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제일 애틋하다
사랑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사랑할 때의 나를 다시 보고 싶다. 잘 웃고, 사소한 것에도 행복하다고 느끼고, 내가 소중한 존재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다시 느끼고 싶다.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사랑하고 사랑받을 때의 나를 다시 볼 수 있을까?
사랑에 빠진 날 보는 게 좋았다.
타인에 대해 민감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살면서 타인의 평가나 시선을 의식하게 된다. 좋은 사람이고 싶고, 괜찮은 사람이고 싶은 욕망. 그 욕망이 때때로 마음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오를 때가 있다. 그중 가장 듣기 좋았던 말은 사랑하는 연인이 내게 해주는 말이었다. 나와 가장 많은 감정을 나누고, 많은 시간을 공유하고, 많은 단어를 품는 사람이 해주는 말. 진심과 사랑이 뒤섞여 그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이 진짜 나라고 착각할 때가 있다.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보다 훨씬 더 괜찮아 보였다. 사랑스럽고, 착하고,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해내고, 나잇값을 할 줄 아는 어른이자, 매력적인 사람 같았다. 그런 달콤한 속삭임이 사뭇 그립다. 낮아진 자존감을 누군가 조금 높여줬으면 좋겠다.
사랑할 때, 나는 이타적인 사람이 된다.
원래도 크게 계산적이진 않지만, 사랑을 할 땐, 완벽하게 이타적인 사람이 된다. 계산기는 저만치 치워버리고 오로지 그 사람을 한 번이라도 더 웃게 해 주기 위해, 오로지 그 사람이 나로 인해 마음이 따뜻했으면 좋겠어서 나의 모든 시간과 노력과 때로는 돈을 쏟아붓는다. 물론 헤어지고 난 뒤에 돌아오는 카드 명세서나 통장 잔고를 보면 약간의 현타가 오긴 하지만, 그래도 나는 그게 내가 치른 사랑 값이라 생각한다. 그런 내가 보고 싶다. 가족이 아닌 타인에게 완벽하게 쏟아붓고 계산기 두드리지 않는, 10개가 있으면 11개를 더 주고 싶은, 나보다 더 아끼고 소중한 듯한 착각을 하게 만드는 그런 존재를 사랑하는 내가 보고 싶다.
사랑의 실패 후, 나는 방향을 잃었다.
매번 뜨겁게 사랑하지만, 매번 이별을 하던 나는 어느 순간 방향을 잃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면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그 순간에 누군가 찾아오던데. 그건 정말 드라마니까 일어나는 일이고,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사랑하고, 사랑받지 못하는 나는 아무 가치가 없는 사람 같았다. 한동안 우울했고, 어두웠던 나는 드디어 나의 열정과 헌신을 쏟아부을 사람을 찾았다. 그건 바로 나였다!
아무도 날 사랑해주지 않는다면, 내가 날 사랑하면 돼!
꽤 오래 사랑을 쉬었고, 사랑받지 못했다. '이제 나는 이렇게 시들어가겠구나. 하긴 이런 나를 누가 사랑해줄까?' 하며 자존감이 바닥을 나뒹굴던 날, 다짐했다. 아무도 날 사랑해주지 않으면 내가 나를 사랑해주겠다고. 왜 누군가 날 사랑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을까? 그냥 내가 날 엄청 예뻐해 주면 되는 걸.
나를 위해 내가 좋아하는 한 끼를 차리기 시작했다.
내가 나를 어떻게 사랑해 줄 수 있을까? 안아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거울을 보고 따스한 말을 해주기엔 너무 오글거리니 말이다. 그때부터 나는 시간이 허락하는 한, 나를 위해 밥을 차리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는 밥은 배고픔을 때우는 수단이었다. 대충 서서, 대충 먹고, 뭐든 대충. 그래서일까, 늘 금방 허기졌다. 나를 사랑해주기로 결심하고, 제일 달라진 건 나의 한 끼다. 샐러드 하나를 먹어도, 라면 하나를 끓여 먹어도 제대로 차려서 먹는다. 내가 나의 끼니를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나를 대하는 마음도 달라졌다. 든든하게 밥을 먹고 나면, 없던 용기도 생기고 마음도 한결 여유로워졌다. 마음이 여유로워지면서, 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도 줄어드는 걸 보며 밥심의 위대함을 믿게 되었다.
내 안의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나를 이해하는 깊이도 깊어졌다.
나와 마주 보는 시간이 늘어났다. 내가 좋아하는 게 어떤 건지, 내가 필요로 하는 게 어떤 건지, 내가 싫어하는 것과 견디지 못하는 건 어떤 건지.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던 나였지만, 내가 나를 들여다볼수록 못난 구석에서 예쁨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나는 내 이야기를 꺼내기 어려워하는 사람이지만,
대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공감해주는 사람이다.
나는 굉장히 낯을 가리는 사람이고, 혼자만의 충전이 필요한 사람이지만,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기 위해 분위기를 맞춰줄 수 있는 사람이다.
나는 부족하지만, 부족한 만큼 노력하려는 사람이고,
결과가 좋지 않아도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다.
나를 이해하는 폭이 커질수록 나는 내가 애틋해졌다.
이제야 조금씩 나의 안녕을 묻게 된다.
그리고 나의 안녕이, 곧 나의 행복이라는 것도 깨닫게 된다.
조금 더 행복하길.
조금 더 편안하길.
조금 더 마음이 여유롭길.
나는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행복하길 바라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