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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쿨 cool Aug 17. 2021

직업을 입력하세요

꿈이 없는 건 창피한 일이 아니다

내 직업에 대해 근본적인 고민을 할 때가 있다.


바로 해외여행을 가서 입국신고서를 작성할 때다. 


나는 프리하게 작업 의뢰가 오면 그에 따른 원고를 써주고, 때로는 촬영장에 나가서 참견을 하고, 때로는 영상이 나오면 후반 작업을 하기도 하고, 무에서 유를 만드는 기획을 해 기획안을 만들기도 하는 프리랜서다. 


적어놓은 걸로만 보면 대단한 일을 하는 것 같지만 단순히 잡일을 많이 하는 잡가다. 하지만 사람들은 나를 '작가'라고 부른다. 그게 이 사회가 내 직업에 붙여주는 타이틀이다. 내가 입국신고서에 이 직업을 쓰기 꺼려야 하는 이유는 적어도 내게 '작가'라는 직업은 뭔가 세상을 바꾸는 글을 쓰는 대단한 사람에게만 붙일 수 있는 이름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그냥 'worker'라고 써낼 때가 많았다. 궁극적으로 입국심사대에 앉아있는 그들은 내 직업엔 크게 관심이 없다. 그저 내가 그 나라에서 불법을 저지르지 않을지만 관심사일 뿐. 정작 직업란에 대해 제일 크게 고민하고 관심을 갖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다.


어릴 때는 착하고 모범생으로 자랐던 터라, 대학까지는 착실하게 안착했는데, 막상 대학생이 되고 나니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시기가 왔다. 전공은 나와 맞지 않고, 꿈도 없는데, 졸업은 해야 하고. 대학생이 끝나면 인생도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인생 절체절명의 위기가 찾아왔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일까?


나는 지상 최고 끈기 없는 사람 중에 하나다. 시작은 좋았으나, 그 끝은 제대로 본 적이 별로 없는 사람. 그런 내가 그나마 꾸준히 좋아했던 것이 있다면 라디오였다. 이문세 별밤부터 시작해서, 이적, 마왕, 유희열까지. 꽤 오랜 시간을 라디오를 끼고 살며 울고 웃고 했던 기억이 있다. 그래, 그럼 내가 좋아하는 라디오 작가가 되어보자. 연예인도 보고, 좋아하는 라디오국에서 글도 쓰고, 돈도 벌고. 최고의 직업이란 생각이 들었다. 


라디오 작가가 될 거야!


하지만 꿈은 현실과 반대였고, 들어가기 너무 어려운 라디오 작가는 또 그렇게 포기당해야 했다. 어쩌다 보니 TV 프로그램 작가가 되었고, 끝을 제대로 본 적이 없는 미덕을 따라 시도 때도 없이 그만뒀다가, 어학연수도 갔다가, 그래도 어찌어찌 명맥을 유지하여 지금은 모바일 콘텐츠 작가로 일하고 있다. 주로 바이럴 콘텐츠 작업을 많이 하고, 예능스러운 콘텐츠 작업도 종종 하고, 무엇보다 돈 되는 일이면 다 하는 작가다. 


왜 작가가 되고 싶었어요?


이런 질문을 받을 때, 마치 작가에 대한 원대한 꿈이 있었던 것처럼 둘러댔던 적도 있다. 그냥 됐다고 하기엔 부끄럽고, 꿈은 아니었다고 하기엔 내 인생이 실패한 것처럼 느껴져서다. 지금도 나는 솔직히 내가 재능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다. 나는 지금 나의 일을 사랑한다. 내가 무언가를 쓸 수 있어서 감사하고, 그 일로 돈을 벌 수 있어서 감사하고, 아직 이 자리에 버티고 있어서 감사하다. 


시간의 힘을 믿는다.


여전히 나는 내 꿈이 무언지 확신하지 못하겠다. 더 솔직해지자면 지금 꿈은 사는 날까지 민폐 끼치지 않고 잘 살다 가기다. 적어 놓고도 부끄럽다. 잘 살다가기가 꿈이라니. 적어도 세계 평화 정도는 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괜찮다. 그깟 원대한 꿈 하나 없어도,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다. 


그리고 나는 무엇보다 시간의 힘을 믿는다. 꼭 어떤 분야에서 놀라운 업적을 남기는 사람이 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면, 한 번쯤은 버텨보는 경험도 해봤으면 좋겠다. 여기서 버티는 삶이란 부조리나 불합리를 견디라는 것이 아니다. 벽에 부딪혀 '이번에도 난 틀렸어!'라고 생각하며 도망칠 궁리를 하는 그 순간을 한 번쯤 넘겨보라는 것이다.  그렇게 쌓인 버티는 힘은 내게 성취감이라는 훈장을 달아줄 날이 분명 온다. 20대 때 프로 퇴사러의 경험담이니 믿어도 좋다. 믿을 수 없다면 내기를 해도 좋다. 분명 시간의 힘이 이기고야 말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코로나가 종식되고 여행을 떠날 수 있게 되는 그날, 나도 처음으로 입국신고서 직업 칸에 '작가'라고 당당히 적어보리라 다짐해본다. 어떻게든 잘 버텨줘서 고맙고, 버티느라 애쓴 나에게 주는 작은 상으로 말이다. 그리고 때려치우고 싶은 순간, 포기하고 싶은 순간을 넘기고 버텨낸 나를 포함한 모든 밥벌이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이미 그 자체만으로도 위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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