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829
그녀가 두렵다. 그저 꺼려진다라고 생각했는데 그 꺼려짐 바닥에 있는 감정이 두려움인 걸 깨달은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녀가 나를 대하는 태도는 누구에 비추어도 담백하고, 상냥하지만 나는 그녀가 내 근처에 있으면 움찔하고 만다. 시원하게 큰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 조금 긴 커트머리가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주관적으로나 객관적으로도 그녀는 위협적이거나 강압적인 구석은 한 군데도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반응을 하는 거지? 옆자리에 앉은 그녀를 힐끗 보며 생각해 봐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또 잔뜩 긴장한 채 하루를 보냈다.
“지혜, 안녕.”
“어, 안녕. 어젠 잘 들어갔나?”
“응 이거 선물.”
누구나 알만한 로고가 찍힌 종이카드를 내밀었다.
“뭔데?”
“어제 화장품 사러 갔는데 주길래. 너는 향수 안 쓰잖아. 나는 이거 쓰거든.”
가방에서 작은 병을 꺼내 보여준다. 익숙한 모양의 사각병. 샤넬 향수이다. 잉? “익숙한”? 이라니 내가 샤넬과 익숙할 일이 뭐가 있지? 받아 든 샘플 향수의 향을 맡아본다. 화이트머스크 향이 짙다. 역시 익숙하다.
“향수를 가지고 다니면서 뿌리나?”
“응, 유학 때 습관인데 이젠 안 쓰면 허전하다.”
“오~ 유학~.”
“그냥 막 놀았다. 중국에선 냄새 때문에 좀 힘들었거든.”
“아~! 그래서~.”
평범한 대화는 가능하지만 마음속에 불편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익숙하다는 것이 자꾸 마음에 걸린다. 복도에서도 수업 중에도 마음이 그리로 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뒷문이 드르륵 소리를 내며 열렸다.
뒷문이 드르륵 소리를 내며 열렸다. 몇 명의 아이들의 고개가 저절로 뒤로 돌아갔다. 곧이어 짝짝. 등짝을 내려치는 소리가 교실에 울렸다.
“내가 돌아보지 말라고 말했제? 사람 말을 못 알아들으면 그게 사람이가? 우리 집 줄자도 니보단 낫다.”
낮지만 신경질적인 담임의 목소리가 들렸다. 열네 살. 나의 중학교 2학년 담임은 재단에서도 악명 높은 노처녀 미술 선생님. 호리호리한 체격과 달리 손이 맵단다. 그녀가 이제 막 한 반이 된 45명의 아이들에게 제일 처음 요구한 것은
“내가 들어오든 나가든 쳐다보지 마. 무슨 소리가 나도 돌아보지 마. 그 정도 집중도 못하면 사람이 아니지.”
였다. 그것을 시작으로 지켜야 할 규칙들을 알려주었다. 그것을 지키지 못할 시에 가해질 체벌의 수위까지. 반 묶음 해서 앞으로 흘러내리지 않는 단발머리에 두꺼운 검은 테 안경. 그 아래 부라린 눈이 무서웠다. 신경질과 등짝 내려치기, 공포감을 조성하는 단어의 선택과 낮은 목소리. 그리고 항상 풍기는 낯선 향. 이들의 조합에 석조 건물에서 풍기는 차가움까지 더해져 학교생활은 그대로 공포였다.
다음날까지 갈 것도 없이 2학년 첫날 오후부터 찰싹찰싹하는 소리가 교실을 채웠다. 소리가 나면 반사적으로 움직이지만, 그걸 참아야 한다는 생각에 자습시간은 언제나 뒤통수부터 긴장하고 있어야 했다. 맞고 싶지 않았고 맞는 소리를 듣고 싶지도 않았다. 7-80년대도 아니지만 우리 반 아이들의 머리는 귀 끝에 댕강한 단발머리에 한쪽으로 탄 가르마 그 반대쪽에 검은 똑딱핀. 모두가 다 똑같은 머리를 하고 똑같은 옷을 입고 앉아서 그 공포감을 같이 견디고 있었다. 선생님들의 평가는 달랐던 모양이지만 말이다. 체벌과 훈계를 가장한 폭력이 난무하던 곳, 그곳이 나의 학교였다. 학교생활이 길어지면서 공포와 폭력은 적응되었고, 그 속에서 순응하며 편안함을 찾았다.
그 향이 샤넬이었다. 내가 선물 받은 향과 같은, 공포와 함께했던 선생님의 향기였다. 그녀가 꺼름직했던 이유도 같았다.
“샤넬 No.5”
이유를 알고는 그녀에게 두려움을 느끼진 않는다. 여전히 샤넬 매장 앞은 피해 다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