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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샙피디 Oct 11. 2022

바라며 기다리는 마음

가만히 멈추어 생각한 시간들 005


기대 : 일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기다림


다음 두 가지 선택사항 중 선호하는 것에 체크하세요. 강아지/고양이, 짜장/짬뽕, 시작/마무리, 떡볶이/순대, 무채색/유채색, 기쁨/슬픔, 너/나, 앞자리/뒷자리, 플레이어/리스너, 성실/매력… 카페 프릳츠의 자사 양식 지원서 첫 번째 질문이다. 이것을 어떻게 활용해서 처음 보는 사람을 이해하는지 궁금하다.


특이한 점은 입사지원서뿐만이 아니다. 프릳츠는 신입 직원을 채용할 때 회사가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어떤 구조로 일하는지 설명하고 동의를 구하는 ‘직원 교육’을 같이 진행한다고 한다. 회사와 지원자가 추구하는 가치를 공유하며 서로 오래 함께 갈 수 있는 사람일지 확인하는 과정이다.


유난스럽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미 세계적으로 채용에 유난스럽기로 유명한 구글도 채용 절차가 꽤나 까다롭다. 상황과 직책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통상 4-5번 정도의 면접을 거쳐서 뽑고, 중요한 자리가 비어 있어서 큰 문제가 생겨도 적격자를 찾을 때까지 시간을 투자한다고 한다. 채용에 유난스러운 회사와 함께 하고 싶다. ‘이 중에서 이 사람을 뽑는 회사’보다 ‘이 사람이어서 뽑는 회사’에게 더 믿음이 가고 더 함께하길 기대하게 된다.


어떤 처음이든 두려움보다 설렘이 더 큰 나에게 '기대'는 익숙하면서도 얄미운 마음이다. 바라며 기다리는 일이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지는 않겠지만 '기대가 크면 실망만 크다'는 말에 공감 하면서도 매번 기대가 앞선다. 내가 오랜 시간 바라며 기다려온 것은 실체가 보이진 않지만 가까운 미래에 분명히 나타날 것 같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이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 거야.

- 네가 하고 싶은 일이 뭔데?

기획하고 실제로 만드는 거. 아름답고 유용한 무언가를 만드는 일.


누군가 무슨 일을 하냐고 물었을 때, 지금까지 해온 일들을 하나의 직업으로 딱 말하기가 어려웠는데, 아직 사회가 이름 붙여 둔 직업을 경험하지 않아서 그렇다. 특히 부모님이나 친척 어른들이 무슨 일을 하느냐 물을 때면 적절한 예시를 찾기 어려워 설명이 길어지곤 했지만 설명하기 복잡하고 어른들이 이해 못 하는 것 정도는 나에게 큰 문제가 아니었다. 수입이 크지도 안정적이지도 않았지만, 나에게는 부모님이 바라는 공무원이나 껍데기 같은 자격증을 모아 큰 기계의 부품이 되는 일보다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의 실체를 만들어 가는 크고 작은 경험들에 내 시간을 쓰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고등학생 때부터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은 사람과 공간을 다루는 일이었다. 사람과 공간을 좋아해서 대학에서 도시를 공부했고, 도시학 중에서도 이론이나 제도보다 공간을 만들고 운영하는 설계 분야에 관심을 가졌다. 석사 과정에서도 도심 속 유휴 공간을 매력적인 기획으로 채워 지역을 활성화시키는 ‘공간 기획 스타트업’을 연구했는데, 공간을 만들고 운영하는 공간 기획자들을 직접 인터뷰하고 알아가면서 ‘아름답고 유용한 무언가'를 만들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에 '매력적인 공간'이라는 구체적인 대상이 더해졌다. 대학원 졸업 후에는 좀 더 구체적 대상인 복합 문화 공간을 기획하고 운영하는 스타트업에 합류하게 되었고, 짧은 시간 동안 여러 직무에 투입되어 책임감을 가지고 다양한 아웃풋을 만들어오면서 '콘텐츠 만드는 감각'과 '공간 운영하는 근육'을 키워왔다.


지금까지 지나온 내 경험들의 바탕이 되는 기질은 ‘사람과 공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누구나 다른 사람보다 좀 더 뛰어난 기질을 하나씩은 가지고 태어난다고 생각하는데, 나의 경우 ‘호기심’과 ‘애정’이다. 호기심과 애정은 대상을 더 오래 바라볼 수 있게 하고, 오래 바라보며 더 잘 알게 하고, 아는 만큼 대상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어마어마한 능력이다. 이용자를 생각한 섬세한 배려를 느끼게 하는 공간이나, 비슷한 종류의 다른 공간들과 한 끗 차이로 다시 오고싶게 만드는 공간을 기획하고 운영하는 사람들은 '사람'과 '공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문제는 이런 어마어마한 능력을 가진 사람은 의외로 많고, 멋진 기획과 실행은 호기심과 애정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직전 회사는 복합문화공간 운영사로, 시설 내 상업 공간, 문화 공간, 공공 공간 모두를 만들고 운영할 수 있었는데, 어떤 공간이든 사람이 이용할 “공간을 만들고 그 공간답게 운영하는 일”은 실로 최상의 단계여서, 멋진 공간을 잘 만들고 싶은 이상과 그렇지 못한 현실의 괴리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매력적인 기획과 실행을 만들어온 다른 사람들의 글과 영상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기획이라는 단어로 검색해서 추천 받은 베스트셀러부터 겉으로 보았을 때 기획 이야기는 아니지만 문화와 예술, 그리고 상업 공간과 서비스를 만들고 운영하는 사람들의 글과 영상을 보면서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공간, 콘텐츠, 서비스가 매력적인 이유를 탐구했다. 상업 공간, 콘텐츠를 많이 접하며 탐구할수록 그동안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했던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브랜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브랜딩을 알아갈수록 “브랜딩을 제대로 이해하고, 매력적인 브랜드를 선보이는 팀”에서 새로운 브랜드를 함께 만들어가며 성장하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길지 않은 시간 동안 프로젝트 기획/운영 전반의 다양한 일들을 경험했지만 그래서 더욱이 이직 준비를 하면서 나의 경험들을 한 줄로 꿰기가 어려웠다. 나의 경험은 짧고 다양한 것들의 합이었기 때문이다. 이것도 저것도 경험했는데 그래서 나는 무엇을 잘하는 사람인가 싶었다.



전문성이 한 가지 이름의 직업과 결부되는 것이라면, 탁월성은 일을 바라보는 접근법, 다양한 분야로 확대할 수 있는 중심 기술과 연결된다. (...) 김희경 작가는 자신의 중심 기술이 "정보를 구조화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직업과 직위는 계속 바뀌었지만, 정보를 구조화하는 것이 언제나 자신의 일이었다는 것이다. 크고 작은 다양한 시도를 거듭하며 '우연히' 다음 단계를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에 자신을 열어두는 것,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에게 어울리는 것을 '스스로' 판단하고 찾아가는 것, 전통적인 이름으로 담을 수 없는 파편적 경험들을 관통하는 '이름'을 붙이고 말하는 것 (...)"  <일하는 마음>, 제현주, 어크로스, 2018



전문성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으로 이직을 준비하고 있을 때 운명처럼 손에 잡힌 이 책에는 스스로를 키우며 일하는 법을 먼저 시작한 사람의 담백하고 진솔한 조언이 가득 담겨있었다. 읽을 때마다 놀라운 이 책은 끊임없이 변하는 상황 속에서는 ‘버텨온 시간으로 인정받는 직업 전문성’ 보다 나의 ‘중심 기술을 기준으로 일의 맥락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위 글을 여러 번 읽고 나니 한 줄로 꿰기 어려웠던 나의 파편적 경험들을 관통하는 중심 기술에 이름을 붙인다면 '경험 설계'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함께 일하는 팀 ‘동료’부터 온/오프라인 서비스 이용 ‘고객’, 일정 기간 동안 함께 재밌는 것을 만들어가는 외부 ‘파트너’를 대상으로, 형태와 질감을 선택해서 첫인상을 만들거나, 단어와 태도를 고민해서 분위기를 만들거나, 공용 공간 이용 방법과 규칙을 정하거나,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 반복되는 일의 효율을 높이거나, 관계를 만드는 일. 내가 만드는 유/무형의 무언가를 경험할 동료, 고객, 파트너가 겪게 될 상황들을 사전에 살펴 고민하고 의도하는 방향으로 무리 없이 경험할 수 있게 과정을 설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브랜딩도 기획자가 고객의 경험을 설계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서비스 이용자는 브랜드의 존재를 인지한 그 순간부터 직접 이용하는 순간까지의 과정 전반에 걸쳐 브랜드를 경험하기 때문에, 서비스 이용자가 일상에서 브랜드를 접하는 모든 접점을 살피고 설계하는 것이 기획자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근사한 브랜드를 만드는 기획자가 되고 싶다.


존재 이유와 운영 철학이 있고, 목표를 함께 이루어 갈 동료를 유난스럽게 찾는 회사에서 이용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브랜드, 함께 하고 싶은 문화를 만드는 기획자가 되는 날을 꿈꾼다. 그동안 경험해온 나의 모든 시간들과 회사가 겪어온 시간들이 뒤섞여 재미나게 폭발할 새로운 시간들을 바라며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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