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샨티 Nov 04. 2022

눈을 마주쳐야 하는 것이 '놀이'

모험놀이터에 대한 단상 : 놀이는 소통이다

우리 집에서 '엄마' 라는 소리는 초인종처럼 울린다. "엄마, 엄마" 아이들이 아침에 눈 떠서 이부자리를 더듬어 엄마의 따뜻한 몸을 껴안는 순간부터 시작되어, 책 읽어달라고, 마사지해달라고, 내 옆에 누워 잠재워 달라고 하는 밤 시간까지 초인종은 쉴 새 없이 울린다.


초인종이 울릴 때마다 공주님 왕자님 맞는 기분으로 반갑게 대답할 순 없다. 가능하면 친절하게 말하며 필요한 것을 들어주거나 적절한 해결책을 주기도 하지만, 설거지하거나 청소를 하거나 내 책에 빠져있는 순간 등 내가 바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눈도 안 보면서 "어 그래" "잠시만 엄마 이것만 해놓고"라고 말을 내뱉는다. 내가 아이에게 할 말이 있어서 "OO야~"하고 부르는 때도 타이밍이 맞지 않으면 아이는 자기 할 일에 빠져 엄마를 쳐다보지 않을 때도 많았다. 긴 일상을 살며 눈 마주치고 온전한 소통을 하는 시간은 꽤 길지 않았다.




모험 놀이터에서 아이와 놀이를 하는 내내 눈을 바라보았다. 각자의 손가락 끝으로 막대기를 고정하고 서로의 동작에 따라 세밀하게 움직여야 하는 놀이에서 자칫 방심하면 막대기가 떨어지기에 일 초라도 아이의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이도 엄마의 눈을 끊임없이 바라보았다. 입가에는 잔뜩 미소를 묻히고서. 말없이 하는 놀이에서는 서로의 눈빛을 보고 타이밍을 맞춰야 했다. 아이의 눈이 이토록 깊고 예뻤던가? 반짝이는 두 눈을 이토록 긴 시간 바라보는 시간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어린 시절 함께 놀았던 친구들이 떠오른다. 그때는 텔레비전도 아침과 저녁에만 나왔고 어린이를 위한 방송을 굉장히 짧았다. 인터넷도 컴퓨터도 없었다. 학교 갔다 오면 무조건 마을 공터에 나가서 놀았다. 편을 나누어하는 '마야'('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와 비슷한 놀이였는데, 양쪽 편을 나누어 술래 두 명으로 이루어진  형태) 같은 놀이에서는 술래의 말이 떨어지기 전에 움직여야 했고 상대편 술래는 아이들이 움직이는지 확인하기 위해 자세하게 아이들 얼굴을 살폈다. 숨바꼭질하다가 들켰을 때도 친구의 눈을 바라보며 표정을 확인해야 했고, 소꿉놀이를 통해 또 하나의 세계가 펼쳐졌기에 역할에 몰입하며 서로의 얼굴을 긴밀하게 쳐다보았다. 눈을 감으면 그때 놀았던 친구들의 눈빛과 얼굴 표정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태정이, 미애, 성철이, 민기, 봉수...


눈을 뜨니 내 앞에는 웃음 잔뜩 머금고 내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두 아이가 있다. 서로를 바라보며 섬세하게 움직 본다. 작은 움직임도 면밀하게 잡아내며 동작의 균형을 이룬다. 막대기 하나로 이렇게 놀 수 있다니! 내 어린 시절도, 내 아이의 어린 시절도 우리 주변에는 놀이가 가득해서 다행이다. 온몸을 움직이고 함께 놀면 어쨌든 눈을 마주치게 되고, 놀이가 즐거우니 웃게 된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마스크를 써야 하는 시대. 마스크에 가려 표정을 알 수 없는 요상한 시절이 되어버렸다. 감정의 교환은 "좋아" "사랑해" 같은 음성언어로도 전해지지만 그 배경을 이루는 비언어적 요소인 표정과 눈 맞춤이 더 큰 범위를 차지한다.  얼마만의 자유인지, 야외에서는 마스크 벗어도 된다는 국가의 허락도 떨여졌다. 언제 다시 풍토병이 돌지 모르는 상황, 최대한 마스크 벗고 놀아보자. 코로나가 남긴 큰 교훈,  놀 수 있을 때 놀아야 한다. 서로의 눈을 바라보면서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나는 아이를 진심으로 믿는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