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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Nov 15. 2023

준비paraskeue

『주체의 해석학』(미셸 푸코) 강독 후기

며칠 전에 다큐 ‘프리 솔로’를 다시 봤다. 알렉스 호놀드라는 등반가가 엘 캐피탄이라는 암벽을 프리 솔로(줄을 매지 않고 암벽을 타는 것)로 등반하는 것을 찍은 다큐다. 몇 년 전에 이 다큐를 봤다. 그때 참 호놀드가 멋있어 보였다. 그때가 아마도 <천개의 고원>을 배울 때다. 그때 아무도 꽂히지 않는 ‘대법원장 슈레버’의 이야기에 나만 꽂혔다. ‘대법원장 슈레버’는 들뢰즈가 ‘기관 없는 신체’를 설명할 때 반례로 드는 인물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미친 것 같지만 안 미친 인물의 상징이다. 내 기억으로 대법원장 슈레버는 정신병자다. 그런데 진정한 의미의 ‘광기’는 없는 인물이다. 이번 스승의 책에 라캉의 ‘머리(이성) 없는 주체’라는 개념이 나온다. 대법원장 슈레버는 그에 반하는, 얼핏 보면 미친 것 같지만 사실은 ‘머리(이성) 있는 주체’인 인물이다. 내가 그에게 꽂힌 이유는 명백하다. 내가 대법원장 슈레버니까. 그게 내 콤플렉스니까. 그때 한참 자기비하를 많이 했었다. 대법원장 슈레버의 반대 인물로 스승이 예시를 든 게 알렉스 호놀드였다. 호놀드는 등반가다. 그런데 이 새끼는 미친 건지 줄을 안 매고 등반하는 프리 솔로 등반가다. 그가 그 다큐에서 오른 엘 캐피탄의 높이가 914미터다. 엘 캐피탄은 높이만 높은 것도 아니고 거의 90도의 절벽인데다가 줄을 매고도 등반이 어려울 정도로 난코스가 많기로 유명하다. 스승이 입문 수업에서 ‘백척간두진일보’를 설명할 때 친절하게 백척이 얼마인지 주석을 달아주었다. 백척은 지금으로 계산하면 30미터다. 30미터면 아파트 10층 높이다. 그런데 호놀드 이 미친새끼는 그것에 30배에 달하는 암벽을 줄 없이 등반한 것이다. 세계에서 제일 높은 빌딩인 부르즈 칼리파가 829미터란다. 상상할 수 없는 세계다.


세상에 미친 놈도 이런 미친 놈이 없다.


며칠 전 백척간두진일보에 대한 글을 쓸 때 호놀드가 생각이 났다. 그는 그야말로, 은유가 아니라 진짜로, 백척간두진일보를 한다. 그가 프리솔로를 하면서 내딛는 매 한 걸음이 백척간두진일보다. 백척도 아니고 천척간두진일보다. 누군가는 한 번도 하기 힘든 그 진일보를, 호놀드는 프리솔로를 할 때 매 걸음한다. 그게 ‘머리없는 주체’가 아니고 무엇이겠나. 며칠 전에 혼자 프리솔로를 다시 보았다. 왜인지 모르겠다. 나는 다큐든 영화든 긴 영상을 잘 보지 못하는데, 갑자기 그 다큐를 다시 봐야겠다는 강렬한 충동이 들었다. 그 다큐를 다시 봤다. 내가 대법원장 슈레버에 꽂혔던 시절에 봤던 느낌과 달랐다. 그때 전혀 보이지 않던 부분이 더 크게 보였다. 오히려 사소한 부분들이 더 깊게 다가왔다.




“나는 오래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


호놀드의 여자친구 사나는 철이 없다. 이건 처음 봤을 때도 그렇게 느꼈다. 그런데 그때는 그냥 '나는 저 여자처럼 사랑하는 사람 발목 잡는 사람은 되지 말아야지'라는 생각밖에 안 했다. 그런데 이번에 봤을 때는 호놀드가 사나에게 했던 저 말이 마음에 남았다. 사나는 호놀드가 프리솔로를 하는 것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엘 캐피탄 등반을 준비하는 호놀드에게 대체 왜 프리솔로를 계속 해야 하는 거냐고 울면서 묻는다. 사나는 매우 철없게도 '네가 프리솔로를 계속 하는 데에 자기는 고려사항이 아니냐'고 묻는다. 프리솔로를 하다가 '네'가 죽으면 '내'가 슬퍼질 테니(더 정직히 말하면 ‘내’가 혼자의 삶을 감당할 수 없을 테니), '나'를 위해 프리솔로를 관둘 수 없냐는 것이다. 호놀드는 요즘 말로 하면 전형적인 T다. 호놀드는 드라이하게 말한다. 내가 프리솔로를 계속하는 데 넌 고려사항이 아니라고. 아니 사나야 당연하지. 호놀드가 사랑하는 건 네가 아니라 암벽이잖아. 사나가 울음을 터뜨리며 묻는다. 넌 오래 살고 싶지 않냐고. 호놀드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자기는 오래 살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말한다.


그 장면을 보고 굉장히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했다. 삶의 진실은 전부 다 아이러니 속에 있다. 호놀드는 오래 살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래서 줄 없이 암벽을 타는 프리솔로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등반을 누구보다 신중하고 성실하게, 꼼꼼하고 구체적으로 준비한다. 호놀드는 엘 캐피탄 등반을 거의 1년 반 동안 준비한다. 로프를 맨 채 몇 십번씩 등반을 하면서 프리솔로 중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변수들을 시뮬레이션한다. 호놀드는 프로 중에 프로이지만, 조금이라도 까다로운 구간이 나오면 가장 안전하게 넘을 수 있는 자세를 고수한다. 로프를 매는 등반이라면 이럴 때 ‘가라테 킥’을 쓰겠지만 프리 솔로를 할 때는 절대 쓰지 않는다는 말을 한다. 조금의 리스크라도 줄이려고 한다. 구간별로 줄을 매고 등반을 하며 암벽의 상태도 체크한다. 암벽을 계속 매만지며 느끼려고 한다. 손과 발로 지탱할 틈이 어느 정도 크기인지, 표면은 미끄러운지 거친지, 또 다른 변수는 없는지 계속해서 확인한다. 그는 암벽과 감응한다. 무려 1년 반 동안. 그리고 캠핑카로 돌아가 그날의 암벽 일지를 쓴다. 모든 구간마다 고민의 흔적이 녹아 있다. 암벽의 상태뿐만 아니라 그 구간을 탈 때 자기의 마음 상태까지 쓴다. 그 마음 상태에 따라서 그 구간을 돌파할 루트와 자세를 고민한다. 그 모든 과정이 푸코가 말한 ‘준비(paraskeue)’ 같다. 호놀드는 죽고 싶은 사람인데, 온 마음을 다해 가장 죽지 않을 방법을 고민하고, 그걸 끊임없이 연습한다. 삶의 진실은 언제나 이런 식이다. 말로 써놓으면 모순인데, 그 모습을 실제로 보면 설득이 된다. 호놀드는 죽기 위해 죽지 않으려는 사람이다. 호놀드는 살기 위해 살지 않으려는 사람이다.


호놀드의 암벽 일지. 무엇이 자신을 불안하게 하는지 적고, 그 불안을 타개할 방법을 고민한다. 삶을 돌아보는 일도 이렇게 해야 한다.


지난 번에 그냥 지나쳤던 장면 중 또 하나 마음에 남은 장면이 있다. 호놀드가 첫번째 엘 캐피탄 등반을 시작했다가 도중에 포기한 장면이다. 그 장면이 왠지 모르게 마음에 남았다. 호놀드는 여러 가지 처음 겪어보는 변수들 사이에서 시행착오를 겪는다. 감정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사람이라 티는 안 나는데, 따져보면 처음 겪는 변수들에 꽤나 심적 갈등을 겪는 것 같다. 평생 부상을 안 당해보다가 엘 캐피탄 등반 전에 발목 부상을 두 번 연달아 당한다. 치료는 되었지만 그건 변수가 된다. 그 이후로 호놀드는 등반 중 발목에 힘이 예전만큼 들어가지 않는다는 걸 느끼게 되니까. 그리고 두 번째 변수는 그의 등반을 찍는 카메라팀이다. 그 카메라팀은 호놀드의 친구들이다. 호놀드의 등반가 선배는 프리솔로를 하는데 카메라팀이 따라붙으면 굉장히 위험할 수 있다고 호놀드에게 경고하기도 한다. 호놀드도 그 말에 동의하는 눈치다. 아주 작은 변수 하나라도 정신력을 흩뜨릴 수 있으니까. 등반가 선배는 불특정 다수의 압박에 호응할 필요가 없다며 카메라팀에게 말하지 않고 혼자 몰래 프리솔로를 해버려도 된다고 다독인다. 실제로 호놀드가 등반을 도중에 포기한 날, 카메라가 자신을 찍는 게 신경이 쓰였다는 얘기를 한다. 호놀드는 불특정 다수의 시선에 신경이 쓰이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카메라팀이 자신의 친구들이라서 신경이 쓰이는 것 같았다. 친구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자기가 죽으면 어떡하겠냐고. 호놀드는 T 같으면서도 T가 아니다. 그는 성숙한 강박증자다. 주변 사람들의 감정(징징거림?)에 공감은 못해주지만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기꺼이 짊어질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어른이다. 늘 죽음을 발끝에 두고 살아온 그는 어른이 될 수밖에 없다.




가장 죽을 확률이 높은 일을 가장 죽을 확률이 낮게 해내는 것. 이것이 삶을 제대로 살아가는 태도 아닐까. 죽을 확률이 없는 일을 하는데 준비를 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안 죽을 테니까. 어쩌면 사람들은 그래서 아예 ‘준비’ 자체를 경험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호놀드는 평온하게 죽을 것이다. 늘 죽을 법한 일을 하면서 최선을 다해 안 죽으려고 준비해왔으니까. 어쩌면 삶을 압도해서 죽는다는 건 그런 모습일 수 있다. 호놀드는 악착같이 살려고 한다. 그래서 그는 평온하다. 위험한 구간을 미리 준비한다. 친구들의 마음을 지고 있기 때문에, 야심이나 성취욕에 눈이 멀어 객기를 부리지도 않는다. 아직 준비가 덜 되었다면, 어떤 상황이라도 중도 포기할 수 있는 지혜도 지니고 있다. 포기해도 좌절하지 않는다. 어차피 다시 할 거니까. 그에게 프리솔로 말고 다른 삶의 의미는 없으니까. 마지막으로 그가 엘 캐피탄을 정복하는 과정이 기가 막히다. 처음에 이 다큐를 보았을 때는 엘 캐피탄에 내가 압도가 되어버렸다. 참 찐따 같다. 정작 호놀드는 웃으며 그 암벽을 타고 있는데, 먼 밖에 화면으로 그걸 보는 내가 손에 땀이 나서  제대로 보지 못하겠더라. 전형적으로 이것이 감응이 아니라 감정 반응이다. 내가 호놀드에 감응한다면 그 장면을 보고 압도되지는 않을 테니까. 이번에 그 장면을 볼 때는 호놀드의 가벼움이 느껴졌다. 그는 평소 연습할 때보다 빨리 엘 캐피탄을 등반한다. 무슨 산책 나온 사람마냥 총총 뛰는 구간도 있다. 심지어 그가 등반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는지, 어떤 관종새끼가 그가 돌파하는 구간에서 텐트를 치고 기다리고 있는 사건(변수)도 일어난다. 그 관종새끼가 토끼인형옷을 입고 깃발을 흔들며 호놀드에게 인사하는데, 나 혼자 ‘야 이 관종새끼야! 너 때문에 호놀드 집중 깨져서 죽으면 어떡해!’라고 욕했을 뿐, 정작 호놀드는 그에게 가볍게 손인사까지 해준다. 그는 이 구간은 너무 위험하기 때문에 ‘가라테 킥’은 안 쓸 꺼라는 구간에 ‘가라테 킥’을 쓴다. 그리고 틈 사이에 껴서 몇백미터를 올라가야 하는 죽음의 구간에서 미소를 짓는다. 등반을 마치고 말한다. 죽을 거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고. 백척간두진일보에서 호놀드는 절벽 밑을 보지 않았다. 애초에 절벽 밑이 신경쓰이는 사람은 프리솔로를 할 생각을 못할 것이다.


알렉스는 등반을 끝내고 활짝 웃으며 '울고 싶기도 하다'고 말한다. 이 장면이 참 아름다웠다.


등반을 하고 호놀드는 정말 기쁜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여자친구에게 전화한다. 울먹거리는 여자친구에게 울지 말라고, 네가 울면 자기도 울 것 같다고 말한다. 자기는 울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근데 울고 싶기도 해”라고 한다. 다큐에서 호놀드의 뇌를 MRI로 찍은 장면이 나온다. 대체 어떻게 인간이 프리솔로를 할 수 있는지, 호놀드는 뭔가 다른 사람과 뇌가 다르지 않을까 하는 의문(참 미국스럽다)에 호놀드의 뇌를 검사한 것이다. 검사 결과 호놀드는 남들보다 두려움을 느끼는 뇌의 부분이 덜 활성화되어 있다고 한다. 어떤 공포의 대상을 볼 때 두려움을 느끼는 역치가 굉장히 높다는 것이다. 의사는 이걸 지극히 유물론적으로 “역시 호놀드는 뇌가 달라”라고 결론내리려고 한다. 근데 호놀드가 그 검사 결과를 받고 이런 얘기를 한다. 아마 자기는 그 기관을 남들보다 많이 써서 피로해져버린 걸지도 모른다고. 호놀드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리 철저히 ‘준비’하지도 않을 테다. 호놀드는 두려움을 느낀다. 망상 속의 두려움이 아니라, 온몸의 신경이 바짝 곤두서는 그 진짜 두려움을 자주 느낀다. 그래서 남들보다 두렵지 않다. 늘 '죽음'의 공포를 기억하는 사람은 '죽음'이 두렵지 않다. (호놀드는 절벽에서 떨어지는 날 죽기 싫다고 발버둥치지 않을 것이다. 미소지을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잘 살다 간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게 죽음을 제대로 준비해온 사람의 '죽음'이다.)


호놀드는 비장하지 않다. 비장한 건 거짓말이다. 호놀드는 진지할 뿐이다. 진지하게 ‘준비’할 뿐이다. 프리 솔로를 하는 사람 중 죽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동료 모험가가 말한다. 그 말에 호놀드는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는다. 그 죽은 등반가 중에는 호놀드의 친구도, 어린 시절 호놀드의 영웅도 있다. 그들의 사고사 소식을 듣는다. 호놀드는 울지도 동요하지도 않는다. 싸이코패스의 시멘트 같은 마음이 아니라 잔잔한 호수 같은 마음으로 그들의 죽음을 접한다. 호놀드는 진짜로 안다. 모두가 죽는다는 걸. 자신도, 자신이 좋아했던 모든 이들도 다 죽는다는 걸. 언젠가 호놀드의 사고사 소식을 들을지도 모르겠다. 이 다큐를 다시 본 날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호놀드가 살아있는지 검색을 해봤다. 호놀드가 죽는 날 다시 이 다큐를 보고 싶다. 그의 미소는 내 마음에 오래도록 남을 것 같다. 어떤 이가 기뻐지려고 온몸으로 애 썼던 순간은 반드시 다른 이의 마음에 흔적을 남긴다. 씨앗이 되어 심긴다. 나는 호놀드가 좋다. 그를 한 번도 만난 적 없지만 그가 좋다. 아이러니한 그가 좋다. 지난 날 그에게서 비장함밖에 못 읽어서 미안하다. 비장해서 가볍고, 가벼워서 비장한 그 아이러니를 나도 온몸으로 알게 되었으면 좋겠다. 비장함과 가벼움을 연결하는 열쇠가 바로 ‘준비’인가 보다. 진지한 ‘준비’.


엘캐피탄 등반을 끝낸 날, 이제 뭐할거냐고 묻는 친구의 말에, 호놀드는 '행보드(손가락 단련 훈련)'를 할 거라고 말한다. 이게 '준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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