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한 번째 ©Myeongjae Lee
KE1326, A321-neo(200)
20:20, 탑승구 5, 좌석 52A
“내면의 감정과 사고의 흐름, 경험 등을 일상의 친숙한 소재들로 은유하여 한 장면으로 표현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치유와 휴식이라 정서, 감각들을 주제로 작업을 풀어내게 되었고요 소재로는 침대와 소파같이 우리 삶에 굉장히 친숙하고 그 용도 자체가 오롯이 치유와 휴식을 위한 용도의 사물이기 때문에 작품의 이미지로 채택을 했습니다.
... 제주도가 제가 떠나고 싶었던 마음이랑, 낼 수 있었던 용기가 맞물렸던 장소였던 것 같아요.
... 제주도에 들어와서 저의 이야기를 쓰고 그림으로 그리면서 저의 작업도 더 다채로워지고 저의 삶 자체도 더 다채로워지면서 '아, 나는 제주도랑 잘 맞는 사람인 것 같다'라고 생각이 들었고...”
https://www.youtube.com/watch?v=u7kfAjUFyxE (강수희 작가)
일상으로부터 잠시 사라지고 싶었다. 나도, 아내도 같은 생각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제주현대미술관에 갔다. 비가 오니 미술관 주변이 더 운치 있게 느껴졌다. 비릿한 비 냄새와 콤콤한 풀냄새, 그리고 흙냄새가 적당히 어우러져 자연 속으로 깊숙이 들어온 기분이 들었다.
<2024 New Rising Artist> 전시가 인상적이었다. 젊은 작가 다섯 명의 신선한 시도들이 돋보였다. 특히 제주에 입도해서 일상의 조각들을 그리는 강수희 작가의 작품들이 좋았다. 어쩌면 작업의 주제와 이미지가 지금 나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들과 정확히 일치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겠다. 어쩌면, 제주를 떠난 뒤 삶의 다채로움이 사라지며 밋밋하기 그지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겠다. 아직도 긴가민가 한데, 작품 뒤쪽(안쪽)에 별도의 조명이 설치되어 있는 것인지, 아니면 특이한 조명장치인 것인지, 작품 모양에 딱 맞게, 네모지게 조명이 딱 떨어지는 게 신기했다.
일 생각, 사람 생각, 그리고 베란다 천정에서 물이 샌다며 원인도 정확히 확인하지 않은 채 다짜고짜 "보험 있으시니까 처리해 달라."는 무례한 아랫집 집주인 생각이 문득문득 머릿속을 파고들었지만, 잠시나마 일상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근처 김창열미술관의 특별기획전 <두 개의 숨(권영우, 김창열)>과 소장품 기획전 <물방울, 찬란한 순간>도 좋았다. 마음을 차분하게 해주는 전시였다. 그러고 나서 저지리 올레집에서 몸국과 순대국밥을 먹었다. 날씨와 잘 어울리는 메뉴였다. 비행기 시간까지 여유가 있어서 유람위드북스로 향했다. 다행히 2층에 서너 자리가 남아있었다. 그 자리에 앉아서 모리 카오루의 <신부이야기>를 지난번에 이어 5권부터 10권까지 단숨에 읽었다. 이곳은 나름, 나와 아내에게 휴지(休止)를 위한, 그리고 충전을 위한 골방과 같은 장소가 되어준다.
“유달리 지루한 날은 생각이 시끄럽지요. 그래서 제 근황을 그렸습니다. 눈에 익고 손에 익은 것들이 왁자지껄하게 모였습니다. 익숙한 생각들이 그답게 그려졌습니다. 골방은 나를 휴지(休止) 하기 좋은 장소입니다.” (강수희 작가)
"살아있으면 또 기회가 있네. 하지만 스미스, 자네가 죽으면... 자네의 기억도 지식도 경험도 모두 사라지네. 기억 이전의 문제야."
"왜 죽는 게 전제인가요."
"그만큼 위험하다는 소리지. 지역의 국지전이 아닐세. 국가가 움직이는 거야."
"만약 그 말씀이 사실이라면, 그야말로 지금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다음에는 몇 년 후에 올 수 있을지 몰라도, 모든 것이 바뀌었을 겁니다. 베히스툰 비문이 없었다면 고대 페르시아어의 해독은 어려웠겠지요. 무엇이 사라질지는 사라진 후가 아니고서는 모릅니다. 시간은 되돌릴 수 없어요."
<신부 이야기> 10권, pp.166-167
아내가 비행기 시간에 맞춰 제주공항에 내려주었다. 먼 길 다시 운전해서 돌아가야 하는 아내에게 적잖이 미안했지만, 오며 가며 이동하는 시간까지 조금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어서 좋았다.
검색대를 통과해서 주섬주섬 옷과 물건들을 챙기다가, 배낭 메인 지퍼가 터진 것을 발견했다. 출장 또는 제주 오가며 사용하려고 나름 적지 않은 비용을 들여 구입한 가방인데, 회복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다행히 면세점 카운터에서 튼튼한 비닐 쇼핑백을 하나 얻을 수 있었다. 갖고 있던 가장 작은 단위의 화폐인 10,000원 권을 내밀었더니, 이번에는 그냥 가져가란다. 감사했다. 현금 100원을, 그리고 100원 그 이상의 따뜻한 마음을 오늘도 빚졌다. 주말도 없이, 온종일 일어서서 힘겹게 근무하는 분들로부터 느낀 인류애. 덕분에 잠시 당황스럽고 난감했던 마음이 안정을 되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