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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May 12. 2024

이해와 용서는 다르다

이해와 용서는 다르다. 이 문장을 진정으로 깨닫기까지 꼬박 1년이 걸렸다.




한나 아렌트라는 철학자가 있었다. 그녀는 유대인 말살 정책을 펼쳤던 나치의 직간접적인 피해자다. 그녀는 나치에 의해 교수 자격을 박탈 당하고, 프랑스로 도망가 유대인 수용소에 감금당했으며, 미국으로 망명을 가게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녀의 가족, 친구, 동료, 동포는 아우슈비츠로 대표되는 유대인 수용소에서 끔찍한 고문과 학살을 당했다. 그런 그녀가 아우슈비츠의 중간 관리자로 수십만 명의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데 일조한 ‘아이히만’의 전범 재판에 참석한다. 그리고 아이히만을 보며 그 유명한 ‘악의 평범성’을 말한다. ‘악의 평범성’의 골자는 이것이다. “아이히만이 수십만명의 유대인을 학살하는 데 아무런 거리낌도 죄책감도 느끼지 않은 것은 그가 악마라서가 아니다. 그는 그의 주장대로 상부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는 성실한 공무원이었던 것이 맞다. 그의 죄는, 그의 본성의 악함보다는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어떤 고통을 초래할지 전혀 고려하지 못한(혹은 공감하지 못한) 철저한 무사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나 아렌트의 주장은 유대인이 아닌 우리가 보기에는 타당할뿐더러 심지어 경탄할 만하지만, 같은 피해자인 유대인이 보기에는 속이 뒤집어질 만한 주장이 아닐 수 없다. “너는 지금 아이히만이 우리랑 똑같다는 거야? 그러면 넌 우리도 저 상황에 있으면 수십만 명의 사람들을 학살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네? 아이히만도 상부의 지시를 따랐을 뿐이니까 죄가 없다는 거네? 너 지금 쟤 편 드는 거야? 너 대체 누구 편이야?” 실제로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을 주장한 후 동료 유대인들로부터 많은 비난과 배척을 받았다. 편을 가르지 않으려는 사람은 언제나 양쪽 편 모두에게 배척당할 수밖에 없다. 모두의 친구가 되려는 사람은 반드시 모두의 적이 될 수밖에 없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야기를 생각해보자. A는 B에게 상처를 입혔다. B는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A를 증오하게 된다. A는 가해자고, B는 피해자다. 그런데 애초에 A는 왜 B에게 상처를 입힌 것일까? 피해자인 B의 입장에서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다시 말해, 유대인의 입장에서 아이히만이 왜 자신들에게 그렇게 큰 상처를 입혔는지 아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하지만 여기서 피해자의 심리적 방어기제가 작동할 수밖에 없다. 놀랍게도 세상의 대부분의 ‘가해’는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아렌트가 지적했듯 대부분의 가해는 ‘철저한 무사유’, 조금 더 쉽게 풀어서 이야기하자면, 별 생각이 없이 일어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니까 어떤 이에게 앙심을 품어서 저 새끼를 죽여버리겠다는 명료한 의도를 가지고 상처주는 경우보다는, 그냥 별 생각 없이 한 일이 어떤 이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되는 경우가 훨씬 많다. 다시 말해 누군가가 나를 죽이겠다고 조준해서 쏜 총에 맞는 경우보다, 누군가가 아무 생각 없이(아이히만처럼 누가 시켜서이든, 단순히 재밌을 것 같아서이든, 아니면 질투나 어깃장처럼 순간적인 감정 때문이든) 누른 버튼이 알고 보니 폭탄 버튼이어서, 옆에 있는 사람들이 줄줄이 죽어나는 경우가 훨씬 많다는 것이다. 하지만 피해자의 입장에서 ‘아무 이유도 없는’ 가해를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세상의 대부분의 가해가 별 이유없이 일어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피해자는 아무 이유 없이 또 이만큼의 상처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 역시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고, 아무런 이유도 없는데, 옆에 터진 폭탄에 맞아 다칠 수 있는 세상. 그런 세상이 얼마나 무섭겠는가? 그러니 피해자는 자신이 납득할 만한 가해의 이유를 집요하게 찾을 수밖에 없다.


아이히만의 가해의 이유는 무엇인가? 있는 그대로의 이유는, 사실 별 게 아니다. 아이히만은 정말로 상부에게 칭찬받기 위해 충실히 유대인들을 학살한 것이 맞다. 만일 아이히만에게 주어진 임무가 다른 것이었다면 아이히만은 그 임무를 충실히 다했을 것이다. 하지만 피해자 입장에서 그 ‘별 거 아닌’ 이유를 받아들일 수는 없다. 그렇게 ‘별 거 아닌’ 이유로 이 만큼의 가해를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또 ‘별 거 아닌’ 이유로 이 만큼의 끔찍한 피해를 받을 수 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피해자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이 조금 더 납득하기 쉬운 이유를 찾으려고 한다. 아이히만은 예외적으로 악랄한 사이코패스이기 때문에 이만큼의 가해를 저지를 수 있었다고, 아이히만을 악마화하는 것이 한 예이다. 그리고 이보다 가벼운 가해의 경우, 이 모든 가해의 이유를 자신 탓으로 돌릴 수도 있다. “대체 내가 뭘 잘못했길래 이런 상처를 받아야 하지?“ 상처받은 피해자는 대부분 이런 생각에 잠식된다. 이런 생각을 밖으로 표출되면 세상에 대한 원망과 억울함으로 귀결되고, 안으로 표출되면 “내가 뭘 잘못했겠지”라는 체념과 자기파괴에 이르게 된다.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대부분의 가해는 ‘별 이유 없이’ 일어나기에, 대부분의 피해 역시 ‘별 이유 없이’ 일어나는 것이다. 내가 무슨 잘못을 해서 상처받는 일보다는, 내가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는데 그냥 상처받는 일이 훨씬 더 많이 일어난다. 세상이 그렇다는 걸 받아들이기에 우리가 너무 나약하기에 그 사실을 제대로 보지 못할 뿐이다.



많은 부모는 자식에게 상처를 준다. 자식은 그런 부모를 증오하게 된다. 그런데 부모는 자식이 잘못을 해서 혹은 자식을 증오해서 상처를 준 것일까? 아니다. 본인의 정돈되지 않은 피해의식, 자식에 대한 소유욕, 사회적 시선에 대한 공포 등등 자식과 별 상관없는 이유 때문에 자식에게 상처를 주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식이 훗날 부모에게 받은 상처를 이야기하면 부모는 당황하는 것이다. 부모가 정말 자식이 미워서 조준해서 총을 쏜 것이라면 상흔을 보고 당황하지 않을 테다. 하지만 대부분은 눈 감고 난리치다가 자기도 모르는 새 폭탄 버튼을 눌렀던 것이기에, 그로인해 상처받았다고 얘기하면 당황하는 것이다. 폭탄에 맞은 피해자는 가해자가 그 폭탄이 눌렀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가해자에게 “너 때문에 상처받았잖아“라고 따질 수 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왜 날 해친 거냐고 물을 수 있다. 하지만 잘못을 해서 폭탄을 맞는 게 아니다. 세상에 수많은 ‘무사유’한 이들은 자기도 모르는 채 폭탄 버튼을 누른다. 길을 가다 건물에서 떨어지는 돌에 맞아 평생 불구가 될 수도 있듯, 가만히 있다가 누가 아무 생각 없이 누른 폭탄에 맞아 온 마음에 화상을 입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 가해자에게 찾아가 “너 때문에 온 마음에 화상을 입었잖아”라고 말을 해도, 아무 생각 없이 버튼을 눌렀던 그 가해자는 “그게 왜 내 잘못이야?” 혹은 “난 널 다치게할 생각은 없었어.”라고 답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본인은 정말로 누군가를 해칠 의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무리 가해자에게 피해자들의 고통을 보여준다 한들, 가해자가 진심으로 뉘우치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 이유다. 네가 아무 생각 없이 누른 버튼 때문에, 저 많은 피해자들이 팔다리가 잘렸다고 보여줘도, 가해자는 제대로 보지 않거나 ”그게 어떻게 내가 한 일이야?“ ”난 그럴 줄 몰랐는데?” “난 그럴 의도가 없었어” 등으로 다 퉁칠 수 있다. 악의나 의도가 없었던 가해에 대해서 가해자는 놀라울 만큼 자신에게 관대하다. 가해자를 악마화하고 싶은 피해자. 그리고 자신이 생각없이 한 가해에 대해 관대한 가해자. 이 둘 사이에 이해와 용서가 일어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아렌트는 왜 아이히만을 이해하려고 노력한 거죠?”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만, 아렌트는 칸트를 흠모했기 때문일 거다.”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에 이해가 일어나는 일은 극히 드물다. 왜일까?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이해하는 일은 엄청나게 애를 써야 하는 작업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기쁨인 연인 관계에서조차 상대방을 이해하는 데에는 많은 고행과 시행착오, 상처와 오해를 감당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인이 서로를 이해하려고 애를 쓰는 것은 상대를 잘 이해해서 그에게 사랑받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슬픔인 피해자-가해자의 관계에서는 서로를 이해할 동력이 전혀 없다. 피해자는 가해자를 보면 자신이 받은 상처가 계속 생각나기 때문에 슬프다. 그래서 피해자는 가급적이면 가해자를 보고 싶지 않다. 가해자도 마찬가지다. 가해자는 피해자를 보면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어떤 이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자기가 ‘사랑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인지할 때 슬퍼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가해자도 피해자를 외면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왜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외면하지 않은 걸까?


아렌트는 칸트의 제자다. 칸트는 어떤 상황에서도 이성적인 판단을 하는 것을 중히 여겼던 철학자다. 스승의 해석이지만, 아렌트는 칸트에게 사랑받기 위해(칸트의 정신을 이어가기 위해) 아이히만을 보고도 요동치는 감정을 뒤로 한 채 철저하게 이성적으로 사유하려고 애썼던 것 아닐까. 가해자와 피해자가 애초에 사랑의 관계였다면, 서로를 이해할 틈은 조금 더 넓다. 부모가 무지해서 자식에게 상처를 주고, 자식이 훗날 그것을 부모에게 이야기했을 때, 부모는 자신의 가해를 외면하고 싶어도 완전히 외면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상처받았다고 말하는 이가 바로 자기가 사랑하는(사랑했던) 자식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자기가 악의가 없고 의도도 없었다고 해도, 사랑하는(사랑했던) 이가 자신 때문에 상처 받았다고 하면 자신을 조금은 돌아볼 수밖에 없다. 문제는 사랑이 아닌 관계에서 일어난 가해다.


"과감히 알려고 하라.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 - 칸트. 아렌트만큼 칸트의 정신을 온몸으로 껴안으려고 한 이가 있을까. 아렌트는 칸트의 제자가 맞다.


누구나 자기가 좋은 사람이라고 믿고 싶은 게 인간이다(자기가 쓰레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양상만 뒤집혀 있을 뿐 사실은 자기가 좋은 사람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누가 자기가 가해자라는 걸 받아들이고 싶겠는가? 내가 사랑하는 이가 나 때문에 상처받았다고 직접적으로 이야기해도, 자신의 잘못을 온전히 돌아보기 힘든데, 하물며 내가 사랑하지도 않는 이가 나 때문에 상처 받았다고 한들, 어떻게 아니 왜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겠는가? 그것은 마치 내가 무심코 밞아 죽인 개미가 꿈속에 찾아와 “너 때문에 내가 죽었다”고 말한들 별로 미안하지 않은 것과 같다. 진짜로 미안하면 다음 날부터 개미에게 미안해서 길을 걸어다니지도 못할 테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양분되어 자기 편에서 단 한 발자국도 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서로는 서로를 이해할 동력이 없다. 애석하게도, 일반적인 인간은 자기가 사랑하지 않는 이의 상처에 대해서 마음이 아플 수 없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 진정으로 마음이 아프지 않는 이상, 진정한 미안함도 뉘우침도 삶의 변화도 일어날 수 없다. 그 상태에서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이해와 용서는 요원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동력은 역시나 사랑 하나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사랑의 관계가 아니라면, 그 사랑을 다른 곳에서 땡겨와야 한다. 아렌트가 아이히만을 사랑했을 리는 없다. 하지만 아렌트는 칸트를 사랑했다. 칸트를 사랑했기에 칸트가 원하는 것을 하고 싶었다. 그 결과 아렌트는 칸트에게 사랑받았을 것이다(여기서 사랑받는다는 것은 직접적인 칭찬이나 인정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아렌트에게 대체할 수 없는 기쁨이었을 것이다. 아이히만도 마찬가지다. 아이히만도 아렌트든 유대인이든 사랑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래서 아이히만은 그들의 고통을 느낄 수 없다. 하지만 아이히만도 사랑받고 싶은 한 사람이 있으면 된다. 그 사람을 통해 비록 그들의 고통이 뭔지 모르겠더라도 느껴보려고 최대한 애써보면 된다. 그 과정에서 아이히만은 자신이 별 생각 없이 저지른 가해의 여파를 진심으로 직면할 수 있다. 그렇게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직면하면 시간이 흐른 뒤, 유대인의 고통이 꼭 아니더라도 다른 이의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된다. 그때 아이히만은 아렌트에 대한 이해의 시작점에 서게 될 것이다.




다시 피해자의 이야기로 돌아간다. “내가 왜 나에게 상처준 사람을 이해해야 하지?” 이해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것을 이해하고 싶지 않은 이유가 ‘자기 보호’의 마음 때문이라는 것은 알아야 한다. 세상의 가해는 대부분 별 이유 없이 일어난다. 이것이 있는 그대로의 삶의 진실이다. 하지만 이 진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또 다시 아무 이유없이 상처받을 것 같다. 그게 무서워서 가해자를 이해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누군가에게 이유 없이 상처 받았다. 나는 그에게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다. 단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그의 질투의 대상이 되었을 뿐이다. 그 질투에는 초점이 없었다.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도 그 질투의 대상이 될 수 있었고, 그 다른 사람도 나처럼 별 다른 잘못 없이 상처를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아무 이유 없이 믿었던 사람에게 상처를 받고 나는 한동안 사람이 무서워졌다.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상처받을 수 있는 거라면, 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지? 믿었던 사람이 이렇게 날 해칠 수 있는 거라면, 난 앞으로 사람을 어떻게 믿어야 되지? 하지만 이제는 받아들일 수 있다. 아무 이유 없이 길가다가 성폭행 당할 수도 있고, 아무 이유 없이 수십만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학살당할 수도 있다. 이런 일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곳이 바로 이 세상이다. 그런 세상을 ‘공포’와 ‘경멸’이 아닌 담담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 내가 입은 상처가 상대방의 엄청난 증오나 악마적인 마음 혹은 나의 잘못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어찌보면 평범한 질투심, 자신의 잘못을 외면하고 싶은 나약함, 자기가 한 일의 여파에 대해 능동적으로 책임지고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되겠지’라는 마음으로 모든 게 알아서 해결되길 바라는 수동성과 의존성이 더해진 결과임을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피해자가 할 수 있는 ‘이해’의 시작이다.


그야말로 아무런 잘못 없는 무고한 이들이 수없이 희생되는 사건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계속 일어나고 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가해의 이유'를 명확히 밝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하다.


난 이제 알고 있다. 가해자는 악마가 아니다. 그는 나에게 상처를 주었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이며, 나의 친구들의 친구이며,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사람임을 안다. 그가 아름다움을 보고 느낄 수 있으며, 아름다운 사람이 되려고 나름의 애를 쓰고 있는 것도 안다. 그가 나에게 준 상처가 질투심, 나약함, 우유부단함, 수동성처럼, 나에게도 있으며, 나 또한 언젠가 그것 때문에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던 적이 있는, 그런 보편적인 속성들이 더해진 결과임을 안다. 그가 나를 좋아했던 것도 싫어했던 것도 둘 다 진심이었음을 안다. 그가 나에게 상처주는 동안 주었던 마음들이 소름끼치는 기만이 아니라 그 나름의 진심이었음을 안다. 상처와 호의는 공존할 수 있으며, 그 때문에 내 마음에도 증오와 고마움이 공존할 수 있다는 걸 안다. 싫어하는 대상에게 매력을 느낄 수 있다는 것도 안다. 그가 나에게 호감과 비호감을 동시에 느꼈던 것처럼, 나 또한 그에게 비호감과 호감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는 것도 안다.




이해와 용서는 다르다. 이제 나는 그를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를 용서할 수는 없다. 그를 이해하기에 더욱 용서할 수 없다. 아렌트가 아이히만을 이해했다고 해서 아이히만을 용서했을 리는 없을 테다. 가해자의 서사를 이해하는 이는 오히려 가해자를 용서할 수 없다. 가해자를 쉽게 용서하는 이는 오히려 가해자의 서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이일 것이다. 이게 대부분의 사람들이 놓치는 지점일 테다. 말하자면 가해자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가 한 잘못의 원인과 여파를 정확히 계산하는 것이다. 아이히만은 ‘무사유’로 수십 만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사람들은 아렌트가 아이히만의 가해의 이유를 ‘무사유’로 지목했다고 해서, 수십 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잘못을 용서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오해한다. 아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죄를 용서한 적이 없다. 아렌트가 주장한 것은 ‘무사유’의 무게다. ‘무사유’해서 수십 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죄를 저질렀으니 그 만큼 ‘무사유’의 죄가 무겁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는 너무 쉽게 몰라서 한 죄는 용서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니다. 몰라서 한 죄도 죄다. 어쩌면 더 무거운 죄다. 아렌트는 그걸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용서의 지점도 명료해진다. 우선 피해자는 가해자를 이해하지 않아도 된다. 난 그랬으면 좋겠다. 상처받는 이가 가장 먼저 해야하는 것은 ‘자기보호’다. 하지만 칸트를 흠모했던 아렌트처럼 어떤 이유에서든 가해자를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다면, 피해자의‘이해’는 가해의 이유와 피해의 범위를 명확히 파악하는 것에서 시작될 것이다. 그러니까 자본주의적으로 이야기하면, 누군가가 내 돈을 훔쳐 갔을 때,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보복할 수도, 그 빚을 영원히 못 갚게 함으로써 평생 고통받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그 빚을 갚게 해주겠다고 마음 먹었다면, 일단 왜 돈을 훔쳐 갔는지 가해의 이유를 알아내고, 얼마의 돈을 훔쳐갔는지 피해의 범위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가해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가해자 또한 자신의 잘못을 돌아볼 이유가 없다면 도망다녀도 된다. ‘무사유’한 상태에 있는 것만큼 마음 편한 일도 없다. 하지만 그 역시 어떤 이유에서든 상황을 바꿔보고 싶다면, 우선 자신이 한 일이 얼마만큼의 피해를 끼쳤는지 명확하게 계산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에게 의도가 있었든 없었든, 악의가 있었든 없었든, 이렇게 될지 알았든 몰랐든 다 중요하지 않다. 이유가 어쨌든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피해받은 피해자(들)가 존재한다는 것, 그 피해의 액수는, 예를 들면 2억이라는 것. 그것을 직면하는 것. 그것이 가해자의 ‘이해’의 시작이다.


‘용서’는 가해자가 그 빚을 모두 갚았을 때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 빚을 갚는 과정에서 사실 그 빚이 1억이었을 수도 3억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빚이 갚지도 않았는데 0원이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해’와 ‘용서’를 같다고 생각하는 것은, 누군가 나에게 훔쳐간 돈이 2억이라는 것을 파악하는 것과 그 2억을 아무 이유 없이 변제해주는 것이 같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내 돈을 훔쳐간 이유를 이해할 수 있고, 그 훔쳐간 액수가 2억이라고 특정할 수 있다고 해서, 그 빚 2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걸 아무 이유 없이 변제해준다면 채권자 또한 피해의식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리고 빚을 갚지도 않으면서 채권자가 언젠가 알아서 빚을 변제해주길 기대하는 것 또한 채무자의 태도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도둑놈 심보다. 마음의 빚 또한 마찬가지다. 누군가에게 마음의 빚을 졌다면 갚으면 된다. 진짜 미안하면 갚으면 된다. 엉뚱한 데 갚으려 하지 말고, 빚진 사람에게 갚으면 된다. 만일 갚고 싶지 않다면 돌아볼 일이다. 진짜로 미안한 게 맞는지. 진짜로 소중한 것을 되찾을 마음이 있는지. 자신에게 ’내가 상처받기(소외되기) 싫은 마음’보다 소중한 것이 있는지. 그 모든 게 정말로 절박한지. 무사유의 잘못은 ‘사유’로 갚을 수밖에 없다. '사유'의 시작은 언제나 '나'의 입장에서 벗어나, ‘너'의 입장에서 '너'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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