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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야 Jan 29. 2024

내일은 바로 너다

우동을 먹기 위해서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땡글땡글한 햇볕이 얼굴이며, 손등이며 목덜미까지 새까맣게 태우는 낮이다.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주륵 흐르지만, 곧 선선한 바람이 뽀송하게 말려준다. 해가 땅거미 속으로 사라지면 춥다 소리가 절로 날만큼 서늘한 바람이 분다. 그저께까지는 분명 에어컨을 약하게 나마 켜 놓았는데 오늘은 그럴 수가 없다. 발 끝에 닿는 바람살에 발가락이 오그라든다. 팔을 연신 손바닥으로 문지르면서도 긴 팔 옷을 꺼네 입진 않는다. 찹찹해지는 그 감각이 좋다.


불 꺼진 학원을 뒤로 하고 차에 올라타 창문을 내린다. 아파트촌 상가들 어디에선가 이 찹찹함에 어울리는 익숙한 냄새가 풍겨온다. 이게 무슨 냄새더라? 시원찮게 먹은 저녁 탓에 허기가 급하게 몰려온다. 뜨끈한 국물인데, 냄새만으로도 속이 확 풀리는 느낌이다. 먹어서 속이 풀리는 느낌의 국물 요리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데친 오징어 숭덩숭덩 썰어 넣고, 수란에 김가루까지 올린 전주식 콩나물 국밥.

양지살 얇게 썰어 올리고, 생숙주를 면 아래 숨겨서 아삭한 쌀국수.

멸치랑 디포리 우려낸 국물에 새콤한 김치 고명 올려서 따끈한 잔치 국수.

소고기, 깻잎, 알배추 켜켜이 쌓아 채소 육수에 끊인 밀푀유나베.


하나 하나 모두 당장 한 그릇씩 먹을 수 있을만큼 배가 고팠지만, 좀 전에 스친 그 냄새는 아니다. 소고기, 멸치, 채소 육수들이 아니다. 좀 더 가볍고 간단한 육수인데… 약간 달큰한 맛이 있어야하고, 후루룩! 머리 속에 등장한 이 단어가 반가웠다.


“후루룩.”


이 음식을 먹을 때 이 소리가 나지 않을 수 없다. 우동. 그 시원하고 얼큰, 달큰한 냄새는 우동이었다. 주차장 길 건너의 일본식 선술집에서 흘러나오던 냄새였다. 고프다 못해 시린 창자를 뜨뜻한 국물로 달래고 싶었다. 차는 이미 지하 주차장이다. 아홉시가 가까운 시간 아이를 어르고 달래 다시 나가기는 어렵다. 가을밤의 서늘한 공기가 우동, 우동 울부짖었지만, 오늘은 글렀다. 내일을 기대해 본다.




나는 면음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국수를 너무 많이 사랑한 아버지를 둔 덕에 여름방학 점심 한 끼는 언제나 국수였다. 멸치 육수에 길게 자른 어묵과 양파가 들어 있었다. 간장과 고춧가루, 마늘 등이 사용된 양념장에 씻은 김치 무침이 올라간 아빠표 국수였다. 부모님과 함께 살던 시절 돈을 주고 국수를 사 먹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었다.

결혼 후 우리집엔 라면이 떨어지진 않았지만 그만큼 버려져 나가는 것도 많았다. 신랑이 좋아하니 항상 구비되어는 있으나 내가 좋아하지 않으니 손은 가지 않는, 유통기한 한 두 달 넘기는 것은 일상이었다. 그나마 주는 대로 먹는 면요리는 짜장면 정도일까?



오늘 점심은 우동이다. 찬바람 부는 저녁의 우동과는 다르겠지만, 어제의 그 간절함을 이길 수 없다. 아침부터 단단히 마음을 먹고 나온 터라 아이를 등원시키고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점심 때까지 여기저기 배회하며 버티다가 점심시간 시작과 함께 우동가게로 달려 갈 것이다. 굵어서 더 탱탱한 면발에 쫄깃한 식감의 유부가 잔뜩 올라간 그것을 먹을 것이다. 쑥갓은 반드시 싱싱해야 한다.



위의 말은 고쳐야겠다. 나는 면음식을 좋아한다. 퇴근길에 생각난 우동을 먹기 위해 밤부터 아침까지 시간을 계획하고 동선을 체크했다. 그리고 거기에 맞춰 움직인다. 이것만 봐도 예사 마음은 아니다. 다만 누들홀릭, 아니 누들크레이지들과 함께 살아서 나의 취향을 확인할 방법이 없었을 뿐이다.



배회하다 들어 온 도서관이다. 이제 슬 짐을 챙겨서 나가야겠다. 점심시간이 되면 회사 식당에 싫증난 직장인들이 한꺼번에 몰려 나와 복잡해진다. 나는 복잡해지기 전에 먼저 나가 여유롭게 유부우동을 먹고 집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런/데/


햇살이 점점 뜨거워지고 있다. 이마에 송글 땀이 맺힌다.

오늘 점심... 우동... 괜찮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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