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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진 Jul 24. 2021

해외 박물관 도전기

제3장, KF 글로벌 챌린저 박물관 인턴십




처참하고 힘든 대학원생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견뎌내고 여기까지 온 이유는 미술사학이라는 학문이 굉장히 매력 있기도 했지만, 단점을 넘어서는 박물관이라는 공간의 매력 때문이었다. 특히 국립중앙박물관은 조용하고 깨끗하고, 당시에만 하더라도 방문하는 사람도 별로 없어서 쾌적하고 화장실도(?) 많고 커서 좋았다.


무엇보다도 오랫동안 염원해왔던 해외 박물관에서 일할 경험을 얻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모든 크고 작은 어려움을 견뎌낼 가치가 있었다. 왜냐하면 나의 유년기 짧았던 미국 생활을 마무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후 자율성과 다양성이 없는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다시 미국이든 어디든 서양으로 나가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과연 나는 그 행복을 영국에서 찾았을까? 차차 이어질 회차를 통해 이 이야기를 덧붙여 나가야겠다.


그리고 매우 운이 좋게도, 대학원에 입학하고 3년 뒤 2018년에 난 런던 영국박물관(British Museum)의 인턴으로 소중한 6개월을 보내게 된다.


여덟 단계의 인간 발전 군상을 묘사한 영국박물관의 박공 또는 페디먼트(Pediment)


왜 해외 박물관을 꼭 가보고 싶었던 걸까?


미술사학이 매력적인 것도 물론 한몫을 했지만, 사실 초등학생 시절 부모님과 미국에서 거주하면서 피부로 느낀 나(我)와 타인(他我)이라는 개념을 인식하게 된 것도 내가 미술사학을 선택하는 데 큰 몫을 한 것 같다.


한국에서는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피부색, 눈동자의 색, 말투, 모두가 대체로 공유하는 일련의 문화적 관습들이 존재했고, 굳이 그들과 나를 문화적 맥락 안에서 구별 지을 필요가 없었다. 물론 경제적, 지역적 차이에 따른 차별이 있었을지는 모르나 그것이 크게 다가올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미국에서의 경험은 나와 신체적 특징이 너무나도 다른 이웃들, 나의 부모의 가르침과는 다른 양육 환경에서 자란 친구들, 상이한 식문화, 사회 예절 등이 난무한 곳이었다.


(인종, 성별, 문화를 떠나 인간의 생존 목적은 거기서 거기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2001년, 미국 같은 반 친구들의 귀여운 모습. 지금은 다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때부터 미국의 것과 다른 나의 문화인 '한국'의 역사, 예술, 문화 등에 대한 인식이 모든 나의 사고방식의 배경이 되었다. 한국에 돌아온 후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을 거치면서 치열한 입시경쟁에 치여 내가 원하는 것을 돌아보지 못했다가, 대학에 입학하면서 진짜 하고 싶은 것을 고민하게 되었다. 여기에 더해 학부시절 1년간 미국으로 교환학생을 가 있는 동안 미국 동부에 있는 유명한 박물관은 전부 견학하며 '한국 전시실'의 콘텐츠와 구조에 많은 의문을 갖게 되었다.


201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해외에서 바라본 한국은 지금과 사뭇 달랐고 유명한 몇몇의 운동선수를 제외하고는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그나마 우리나라를 알리는 데 기여했던 것 같다. 사실 강남스타일도 노래가 당시 대중의 감성을 건드렸던 것이지, 그것이 한국의 것이라 각광받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한국' 문화가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넷플릭스를 통한 한국 드라마의 대중적 전파, BTS를 통한 세계인의 인식 확산 등이 더 결정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때 당시 방문했던 대부분의 박물관/미술관의 한국실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연대기적 전시 방식을 차용하여 뻔하고, 지루하고, 고루한 느낌만 가득했다. 한국은 이미 많은 부분에서 발전을 이루었는데, 막상 한국실만 가보면 마치 현대적 발전이 누락된 근대적 면모에 갇힌 국가처럼 느껴졌다. 기획이 없는 기획으로 이루어져 있던 이유는: (1) 담당 큐레이터가 중국이나 일본 미술을 하는 외국인이었을 것이고, 당시만 해도 한국에 크게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다른 곳보다 덜 심혈을 기울였을 가능성이 높고; (2) 한국을 잘 모르는 외국인에게는 가장 기본적이고 정석적인 연대기적 구성이 적격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때부터 난 우리의 예술을 갖고 '한국'의 문화와 가치를 해외에 더 잘 알리고 싶었다. 그러려면 미술사를 전공하고, 해외에서 근무할 수 있는 기회를 얻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때마침 학과 조교로 근무하면서 한국 국제교류재단(Korea Foundation)에서 매년 보내주는 KF 글로벌 챌린저 포스터를 보게 되었고, '바로 이거다.'라는 생각을 했다. 당연히 떨어질 것이라는 교수님의 예상이 틀렸음을 보여드리고 싶었고(?) 어느 때보다 열심히 준비한 덕에 난 한 번에 붙을 수 있었다. 나중에 날 뽑은 담당 큐레이터님의 얘기를 들으니 '인턴'을 뽑는 자리인 만큼 학습의 의지가 있는 사람을 선발했다 하셨다. 더 출중하고 능력 있는 분들이 계셨지만 이미 그분들께서는 여기서 어리숙했던 내가 배워 갈 수 있는 것보다도 많은 것을 품고 계셨기에 운이 좋게도 나에게 기회가 왔던 것 같다.



KF 글로벌 챌린저 - 박물관 인턴십 준비 과정


Great Court at The British Museum (직접 촬영)

1. 서류 전형


KF 글로벌 챌린저 중 박물관 인턴십 프로그램에 지원하기 위해서 가장 준비한 자료는 영어로 된 State of Purpose와 Resume이다. 이외에도 졸업증명, 성적증명, 경력증명이 필요하고, 지도 교수님 혹은 회사 관계자의 추천서를 받을 필요가 있다.


증명서의 경우, 자격요건에 충족하면 학교나 회사를 통해 발급받으면 되지만, 일종의 자기소개서 같은 State of Purpose는 조금 신경 써서 작성할 필요가 있다. 나의 경우에는 지원하는 기관의 소장품에 대한 사전 조사를 많이 했다. 특히, 지원 당시 근무했던 재단에서 용역으로 근무하며 해외 기관에 소장된 한국 소장품을 조사하는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더 재미있게 박물관 조사에 임할 수 있었다. 당시 나는 석사 수료 상태였고, 영국박물관의 소장품을 연구하여 학위 논문으로 발전시키고 싶다는 뜻을 강하게 피력했고, 당시 큐레이터 선생님께서 이를 좋게 봐주셨다.


당시 KF의 서포터스인 KFGF(Korea Foundation Global Futurist) 활동을 하면, 각종 KF 타 사업에 가산점을 준다는 이야기를 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글로벌 챌린저에 지원하기에 앞서 대학생들의 서포터스 활동인 KFGF를 대학원생 신분으로 참여했고, 가장 나이가 많았지만 대학생 때 못해본 대외활동을 하니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


그때 당시 같은 팀을 이루었던 분들도 너무 좋은 친구들이었고, 자주는 아니지만 아직까지도 연락하고 지내기도 한다. 다들 생각보다 겉으로 크게 의욕이 없었지만 의외로 주어진 과제에 열심히 참여하며 홍보용 스티커를 실제 제작하여 재단 홍보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 아마 이러한 활동까지도 해두었기 때문에 서류 전형에서 조금 더 유리하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2. 1차 면접 전형


1차 면접은 국내에서 진행되며, 아마도 KF 담당자와 외부 심사위원이 있었던 것 같다. 그때 당시 나는 을지로에 있는 미래에셋 건물에서 면접을 본 것 같다. 세 분 정도 앉아 계시고, 5명의 지원자가 들어갔다. 지원자들의 희망하는 파견 기관이 모두 달랐기 때문에 사실상 경쟁자는 아니었다. 다들 미술관/박물관 계열에서 근무하셨거나 이쪽 전공을 했던 우수한 분들이었다.


그러한 틈 속에서 나는 '왜', '반드시 영국박물관'이어야 하는지를 더욱더 강조했다. 나는 이전에 박물관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유경험자 틈에서 나의 강점을 살리기 위해서는 영국박물관의 소장품을 하나부터 열까지 세세하게 알고 있어, 파견되면 바로 업무에 투입될 수 있다는 장점을 피력해야 했다. 다행히 난 1차 면접에 합격했고, 2차 면접을 곧바로 준비했다.


3. 2차 면접 전형


2차 면접은 최종 면접 전형이며, 해당 박물관의 큐레이터와 심층 인터뷰를 진행하게 된다. 영국까지 날아가서 면접을 볼 수 없기 때문에 ZOOM으로 화상면접을 진행했다. 처음 해보는 화상면접이어서 너무 떨렸고, 나의 몸짓, 발짓(?)을 아우르며 소통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과연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말과 표정으로 모두 전달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었다. 일부러 학구적이게 보이고 싶어서 방 한편에 있던 책장을 배경으로 두었고, 상의는 나름 프로페셔널해 보이는 하늘색 셔츠를 입고, 긴장감을 낮추기 위해 하의는 잠옷 바지를 입고 있었다.


면접은 전부 영어로 진행되었다. 담당 큐레이터 선생님은 현재 내가 어떠한 공부를 하고 있으며, 왜 영국박물관에 지원했는지 여쭤보았고 영어를 얼마큼 구사할 수 있는지 궁금해하셨다. 또 인턴으로 들어오게 되면 해야 하는 일들과 당시 박물관 내 한국 소장품을 담당하는 인력이 너무 적어해야 할 일이 많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해주셨다. 벌써 4년도 넘은 일이라 기억이 어렴풋하게만 남아있지만, 확실한 것은 한국처럼 압박 면접이나 형식적 면접이 아니라 정말 나를 알고 싶고, 내가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고 싶어 하셨다는 것이다.


3. 최종 합격


그렇게 8-9월 경에 지원한 글로벌 인턴십은 10월 28일 즈음 결과가 났고, 다음 해 1월에 파견할 준비만 착실히 하면 되었다. 당시 합격자 발표를 이메일로 통보받은 날을 생각해보면 대학에 합격했을 때보다도 더 기뻤던 것 같다. 어려서부터 해외에서 경험을 쌓고 싶다는 생각을 오래 했고 어릴 적 경험했던 '좋은 기억'의 외국은 여전할까 하는 의문점과 답답한 한국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늘 해왔기 때문이다.


어른의 보호를 받는 학생이 아닌 직장인의 신분으로 해외에 나가 짧은 6개월을 보내면서도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고 자기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가질 수 있었다. 덕분에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이 많이 바뀌었고 직장에 대한 나의 첫인상도 정립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가치관은 한국에 돌아온 후 나를 굉장히 많이 괴롭혔는데, 이 이야기는 앞으로 이어질 이야기에서 이어가도록 하겠다.



남의 나라에서 일하기는 너무 어렵다! - 성가신 비자 및 각종 서류 발급 과정


아무튼 최종 합격 이후에는 비자 발급, 현지에서 집 구하기 등 더 복잡하고 열 받는(?) 일들이 연속된다. 영국 비자 발급의 경우 자신 명의로 일정 금액 이상의 자산을 6개월 이상 보유했음을 증빙해야 되는데, 이러한 내용을 사전에 고지받지 않아서 조금 애를 먹었다.


다행히 난 오래도록 학생 신분이었기 때문에 부모님의 내역을 증빙하면 되었고, 또 틈틈이 알바를 한 덕분에 충분히 해당 증빙 자료를 다소 수월하게 준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마땅한 차선책이 없어 당황할 수 있을 것 같다. KF 측에서도 Affidavit 즉, 재정보증서를 발급해주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했다. 요즘은 코로나-19 상황으로 상황이 어떻게 변화되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전체적인 과정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또 영국박물관에서는 내부 직원으로 등록할 때 해당 인력이 범죄 이력이 없는지 증빙해야 한다. KF 측에서는 파견 자체에만 신경 써줄 뿐, 각 기관마다 필요한 서류와 내용을 알려주진 않아서 합격 이후 모든 과정이 사실상 나 스스로 해내야 하는 작업이었다. 기관의 큐레이터 선생님이 이러한 작업에 빠삭하거나 미리미리 대비하는 성향의 분이면 큰 문제는 없겠지만, 워낙 업무가 많아 그런 부분까지 상세히 챙겨줄 수 있는 분이 많지 않다. 열악한 규모 탓에 한국 담당 큐레이터 혼자 모든 작업을 도맡아 해야 하기 때문인 것 같다.


범죄 이력 증명서(혹은 Police Record)를 미리 발급받지 않았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부모님께 요청드렸고, 위기대응능력이 떨어지던 나는 조바심을 느껴 주변에 참 짜증을 많이 내었던 것 같다. 사실 별 것도 아닌데 세상에 덜 데어보니 그런 작은 일도 크게 느껴졌었다. 해당 자료를 제출하지 않으면 인턴십을 아예 못하거나, 출근 일자가 늦어질 수도 있다고 해서 더욱더 불안에 떨며 난리를 쳤었다.


KF 인턴십의 경우 해외 기관에서 거주할 집도 직접 구해야 하기 때문에 합격을 통보받는 즉시 더 많은 일들이 시작된다. 나 같은 경우는 정말 너무나도 운이 좋게도 함께 영국으로 파견되는 다른 분께서 집을 먼저 알아봐 주셔서 같은 곳에서 하우스 쉐어링을 할 수 있었다. 난 동북부의 이슬링턴(Islington)에 살게 되었는데, 동네도 좋고 나름 안전한 편에 속해서 마음 편히 출퇴근을 걸어서 할 수 있었다. 박물관까지는 편도로 40분 정도 걸렸는데, 날씨가 선선하고 출근길로 걸어 다니는 사람이 많아서 나도 편히 걸어갈 수 있었다.


감성 빼면 시체였던 시절, 2021년 서울을 버텨내는 나에겐 꽃을 사는 여유조차 사치가 되어버렸다.


영국에서의 생활을 더 정리하면 재미있을 것 같다. 길거리를 걸어 다니며 사색에 빠지던 것도, 주말에 갑자기 유로스타를 예약하고 파리에 가던 것도, 그저 기차를 타고 근교로 여행을 홀로 떠났던 것도, 다 돌이켜보는 오늘날 내가 조금 더 즐겁게 살 수 있는 원동력이 되고 있는 것 같다. 생각보다 분량이 길어질 수 있으니 아마도 다른 글을 새로 써야 할 것 같다. KF 인턴십 도전기는 여기서 끝.




※ 본 글은 철저히 작성자의 경험과 상황에 입각하여 쓰인 글로, 주관적인 시각이 반영되어 주어진 현상에 대한 절대적 정답이 아닙니다. 저와 같은 길을 걷고자 하는 분들은 참고용으로만 봐주시고, 재미로 봐주시는 분들께서는 부족한 글이지만 어여쁘게 봐주시기 바랍니다. 생산적이고 유용한 피드백에 열려있습니다!


※ 글에 실린 모든 사진은 저자가 직접 촬영한 사진으로, 2차 가공 및 무단 활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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