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달 없는 날
어젠 정말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멋진 하루, 꽉 차고 알차고 운 좋은 하루를 보냈다. 너무 피곤해서 글로 기록하지 못했다. 어제의 여파였을까?
오늘은 full moon을 찾아 헤매느라 헛수고한, 그야말로 헛발질 정점의 날이다.
딱히 발리에서 뭘 하겠다는 계획은 없었지만, 언제 보름달이 뜨는지는 한국에서부터 확인했다. 그건 2월 24일이었다. 발리에서는 보름달이 뜨는 날 특별한 의식을 한다고 들었다. 이렇게 운이 좋다니. 그냥 막연히 풀문 세리머니를 두 눈으로 꼭 보고 싶었다. 그리고 당연히 볼 수 있을 줄 알았다.
생각해 보면 한국에서부터 열심히 구글링 해봤지만 정확한 정보가 나오지 않았다. 내가 찾아본 여러 정보는 한 데 엉켜있었다. 어제 내린 결론, 우붓 도처에서 보름달이 뜨는 날 의식은 열리고 크고 작은 절에서 행사를 하기 때문에 동네를 어슬렁거리다 보면 누구라도 알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요가원이나 리조트 같은 곳에서도 full moon 의식 프로그램이 있었다. 그건 예약제이고 저녁에 열렸다. 직접 의식을 행하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내가 보고 싶은 건 발리에 사는 사람들의 전통적인 종교의식이었다. 막연히 오늘 저녁 제법 큰 절에 가면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났지만 너무 피곤해서 아침을 먹고 숙소에서 푹 쉬다가 몸이 찌뿌둥해서 요가를 듣기로 결정했다. 요가를 하면서 든 생각, 음~ 요가하기 싫다. 우붓에서 난 요가 안 할래.
점심을 먹고 원래 좀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러 커피를 한 잔 마시러 갔는데 문득, 대체 어딜 가야 풀문 세리머니를 볼 수 있는지 너무나 알고 싶어졌다. 어제 카페에서 종업원에게 물어봤을 때도 모른다고 말했고, 오늘 점심을 먹은 식당에서도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기 때문이다. 현지인이 모르는 의식? 축제? 그리고 아무리 찾아도 구글엔 제대로 된 정보가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사원들은 오후 3시 늦어도 6시면 다 문을 닫아버린다고 표시되어 있다. 불길한 느낌에 열심히 구글맵에서 가볼 만한 사원을 찾아 비가 그치자마자 출발했다. 와 - 고요하고 평화롭고 아름다운데 아무도 없다. 너무 조용하다. 뭘 물어볼 사람도 없다. 뭔가 잘못되었다. 거기서 천천히 구경을 하는데 스님 혹은 관리자로 추정되는 분이 계셨다. 분명 그분은 영어를 잘하는데 나의 영어가 부족해서 그런지 의사소통이 아주 원활하지 않았다.
그래도 궁금증은 해결할 수 있었다. 아 풀문 세리머니는 아침 10시에 끝이 났데. 아 달이 안 뜨는 아침에 의식을 하는 거구나. 하하하... 그렇구나. 그것도 모르고 열심히 찾아보고 여기까지 왔네. 약간 해탈한 마음이 들어 걷다가 엄청 맛있는 로컬 빵집을 발견해서 빵을 두 개 샀다. 뭔가 허한 마음에 게시판에 붙은 꽤 비싼 입장료의 콘서트에 가고 싶어졌다.
티켓을 사려면 전화번호를 적어야 했는데 내 번호를 몰랐다. 번호를 아는 법을 검색해 봤는데 찾지 못했다.(이쯤 되면 검색 능력에 문제가 있는 걸지도 모른다) 숙소로 가야겠다. 다시 그랩을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로 돌아오자 약간의 이성이 돌아오면서 거기 가고 싶은 건 아닌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내일 있을 명상을 위해 긴 바지를 구매하고 일찌감치 숙소로 돌아와 재정비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무슨 희망이었을까? 아마 혹시 그래도 뭔가 있지 않을까, 이상하다 저녁에 의식하는 사진을 분명 봤는데 착각인가. 근데 왜 아무도 모르지.
길을 걷다가 전통 복장을 입은 아낙네 세 분이 사원에서 머리에 짐을 들고 총총 걸음으로 나왔다. 순간 부풀어 오는 기대로 경비원분께 혹시 나도 들어갈 수 있냐고 물었더니 안 된다고 했다. (이유는 정확히 말해주지 않았지만, 현지인이 아니라서 그런 것 같다), 의기소침.
나사 하나가 풀린 것처럼 온통 풀문 생각으로 가득찼다. 딱히 맘에 드는 것도 아닌데 뭔가 헤치우고 싶은 마음에 엄청 비싼 바지를 살 뻔했다가 정신이 들었다. 시장에서 적당히 저렴한 바지를 흥정한 후 샀다(흥정도 하기 귀찮았다) 돌아가는 길에. 나도 모르게 한 카페에 멈춰서 메뉴판을 읽다가 홀린 듯이 가격도 모르고 음료를 시켰다.
되게 비싸고 예쁘고 고급스런 카페였다. 평소라면 결코 오지 않았을 뿐더러 오더라도 오랜 시간 머물렀을 것이다. 아, 나 되게 정신 나갔네 생각했다. 음료는 첫 느낌은 너무 밍밍해서 이게 뭐야?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계속 마시다보니 묘하게 맛있었다. 카페 이름이 moonchild wandering이었다. 마치 하루종일 볼 수도 없던 full moon에 집착하고 방황하는 나를 수식하는 단어 같잖아. 거기서 의도한 뜻은 전혀 다르겠지만. 무의식 속 저 네이밍에 끌렸나보다. 풀문은 못 봤지만 음료를 마셨다. 음료 옆에 꽃 한송이가 있었다.
직원에게 꽃을 가져가도 되냐고 물었더니 흔쾌히 좋다고 했다. 꽃을 손에 쥐니 이상하게 힘이 났다. 달은 없지만 꽃을 가져왔다. 거기서 마무리했으면, 나름대로 괜찮았을 텐데.
마지막 삽질이 남았다. 숙소로 돌아왔는데 의식에 쓰는 물건을 정리하는 주인 아주머니를 만났다. 저녁에 아주머니가 풀문 의식을 하러 간다는 말을 듣고는 대흥분! 나는 대체 어디서 풀문 의식을 볼 수 있는 거냐고 오늘의 설움을 담아 질문했다. 영어가 원활하지 않던 아주머니와 나는 제대로 소통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다시 완전히 포기했던 full moon을 마지막으로 열심히 찾아보았다. 다시 왕궁 근처로 가보자. 혹시 몰라. 가는 길에 영어를 잘 하는 다른 가족 분이 제대로 설명해주셨다. 풀문은 달을 기념하는 게 아니라 아침에 하는 의식이고 이미 다 끝이 났다고. 그랬구나. 내가 아쉬워하자 곧 엄청 큰 축제를 하니까 그건 놓치지 말라고 그것도 아침에 한다고 원숭이 포레스트로 가면 된다고 설명해주셨다.
방으로 돌아와서 대체 나 왜 이러지? 풀문에 미친 사람 같잖아. 골똘히 생각했다. 물론 여행 하면서 보름달이 뜨는 건 오늘 하루이고 이걸 놓치면 다시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긴 했다. 진짜 그걸 놓쳐서 속상한 걸까? 뭐 그것도 있지.
근데 생각해보니 진짜 속상한 건 따로 있었다. 알고 싶은 데 알 수 없어서 너무 답답하다. 그게 더 속상하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충분히 파악하고 싶은데 혼자서는 도달할 수 없는 지점이 있다. 철저한 외지인과 외부인, 당연한 것도 모르는 외부인, 한계가 느껴져서 슬픈 것 같다. 심지어 평소와 달리 다른 이들에게 적극적으로 물어봤으나 결과는 좋지 않았다.
난 full moon을 못 볼 운명이었다. 대신 날 속상하게 하는 게 무엇인지 나 자신을, 내 한계와 불쑥 고개를 내미는 그림자를 알아야 하는 하루였다.
아마 지금 내 에너지도 엉망일 것이다. 이런 날도 있다. 나와 대화해야 한다. 벌써 10시가 되었구나.
p.s 그리고 다음날 이른 아침 일어나 숙소에서 금처럼 영롱하게 빛나는 보름달이 지는 모습을 한없이 고요하게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