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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하 Sooha Oct 23. 2020

3. 출발, 움직임의 시작

전국이 떠들썩하다. 유례없는 전염병으로 인하여 나라가 혼돈의 도가니에 빠졌다. 연일 뉴스에 보도가 끊이질 않고 재난 문자가 울려댄다. 집마다 야단스럽고 한국을 넘어 세계가 난리 통 속인 가운데 거리만은 고요하다. 조심하라는 경보에 바깥에 인기척을 찾을 수 없다. 지하철이며 버스며 텅 비었다. 손님 하나 태우지 못하고 역을 출발하기 다반사다. 국민들은 외출을 자제했고 나 또한 급작스러운 흐름에 쓸려 집에 틀어박히게 되었다. 대다수가 그렇듯 자의는 아니었다.

2월 마지막 주부터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아버지를 제외한 가족들 전원이 집에 칩거하기 시작했다. 하루의 반 이상을 홀로 보내던 시간에 엄마에 이어 오빠까지 들어왔다. 복작복작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가뜩이나 무기력한 두 달을 보내며 두문불출했는데 조금 괜찮아지려는 차에 나가지 말라니. 게다가 혼자만의 시간을 빼앗긴 채로. 옥상이라도 올라가 해를 쬐고 신선한 공기로 기분을 전환하면 좋으련만 그건 또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정말 현관문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결국 일주일 만에 뿔이 났다. 좀이 쑤셔서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1월에 이은 두 번째 방 대청소를 하고 유튜브를 보며 요리를 따라 하고 드라마와 영화를 보고 웹툰에 책까지 섭렵했지만 참을 수 없었다. 우울증으로 나가지 못했을 때와 별반 다를 바 없는데 이상하리만치 답답하고 활동성을 주체하지 못했다. 더 할 일이 없자 방마다 돌아다니다 마침내 운동을 시작했다.


작년 하반기 동안 출간을 준비하며 은둔하느라 체중이 급격히 불어났다. 평상시보다 5kg이 쪘고 체력과 근육량은 급격히 떨어져 비실비실한 상태로 새해를 맞이했다. 한 살 더 먹었다고 더 허약해졌고 잠시 외출을 다녀오면 반나절은 누워있어야 했다. 결심은 빨랐다. ‘그래, 이왕 집에만 있게 된 거 운동을 하자. 건강을 회복하고 체력도 좋아지고 심심할 틈 없이 주체 못 하는 기운을 발산해버리자!’ 일석사조였다. 때마침 3월 1일이 되었고 바로 실행에 옮겼다. 할 수 있는 운동이라곤 헬스를 다니며 배운 스쿼트 뿐인 데다 이 몸으론 얼마 하지도 못하니 나름 전문가라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없는 게 없는 만능 유튜브에서 이 영상 저 영상을 따라 했다. 안타깝게 많은 영상은 동작 하나 시도하지 못한 채 고꾸라지고 말았지만 며칠간 끈질기게 클릭하며 내가 할 수 있으면서 재미까지 있는 영상들을 찾았고 일주일간 본격적으로 따라 했다. 기상 후 운동 1시간, 자기 전 스트레칭 1시간. 동작 하나마다 제대로 수행하려니 몸이 벌벌 떨렸다. 하지만 안 되지만 되는 만큼, 딱 할 수 있을 만큼 하다 보니 첫날 되지 않던 동작이 일주일 뒤엔 그럴듯한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다.


그날도 스트레칭을 마치고 씻으러 들어간 참이었다. 물을 틀고 거울 앞에 서서 내 몸을 응시했다. 샤워를 위해 벌거벗은 몸이 적나라하게 비쳤다. 굽은 목과 어깨, 휜 허리, 틀어진 골반. 잔뜩 불어나 물렁물렁한 살, 근육이라곤 없어 탄력 없는 피부. 충혈된 눈과 다듬어지지 않은 머리카락, 아토피로 인해 군데군데 긁은 상처, 여기저기 어디에서 생겼는지 모를 멍. 총체적 난국에 만신창이 같은 몸이 비루하고 볼품없다.

내 몸을 집요히 훑으며 자신을 얼마나 방치해왔는지 뼈저리게 직면했다. 이런 모습이 싫어 빠르게 고개를 돌리지만 몸보단 나를 방치해왔던 시간과 그럴 수밖에 없던 나약했던 내가 싫었다. 마음에 드는 구석 없는 몸이 마음에 드는 구석 없는 나를 쏙 빼닮았다. 되는 대로 시간에 밀려온 흔적. 피부병을 견디느라 변색된 피부와 살이 쪄서 트고 갈라진 줄이 흉터처럼 새겨졌다. 이 몸에는 스스로를 포기했던 시간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나를 외면하고 돌보지 않았던 과거가 기록되어 있다.

나는 내 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싫다. 진짜 싫다. 버리고 싶다. 그래서 달라지고 싶었다. 변태하는 곤충처럼 새로 태어나 영원토록 변하고 싶었다. 이 몸에서 벗어나 새로운 몸을 갖고 싶었고, 지금의 나에게서 탈출해 새로운 나로 변모하고 싶었다. 새롭게, 새로운 몸으로 새로운 나로 새로운 삶을.


곧고 반듯한 자세와 탄탄한 몸으로 가다듬어 움직여도 불편하거나 아프지 않았으면 했다. 뛰어난 체력을 가지고서 아침에 개운하게 일어나 밤이 되면 적당히 노곤해서 기분 좋게 잠들고 싶었다. 실이 끊어진 마리오네트나 물먹은 솜같이 축 늘어지지 않고 무기력은 딴 나라말인 양 활기가 넘치게 일상을 보내는 꿈을 꾸게 되었다. 유연하게 어떤 동작이든 소화해 내가 원하는 일을 능히 할 수 있고, 넘치는 에너지로 내가 원하는 곳으로 나를 데려가는 날이 오길 원하게 되었다.

바람이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순간, 예전에 봤던 방송이 뇌리를 강타했다. 언젠가 ‘대화의 희열’에 출연한 모델 한혜진이 했던 말이 머리를 강하게 뒤흔들며 열망이 치솟았다. 당시엔 대단하다며 감탄하면서 난 저렇게 못 한다며 한 귀로 듣고 흘렸는데, 지금 이 순간에 느닷없이 불을 밝혔다. 그리고 굳게 다짐했다. 이번엔 포기하지 않고 한 번 해보겠다고.


굳게 다짐한 그날부터 다시 산책을 하러 나갔다. 해가 주황빛으로 물들기 전에 집을 나가 2시간씩 걸었다. 매일 시간을 빼는 대신 1시간씩 하던 운동과 스트레칭을 그만두고 일어나서부터 몸을 바지런히 움직이고 틈이 날 때마다 스트레칭을 했다. 마침 1월부터 부단히 시도하던 디지털 디톡스가 궤도에 올라 휴대폰 사용 시간이 확연히 줄었고 누워서 아무것도 안 하던 때보다 시간이 남았다. 산책하고 와서 쉬어도 다른 일을 할 여유가 충분했다. 꾸준한 산책 덕분에 체중이 줄고 자세가 조금씩 바르게 변하며 통증이 사라졌고 체력이 붙자 신이 났다. 튀어나온 견갑골이 결려 뒤척였는데 미세하게 교정되며 잠자리가 편해지자 잠들기가 수월해졌다. 쓰지 않던 근육이 긴장하자 내가 얼마나 힘없이 흐느적거리며 살아왔는지 몸소 실감했다.


활력이 돋았다. 내 인생을 통틀어 이렇게 활기가 넘치고 상쾌하고 개운한 적은 처음이다. 새로 태어난 기분이라는 말이 1% 정도 짐작된다. 바위같이 굳었던 몸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멈췄던 인생의 바퀴가 다시 굴러가는 기분마저 든다. 이제 산책을 다녀와서 쉬지 않아도 너끈하게 생활한다. 늘 찌뿌둥했던 몸이 놀랍도록 가볍다. 하루가 의지대로 흘러가니 계획을 세우고 규칙적인 리듬이 생겨났다. 입맛이 돌아 점심과 저녁을 든든하게 챙겨 먹게 되었고 야식과 과자를 자제하니 식습관이 저절로 개선되었다. 이제 가짜 배고픔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음식을 먹어도 허기진 것 같은 마음은 뭔가 채워 넣고 싶은 욕구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욕구는 먹는다고 해결되지 않고 내 삶에 집중하고 충실하며, 진정으로 욕구하는 바를 충족시키면 해소된다는 것 또한 경험했다.

살맛이 난다. 더 움직이고 싶다. 재미가 들리니 몸이 근질거린다. 더 시원하고 효과 좋은 운동을 하고 싶다. 하물며 재미가 없고 힘들어서 그만둔 헬스장이 그리워질 정도니. 보이는 곳부터 하나씩 바꿔나가자는 목표를 하루빨리 달성하고 싶어 필라테스와 수영을 알아보고 있다. 근력과 유연성이 늘어나면 요가도 배우고 싶다. 취미 삼아 국궁과 플라멩코도 해보고 싶다.


눈으로 눈치챌 만큼 극적인 변화는 없지만 분명 좋아지고 있음을 느낀다. 몸이 달라지니 생각과 마음이 달라진다. 살만하다. 기분이 좋아지고 생각이 밝아졌다. 흐렸던 감정이 깨끗하게 보여 불필요하게 소모되던 에너지가 남는다. 마음에 낀 불순물을 치워버린 대신 생기가 돋는다. 재미, 즐거움, 신남과 행복, 평안, 만족이 차오른다. 그야말로 사는 게 즐겁다.

아무리 충전해도 에너지가 차지 않는 고장 난 배터리처럼 방전되어 살아왔는데 요즘은 휴식을 취하는 만큼 충전된다. 딱히 시간을 내어 쉬지 않아도 잠을 푹 자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하루를 살아갈 힘이 생겨난다. 지금에 몰입하여 이 순간의 삶에 충실하게 임할 수 있다. 생활을 통제하고 원하는 대로 꾸리니 더 열심히 운동(이라 부르고 산책)하고 더 열심히 살고 있다. 내 생애 최초로 선순환의 고리를 빚었다. 좋음이 연달아 일어난다.


오늘부터는 걸음걸이를 교정하기로 마음먹고 실제로 2시간 동안 연습하고 왔다. 교정되지 않은 몸으로 무리를 해서인지 발목이 아파서 고민하고 있었는데 역시 유튜브에서 우연히 본 영상에 자극을 받아 따라 해보았다. (이쯤 되니 유튜브를 많이 보고 맹신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다. 3월부터는 어쩌다 며칠에 한 번 본다.) 근육을 사용해서 바르게 걷는 것이 어찌나 힘들던지. 땀이 뻘뻘 나고 가뜩이나 가는 근육에는 힘이 자꾸 빠졌다. 배에 힘을 주면 엉덩이와 허벅지에 힘이 빠지고, 다리를 펴면 허리가 굽으려 하고 허리를 펴면 다리가 힘차게 나가질 않고. 그래도 신경을 쓰며 걸었더니 서서히 요령이 붙고 익숙해져 집으로 돌아올 즈음에는 가뿐하고 힘차게 걸을 수 있었다. 하체와 상체 모두 쫙 펴서 걸으니 뼈가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것 같다. 나의 워너비 김연아 선수가 떠오른다. 군더더기 없고 자신감과 기품이 넘치는 자세와 당당한 걸음걸이가 어른거린다. 나도 닮아가도록 노력하자. 의지를 다진다.



여기서 더 체력이 붙고 몸매가 정리되고 몸이 곧아지고 유연해지면 어떨까. 시간이 흐르면서 눈에 보이는 변화를 목격하면 더 추진력을 얻게 될 것이다. 기대돼서 또 몸이 들썩거린다. 몸을 가만히 두기 힘들다. 산책하면 조깅하는 사람을 많이 만나는데 며칠째 그들을 따라 달리고 싶다. 덩달아 뛰어나가고 싶어 안달한다. 누구나 인생에 쉬는 시기와 달리는 시기가 있고 나는 오늘까지 쉬엄쉬엄 살아왔으니 이젠 힘차게 달리고 싶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가슴이 뻐근해질 때까지 아주 힘껏 달려 나가고 싶다.


태어난 뒤로 가장 희망차고 의욕적인 나날을 보내고 있다. 정신과 전문가들이 “운동하세요. 산책하세요.” 말할 때마다 속으로 ‘나도 아는데 안 되는 거거든요! 내가 할 수 있었으면 진작 했지!’라고 항변했는데 직접 경험하니 수긍할 수밖에. 여기 사례 하나 더 추가요.


운동을 시작한 지 3주 가까이 흘렀고 식단조절 없이 3kg이 줄었다. 근육량은 늘고 체지방은 감소했다. 야호! 생활 습관을 개선하기 위해 1월에 설정해둔 목표를 나날이 따낸다. 이제 7시에 일어나 11시 전에 산책을 마치고 돌아와 본격적인 생활을 시작한다. 매일 2시간 동안 햇볕을 쬐며 희망이 솟는다. 저녁에 사라지더라도 내일 다시 희망을 충전하면 된다. 해는 매일 뜨니까. 운동과 햇살은 꺼지지 않는 희망이자 나의 무한동력이 되었다.


글 한 편을 쓰느라 몸이 굳었다. 약해진 손목이 시큰하다. 모처럼 장문을 완성한 기념으로 스트레칭을 해야겠다. 헛둘헛둘. 쭉쭉. 건강해져라. 건강한 몸과 정신으로 편하게 오래 살자.


"다 벗고 거울 앞에 섰을 때 본인 몸에 만족하세요? 근데 바꿀 수 있잖아요. 세상에서 제 의지로 바꿀 수 있는 게 몸 밖에 없더라고요. 세상에 어떤 것도 제 마음대로 안 돼요. 일도 사랑도 제 마음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어요. 근데 유일하게 내 컨트롤 하에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몸이에요. 유일하게 나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는 일이에요. 
몸 만드는 게 제일 쉬워요. 세상사 중에서 몸만들기가 그래도 쉽다고 하는 이유는 적어도 배신하지는 않기 때문이에요. 지식이나 언어를 익히는 결과는 눈에 보이지 않아요. 근데 몸은 늘 장착하고 있잖아요. 나도 보고 남도 보고 만질 수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몸을 만드는 것만큼 남는 게 없어요. 운동은 실제로 보고 만질 수 있는 결과를 가져와요. 옷도 잘 받죠. 눈으로 건강한 내 몸을 바라보면 정말 자존감이 확 올라요." 
「대화의 희열」 한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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