알지 못한다. 동물학자 데즈먼드 모리스(Desmond Morris)에 따르면 고양이는 죽음을 개념적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인간처럼 '나는 곧 죽을 것이다'라는 명제를 인식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고양이는 왜 죽음이 임박했을 때 숨는가. 본능이다. 본능으로 포장되지만 그 본능의 구조는 단순하지 않다. 고양이가 몸이 쇠약해지고 고통이 커지면 야생의 기억이 깨어난다. 아프고 약한 존재는 포식자의 먹잇감이 된다. 그러므로 고양이의 신경계는 신체적 약점을 감지하는 순간, 몸을 숨기는 방향으로 반응한다. 몸이 나아질 때까지 안전한 곳에서 회복을 기다리려는 것이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 기다림은 죽음으로 이어진다. 나는 이 설명을 읽으면서 묘한 감동을 받았다. 고양이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것이다. 그 두 가지는 다르다.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요란하게 저항하고, 부정하고, 도전한다. 고양이는 그냥 아프지 않으려고 조용히 숨는다. 그리고 그 조용한 숨음의 끝에서, 자연스럽게 소멸한다. 어쩌면 고양이의 죽음이 그토록 평화로워 보이는 것은 죽음을 향해 저항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소란을 피우지 않는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다. 자신의 마지막이 어떻게 기억될지 걱정하지 않는다. 오직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몸이 보내는 신호에 충실하게 반응할 뿐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숨 쉬는 것을 멈춘다.
이것이 인간에게 없는 무언가다. 아니, 정확히는 인간이 잃어버린 무언가다. 우리는 죽음을 너무 많이 생각하기 때문에, 오히려 죽음을 자연스럽게 맞이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철학자들이 수천 년 동안 씨름해 온 것이 바로 이것이다. 어떻게 하면 죽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마지막 순간을 고요하게 맞이할 수 있는가. 고양이는 이 질문에 답을 쓰지 않는다. 그냥 산다. 그리고 그냥 사라진다. 죽음을 앞둔 고양이가 때로는 보호자 곁으로 다가와 평소와 다르게 응석을 부리기도 한다. 온기를 나누려는 것인지, 이별을 고하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어떤 고양이는 마지막 순간까지 평소와 다름없이 행동하다가 갑작스럽게 떠난다. 드라마도 없고, 선언도 없고, 유언도 없다. 그냥, 거기 있다가, 거기서 사라진다. 이 담백함이, 군더더기 없는 소멸이, 나는 이상하게도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1927년, 그의 주저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에서 인간의 존재 방식을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분석했다. 그의 핵심 통찰 중 하나는 이것이다. 인간(그가 '다자인(Dasein)'이라고 부르는, 존재 이해 능력을 가진 존재)은 본질적으로 '죽음을 향한 존재(Sein-zum-Tode)'이다. 이 명제는 처음 들으면 우울하게 들린다. 인간의 본질이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니. 그러나 하이데거의 의도는 반대다. 그는 죽음을 삶의 적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죽음의 인식이야말로 진정으로 살아있는 삶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라고 본다. 하이데거에게 죽음은 언젠가 찾아올 사건이 아니라, 현재의 모든 순간에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죽음은 '가장 고유하고(ownmost), 가장 극단적이며, 다른 가능성에 의해 능가될 수 없고, 가장 확실한 가능성'이다. 우리는 아직 죽지 않았지만, 언제라도 죽을 수 있다. 이 가능성이 항상 거기 있다는 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하이데거는 이것을 '죽음으로의 선구(Vorlaufen zum Tode)'라고 불렀다. '앞질러 달려가다, 먼저 가보다'는 의미다. 죽음이라는 가장 확실한 미래를 미리 직면함으로써, 지금 이 순간의 존재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선명하게 보는 것이다. 죽음이 모든 것을 가져갈 것임을 알기에,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가 극적으로 중요해진다.
죽음 '가장 고유하고(ownmost),
가장 극단적이며,
다른 가능성에 의해 능가될 수 없고,
가장 확실한 가능성
하이데거는 우리 대부분이 '비본래적(inauthentic)' 방식으로 살아간다고 말한다. '세인(das Man)'—'사람들은 이렇게 한다', '다들 이렇게 생각한다'—에 묻혀서, 자신의 고유한 가능성을 추구하지 않는 삶. 남들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남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며, 자신이 실제로 무엇을 원하는지 한 번도 진지하게 물어보지 않는 삶. 죽음의 인식은 이 비본래적 삶의 마취에서 깨어나게 하는 충격이다. 죽음 앞에서 '다들'은 아무 의미가 없다. 죽음 앞에서 나는 철저하게 혼자다. 그리고 그 홀로임(Jemeinigkeit, 매번 자신의 것임) 속에서, 비로소 진짜 나의 삶이 시작된다. 이것은 단순한 생각 실험이 아니다. 실제로 심각한 병 진단을 받은 사람들이 종종 보고하는 경험이 있다. 삶이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 전에는 스트레스의 원인이었던 것들이 갑자기 사소해 보이고, 전에는 당연히 여겼던 것들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아침 햇살, 커피 한 잔의 온기, 누군가의 웃음소리. 유한성의 인식이 현재를 선명하게 만드는 것이다. 스티브 잡스는 스탠퍼드 졸업식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중요한 무언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없애주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발가벗겨진 상태입니다. 그러니 당신의 가슴이 시키는 대로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잡스는 하이데거를 읽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췌장암 진단 이후 그가 경험한 것은 하이데거가 철학적으로 기술한 그것이었다. 죽음의 인식이 삶의 진정성을 열어준다.
고양이로 돌아가 생각해 보자. 고양이는 자신의 죽음을 개념적으로 인식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고양이는 하이데거적 자유를 경험하지 못하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고양이는 개념적으로 죽음을 인식하지 못하지만, 대신 매 순간을 마치 처음인 것처럼 산다. 과거의 불안도, 미래의 공포도 없이, 지금 이 순간에 완전히 존재 한다. 이것은 어쩌면 하이데거가 말하는 본래적 실존과 같은 귀결에 도달하는, 다른 경로다. 죽음을 미리 가봄으로써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의 방식과, 죽음을 모르기에 현재를 살아가는 고양이의 방식. 두 길이 같은 목적지에서 만난다.
기원전 약 350년, 중국 전국시대. 장주(莊周)의 아내가 죽었다. 장자(莊子)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철학자는 아내의 시신 앞에서 울지 않았다. 대신 다리를 쭉 뻗고 앉아 질그릇을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혜시(惠施)가 달려와 따져 물었다. "당신과 함께 살고, 자식을 낳고, 같이 늙어온 사람이오. 죽었을 때 울지 않는 것만도 지나친데, 오히려 질그릇을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다니, 이건 너무하지 않소?"
장자가 대답했다."아내가 죽은 당초에는 나라고 어찌 슬퍼하는 마음이 없었겠소. 그러나 근원을 살펴보면 본래 삶이란 없었던 것이오. 그저 삶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본래 형체도 없었고, 형체가 없었을 뿐 아니라 본래 기운도 없었소. 혼연 한 사이에 섞여 있다가 변하여 기운이 생기고, 기운이 변하여 형체가 생기고, 형체가 변하여 삶이 생겼소. 지금 또 변하여 죽음으로 간 것이니, 이는 봄여름가을겨울의 사계절이 운행하는 것과 같은 것이오. 지금 그 사람은 크고 넓은 대자연 속에 편안하게 누워 있는데, 내가 소리 내어 울고 슬퍼한다면 스스로 운명을 모른다고 생각했소. 그래서 울음을 그친 것이오." 이것은 냉담함이 아니다. 가장 깊은 차원의 슬픔을 통과한 자리에서 도달한 이해다. 아내의 죽음 앞에서 처음에는 분명히 슬펐다고 했다. 그러나 그 슬픔 아래를 파고들어, 죽음이라는 사건의 근원에 이르렀을 때, 그것이 자연의 변화임을 보았다. 장자에게 죽음은 소멸이 아니다. 그것은 변화다. 기(氣)가 모여 형체가 되고, 형체가 살아 움직이다가, 다시 기로 흩어지는 것. 봄이 여름이 되고, 여름이 가을이 되고, 가을이 겨울이 되듯이. 그 어느 계절도 다른 계절보다 더 '진짜'가 아니고, 그 어느 계절의 끝도 슬픔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흐름의 한 과정이다. 장자는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도 같은 태도를 견지했다. 제자들이 스승의 죽음 이후 정중한 장례를 치르겠다고 하자, 장자는 말했다."태양과 대지가 나의 관이다."들판에 그냥 두라는 뜻이었다. 제자들이 그렇게 하면 까마귀와 독수리의 먹이가 될 것이라고 하자, 장자는 웃으며 말했다. "땅에 묻으면 개미의 먹이가 되고, 들에 두면 새들의 먹이가 되니, 어찌하여 개미에게서 빼앗아 새에게 주려 하느냐." 이 이야기에서 나는 웃음과 경외감을 동시에 느낀다. 죽음 앞에서 이토록 유머러스할 수 있다는 것. 이토록 가벼울 수 있다는 것. 장자의 가벼움은 삶에 대한 무관심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삶과 죽음 모두를 자연의 일부로 철저하게 이해했기 때문에 가능한 가벼움이다. 무거운 것을 알면서도 가볍게 들 수 있는 사람처럼.
장자의 '자연 회귀' 사상은 노자(老子)의 도(道) 사상과 맞닿아 있다. 도는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이며, 만물이 거기서 나오고 거기로 돌아가는 것이다. 삶은 도로부터 잠시 빌려온 것이고, 죽음은 빌린 것을 돌려주는 것이다. 빌린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돌려줄 때 슬퍼할 이유가 없다. 그것은 단지 올바른 돌려줌이다. 고양이가 조용히 숨어 사라지는 것, 장자의 이 이야기. 둘 다 요란하지 않다. 죽음을 특별히 '사건'으로 만들지 않는다. 고양이는 자신의 마지막을 자연의 한 부분으로 치르고, 장자는 아내의 마지막을 자연의 한 부분으로 노래한다. 형식은 다르지만, 그 근저에 있는 것은 같다. 소멸을 소멸로 받아들이는 것. 죽음을 죽음으로 두는 것.
나비 꿈 이야기도 있다. 장자는 꿈에서 나비가 되었다. 나비로서 훨훨 날며 자유로웠고, 장주임을 전혀 알지 못했다. 깨어나보니 장주였다. 그런데 그는 묻는다. 내가 나비의 꿈을 꾼 것인가, 나비가 지금 나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삶과 죽음도 이와 같지 않을까. 살아있음이 꿈이고 죽음이 깨어남인지, 죽음이 꿈이고 살아있음이 깨어남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꿈속에서 꿈이 끝날까 봐 두려워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Epicurus)는 죽음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논리를 남겼다.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살아있을 때 죽음은 아직 오지 않았고, 죽음이 왔을 때 우리는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문장은 너무 단순해서 처음 들으면 하나의 말장난처럼 들린다. 곱씹을수록 그 안에 담긴 해방의 논리가 선명해진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 이후에도 무언가를 느끼는 '나'가 있다고 전제하기 때문이다. 무섭고, 어둡고, 차갑고, 외롭다. 에피쿠로스는 말한다. 죽음이 오는 순간 모든 감각과 의식은 끝난다. 거기에 고통을 느낄 주체가 없다. 고통을 느낄 '나'가 없는데, 죽음이 어떻게 고통스러울 수 있는가.
"이 행복한 날에 나는 죽어가고 있습니다.
나의 몸은 심한 고통을 겪고 있지만,
철학적 대화에 대한 기억으로 가득 찬
영혼의 기쁨이 이 모든 것을 보상합니다."
에피쿠로스는 루크레티우스(Lucretius)를 통해 이어진 또 하나의 논증을 제시한다. '대칭 논증'이라 불리는 것이다. 당신은 태어나기 전의 시간을 두려워하는가? 당신이 존재하지 않았던 수십억 년의 시간이 끔찍한가? 그렇지 않다. 시간은 당신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 죽음 이후의 시간도 마찬가지다. 당신이 존재하지 않을 무한의 시간은, 태어나기 전의 무한한 시간과 정확히 같다. 그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태어나기 전의 나를 두려워하는 것만큼이나 논리적으로 이상한 일이다. 이 논증은 완벽하지 않다. 철학자들은 수천 년 동안 에피쿠로스의 이 주장에 반론을 제기해 왔다. 죽음이 고통스러운 것은 죽은 이후의 상태 때문이 아니라, 죽음 이전의 상실 때문이라고.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 아직 이루지 못한 꿈들, 더 이상 경험하지 못할 아침 햇살들. 그 박탈이 슬프다고. 에피쿠로스의 논리는 죽음 이후를 설명할 뿐, 죽음 이전의 두려움에는 충분히 답하지 못한다는 비판이다. 에피쿠로스가 전달하려 했던 것은 아마도 이론적 완결성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태도의 전환이었다. 죽음을 두려워하느라 삶을 낭비하지 말라는 것. 죽음이 두렵기 때문에 삶에 집착하고, 삶에 집착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잃을까 봐 조마조마하며 살아가는 그 악순환에서 벗어나라는 것. 죽음이 두렵지 않다면, 지금 이 순간을 훨씬 더 충만하게 살 수 있다. 에피쿠로스 본인의 삶이 이것을 증명한다. 그는 아테네 외곽의 소박한 정원에서 친구들과 함께 살았다. 값비싼 것을 추구하지 않았다. 치즈 한 조각, 물 한 모금, 좋은 대화,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했다. 그는 위장병을 앓으며 고통스럽게 죽었지만, 마지막 편지에 이렇게 썼다."이 행복한 날에 나는 죽어가고 있습니다. 나의 몸은 심한 고통을 겪고 있지만, 철학적 대화에 대한 기억으로 가득 찬 영혼의 기쁨이 이 모든 것을 보상합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다면, 삶의 마지막 순간조차 기쁘게 맞이할 수 있다. 이것이 에피쿠로스가 남긴 해방이다.
죽음의 문제를 철학적으로 탐구할 때, 우리는 결국 하나의 역설에 도달한다. 유한함이 자유를 만든다는 것. 끝이 없다면 시작이 의미 없듯이, 죽음이 없다면 삶이 의미 없다. 만약 인간이 영원히 산다면 어떨까. 하고 싶은 것을 언제든 할 수 있으니, 지금 당장 하지 않아도 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오늘 고마움을 표현하지 않아도 된다. 나중에, 훨씬 나중에, 영원 중 어느 날에 할 수 있으니. 이 영원한 미룸 속에서 모든 것은 중요하지 않아 진다. 오늘이 특별한 것은, 오늘이 반드시 지나가기 때문이다. 이 순간이 소중한 것은, 이 순간이 다시 오지 않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이것을 '시간성(Zeitlichkeit)'의 문제로 다루었다. 인간의 시간은 선형적이고 유한하다. 과거는 돌아오지 않고, 미래는 언제나 제한되어 있다. 바로 이 유한한 시간성이 '현재 순간(Augenblick, 눈 깜짝할 순간)'을 결정적인 것으로 만든다. 인간은 죽음이라는 가장 확실한 미래를 인식함으로써,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 수 있다. 죽음의 그림자가 지금을 밝힌다.
유한함이 자유를 만든다는 것.
끝이 없다면 시작이 의미 없듯이,
죽음이 없다면 삶이 의미 없다.
실존주의 심리학자 어빈 얄롬(Irvin Yalom)은 수십 년의 임상 경험에서 이것을 반복적으로 목격했다. 말기 암 진단을 받은 환자들이 종종 삶이 더 충만해졌다고 말한다는 것. 이전에는 의미 없이 보냈던 시간들이 갑자기 소중해지고, 오래 미뤄둔 화해를 하고, 하고 싶었지만 두려워서 못 했던 것들을 한다. 얄롬은 이것을 '각성 경험(awakening experience)'이라 불렀다. 죽음의 인식이 일으키는 실존적 각성. 제한이 해방을 낳는 역설.
이 역설은 동양 철학에서도 반복된다. 불교의 '무상(無常, impermanence)'은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하고 사라진다는 사실을 핵심 명제로 삼는다. 이 무상함은 처음에는 슬프게 들리지만, 그 안에는 해방이 숨어 있다. 모든 것이 사라지기 때문에, 모든 것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다.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진정으로 살 수 있다. 장자의 나비 꿈에서 나비는 나비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인간도 아니고, 나비가 될 것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그냥 지금 이 순간, 자신이 날고 있다는 것을 완전하게 살뿐이다. 고양이가 지금 이 순간 햇살을 즐길 때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언젠가 끝날 것이라는 사실이 고양이를 무겁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순간 고양이는 햇살 그 자체다. 완전히 그 안에 있다. 유한성을 인식하되 그것에 압도되지 않는 것, 죽음을 알되 그것에 붙들리지 않는 것, 이것이 고양이와 철학자들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도달한 같은 지점이다.
고양이의 마지막에는 한 가지 더 깊이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 고양이가 자신의 소멸에 있어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본능을 보인다는 점이다. 물론 고양이는 그런 윤리적 의도를 갖지 않는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고양이의 마지막은 가장 조용하고, 가장 최소한의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큰 소동을 만들지 않는다. 주변에 부담을 주지 않는다. 그냥 홀로 어딘가로 가서, 홀로 마친다. 인간의 죽음을 돌아보면 얼마나 다른가. 인간의 죽음은 종종 엄청난 의례와 감정과 비용과 갈등을 수반한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은 죽음마저 사회적 행위로 만든다. 어떻게 기억될까, 누가 울어줄까, 무엇을 남길까. 이 모든 것이 죽음을 복잡하게 만든다. 물론 인간의 죽음이 사회적일 수밖에 없는 데는 이유가 있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살았고, 그 관계 속에서 의미를 만들었다. 관계는 이별을 요구하고, 이별은 의례를 요구한다. 그것은 남은 자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고양이의 그 조용한 사라짐에서 다른 종류의 아름다움을 본다. 자신의 소멸에 대해 요란하게 주장하지 않는 것. 죽음을 자신의 것으로, 가장 사적이고 조용한 것으로 치르는 것.
하이데거는 죽음을 '가장 고유한(ownmost)' 가능성이라고 했다. 대리될 수 없고, 나만 죽을 수 있고, 남이 대신 죽어줄 수 없다. 죽음은 인간 존재의 가장 근본적인 '나만의 것'이다. 가장 나만의 것을, 고양이는 실제로 가장 조용하게, 가장 자기 방식으로 치른다. 누구에게 허락을 구하지 않고, 누구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그냥 자신만의 마지막으로 소멸한다. 장자는 제자들에게 장례를 치르지 말라고 했다. 그의 마지막은 천지(天地)가 관이 될 것이라 했다. 에피쿠로스는 고통 속에서도 철학적 대화의 기쁨을 말하며 떠났다. 자신의 죽음을 자신의 방식으로 맞이했다. 사회적 기대에 항복하지 않고, 자신이 평생 믿었던 것과 일치하는 방식으로. 이것이 삶과 죽음의 일관성이다. 어쩌면 아름다운 죽음이란 화려한 것이 아니다. 자신이 살아왔던 방식과 일치하는 죽음이다. 현재 속에 완전히 있었던 자의 죽음은 자연스럽다. 억지로 무언가가 되려 하지 않았던 자의 죽음은 가볍다. 고양이가 조용히 사라지는 것처럼, 가장 자기 다운 방식으로 마치는 것.
'죽음조차 잠처럼', 고대 그리스인들은 잠(Hypnos)과 죽음(Thanatos)을 형제신으로 표현했다. 둘은 쌍둥이였다. 밤마다 우리는 잠들며 의식을 내려놓는다. 내일 깨어날 것임을 알면서도, 잠드는 순간의 의식 소멸은 완전하다. 꿈을 꾸지 않는 깊은 잠 속에서, 나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다. 그 소멸은 무섭지 않다. 오히려 달콤하다. 피로가 쌓인 몸이 그 소멸을 원한다. 에피쿠로스가 말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 아닐까. 죽음은 영원한 잠이다. 더 이상 꾸지 않는 잠. 피로하고 상처받은 모든 것이 내려놓아지는 잠. 그것이 두렵다고? 당신은 매일 밤 그 잠의 작은 형태를 경험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매일 아침 그것이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일어난다.
하이데거는 죽음을 '가능성의 불가능성'이라 불렀다. 죽음 이후에는 어떤 가능성도 없다. 그것이 죽음의 절대성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절대적 가능성의 소멸이, 현재의 가능성들을 무한히 소중하게 만든다.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현재는 선택을 요구하고, 선택이 가능하기 때문에 삶은 의미를 가진다. 죽음이 없다면 선택도 없고, 선택이 없다면 의미도 없다. 장자는 계절의 변화로 죽음을 설명했다. 겨울은 봄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다. 겨울은 봄을 위한 쉼이다. 씨앗은 차가운 땅 속에서 침묵한다. 그 침묵이 다음 봄을 준비한다. 죽음도 이와 같을지 모른다. 기(氣)가 흩어지고, 그 흩어진 기가 다시 모여 다른 형태가 된다. 장자는 그것을 '물화(物化)', 즉 사물의 변화라 했다. 나비가 장주가 되고 장주가 나비가 되듯이, 죽음은 변화의 한 과정이다. 죽음을 있는 그대로 두는 것. 죽음을 삶의 반대편이 아니라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 그리하여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삶을 잠식하지 않도록 하는 것. 고양이는 이것을 이론 없이 실천한다. 언젠가 사라질 것을 알지 못하면서, 완전히 지금 이 순간 살아 있다. 그리고 사라질 때는 가장 조용하게, 가장 자연스럽게, 마치 잠드는 것처럼 사라진다. 어떤 저항도, 어떤 소란도, 어떤 후회도 없이.
"죽음에 이르는 선구는
자기에서 벗어나는 길이며,
본래적 자기를 찾는 방법이다."
—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존재와 시간』
소크라테스는 철학을 '죽음의 연습'이라 했다. 죽음이 육체로부터 영혼이 분리되는 것이라면, 철학은 살아있는 동안 욕망과 두려움으로부터 정신을 분리하는 연습이다. 하이데거의 선구도 이와 비슷하다. 아직 죽지 않았지만 미리 죽음으로 달려가보는 것. 그 선구 안에서 지금의 삶이 어떻게 보이는지를 바라보는 것. 오늘 아침, 창가에서 햇살을 받으며 눈을 가늘게 뜨는 고양이를 바라보았다. 녀석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지금 이 햇살 말고는. 이 온기 말고는. 이 순간 말고는. 가장 완전한 죽음의 연습처럼 보였다. 이미 지나간 것에 매달리지 않고, 아직 오지 않은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 완전히 있는 것. 그 완전한 현재 속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것. 지금 충분히 살아있으면 죽음이 왔을 때 그것은 단지 다른 종류의 충분함이 될 것이다. 장자는 아내의 죽음 앞에서 노래했다. 에피쿠로스는 고통 속에서 기쁨을 말했다. 하이데거는 죽음 앞에서 진정한 나를 찾으라 했다. 그리고 고양이는 아무 말 없이 햇살 속에서 눈을 감는다. 죽음조차 잠처럼. 그 잠이 달콤하려면, 오늘을 충분히 깨어있어야 한다. 오늘을 충분히 느껴야 한다. 오늘을 충분히 사랑해야 한다. 그러면 사라지는 순간, 우리는 아마 고양이처럼 자연스럽게, 아무런 저항도 없이, 그냥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잠처럼.
가장 편안하게.
"지금 또 변하여 죽음으로 간 것이니,
이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 운행하는 것과 같은 것이오."
장자(莊子), 아내의 죽음 앞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