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 번째 ©Myeongjae Lee
KE1131, B737-900, 14:25, 탑승구 8, 좌석 34A
(취소) 12.19.(목) 20:25 KE1227
(변경 & 취소) 12.20.(금) 20:25 KE1227
난 말이지, 사람들이
친절을 베풀면
마음에 저금을 해둬
「저금」, 『약해지지 마』, 지식여행, 2010, 시바타 도요, 채숙향 옮김
/ p.166 『시의 문장들』, 김이경 지음, 유유, 2016
11월 말, 역할은 전혀 없지만 안 가기는 좀 뭣한 회의에 대한 안내가 왔다. 메일을 받자마자 12월 20일에 할 가능성이 크겠다는 찜찜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지난 금요일 퇴근 직전, 12.20.(금) 16시로 일정이 확정되었다는 메일을 받았다. 아내와 통화를 하고 항공권을 변경했다. 금요일에 아이 발표회가 두 개나 있어서 목요일 밤 비행기표를 구입해 놓은 터였다.
그런데, 동료 한 명이 ‘대참도 가능하다’고 하니 본인이 회의에 다녀오겠다 했다. 아이 발표회에 가라고. 내 일을 미루는 것 같아 처음엔 괜찮다고 했지만, 그는 가족 일이니 가라고 했다. 고민고민을 하다 그러기로 했다. 그사이 또 19일(목) 오전 광화문 근처에서 또 다른 회의가 생겨서, 참석 후 조퇴하고 바로 제주로 가기로 했다. 항공권을 다시 변경했다.
고마웠다. 앞으로 이 관계가 어떻게 전개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의 이 친절과 선의를 내 마음에 저금해 두고, 기회가 될 때 이자까지 갚을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이 씨가 된 것일까.
월요일부터 허리가 아프기 시작하더니, 수요일 아침에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기도 힘들 정도로 통증이 심했다. 출근하자마자 병원에 다녀왔다. 많이 염려했는데, 의사 선생님은, "다행히 심각한 상황은 아닌 것 같다."며 약을 먹고 지켜보자고 했다. 제주에 갈 수 있을지, 오가는 길을 버텨낼 수 있을지 걱정되었지만, 약을 먹으니 좀 나아진 느낌이 들어서 비행기에 올랐다.
목요일 회의 가는 길에, 오전 9:05 경 신길역에서 5호선으로 지하철을 갈아탔다. 늘 걸어서 출퇴근을 하다 보니, 출근 시간에 환승통로에서, 에스컬레이터에서 뛰는 사람들을 정말 오랜만에 보았다. 낯설었다.
제주에서 근무할 때, 가끔씩 서울 출장을 왔다. 웃자고 하는 말이지만, 출발할 때까지는 의식하지 않다가도, 육지에 도착하면 옷차림이 신경 쓰일 때가 종종 있었다. 제주에서는 업무협의도 많지 않고, 사무실로 찾아오는 사람들도 거의 없어서 옷모양새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지냈었다. 주요 이동 동선에 있는 양재역, 도곡역에서 지하철에 오르는 사람들의 옷매무새는 좀 다르다 느껴졌고, 내가 좀 촌스러운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괜히 위축되는 날도 있었다.
러시아어 표현 중에 "옷으로 만난다"는 말이 있다. 옷차림이 다는 아니지만,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중요하지 않지 않다는 말로 이해된다. 나이가 들어도, 어떤 상황이 되어도, 그리고 좋은 옷, 명품은 아니더라도, 늘 깔끔하게는 입고 다녀야겠다.
낮 비행이어서 창문으로 보이는 게 많았다.
그 와중에 회사 건물이 보여서 깜짝 놀랐다. 조퇴하고 집에 가는데 하늘에서까지 사무실이 보여서 기분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신기하기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