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내가미술사를 전공한 이유
'미술사학', 'History of art'라고 하면 왠지 굉장히 거창한 느낌이 든다.
그도 그럴 것이, 대게 미디어에 노출되는 '미술사' 학자 또는 학예사(큐레이터)는 어딘가 모르게 꼿꼿하고 우아한 느낌을 주는 캐릭터로 종종 등장하곤 한다. 아마도 청결하고 조용하며 경직된 분위기의 박물관 속에서 박제된 것들을 주로 상대하는 직업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대표적으로, 영화 <원더우먼>(2017) 속 주인공 다이애나(Diana)는 일상 속 직업이 박물관 학예사여서 평상시 모습이 매우 참하고 우아하게 묘사된다. 이는 전투적이고 용맹한 원더우먼일 때와의 극단적인 차이를 주어 영웅적 면모를 더욱 강조할 수 있는 장치로 사용된 것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이와 달리, 내가 미술사학을 전공한 배경은 그다지 거창하지가 않다. (?)
느긋한 일요일 아침, 느지막이 식사를 하고 소파에 기대어 MBC <서프라이즈> 프로그램을 보는 것을 굉장히 좋아했는데, 그때마다 가장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미술사 이야기였다. 전쟁, 정치, 외교, 종교, 컬트 등 다양한 소재를 다루었지만, 그중에서도 완벽하게 정제된 미술 작품 이면의 숨겨진 작가의 사랑 이야기, 혹은 천재 작가의 비명횡사(非命橫死) 등의 뒷 이야기가 너무나도 재밌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취미이자 흥밋거리로 남아있던 미술사에 대한 애정은 대학에 입학하면서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내 구원자'인 미술사 학문을 접하게 되면서 더욱 증폭되었다!
때는 바야흐로 2010년, 경영학과 경제학, 자율전공 등이 대세를 이루며 주변 사람들은 취업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경영이나 경제를 전공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당시 나는 '본질'에 미쳐있었고, 대학의 본질은 인문학적 소양을 길러주고 교양 시민으로서의 배움을 주는 곳이라 우기며(?) 꿋꿋하게 영문학을 전공하였다. 그리고 단순히 돈벌이를 위한 것이 아닌 '인문학적 소양'을 기를 수 있는 복수 전공을 고르기 위해 장시간 고민을 하였다.
우연히 학점을 채우기 위해 마지막 학년에 수강했던 <현대미술사> 수업은 향후 약 7년의 내 인생의 길을 닦아놓는 계기가 되었다.
수업을 통해 배운 미술사의 시작은 그다지 흥미롭지 않았다. 라스코 동굴벽화와 빗살무늬 토기는 딱히 신기하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 속 어디선가 본 듯한 중세 미술, TV 광고 속에서 자주 접했던 인상주의 미술 등에 대해 심도 있게 알고 나니 마치 내가 엄청난 지식인이 된듯한 느낌이 들었고, 미술 작품을 중심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철학을 '맛보기'로 다루었던 덕에 대단한 공부를 하고 있는 듯한 착각 속에 쉽게 빠지게 되었다.
그러던 중 현대미술을 공부하며 앤디 워홀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보다 더 재미있는 학문은 없다고 생각했다. 사회 현상을 재치 있고 기발하게 물질과 시각적 자료로 꼬집는 워홀의 기량은 미술사학이라는 학문을 더욱더 깊이 알고 싶게 하였다. 게다가 강의하신 교수님의 우아함과 수려한 말발 역시 한몫을 했던 것 같다.
무수히 많은 이야기를 필기하고, 작품이 담고 있는 시대상과 미학을 공부하고 나면 왠지 모를 성취감이 한 껏 들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건 내가 정말 깊이 있는 무언가를 배웠기 때문이 아니라, 얕고, 넓게, 어디선가 아는 체하기 쉬울 정도의 지식을 짧은 시간 내에 많이 습득할 수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 후로 <서양 미술의 이해>, <동양 미술의 이해>, <한국 미술의 이해>, <도자기의 역사>, <여성과 예술> 등 닥치는 대로 미술사 수업을 들으며 결국 복수전공을 성공적으로 이수해내었다.
그렇게 나는 미술사학을 전공하게 되었고, 교내 박물관에서 도슨트 활동을 하며 정적인 공간으로서의 박물관의 매력에 경도되기에 이르렀다. 화장실도 굉장히 깨끗하고 방문객도 별로 없는데 늘 공간은 청결하고 번쩍번쩍한 것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아는 미술관이 몇 군 데 없었다. 학사 마지막 학기를 보내며 향후 진로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정말 단순히 '가장 유명한' 곳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근무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런데 인턴 과정에 지원하려면 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수료한 이후부터 지원이 되었기 때문에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그냥 난 대학원에 지원해버렸다. (...???) 운이 좋게 석사 과정에 한 번에 붙을 수 있었고, 입학 후에는 정말 돈도 안 되는 열악한 이 분야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르바이트, 조교, 계약직, 연구 용역 등을 가리지 않고 하다 보니 어느덧 7년이 지나있었다.
7년이 흐르는 동안 나는 외국의 박물관에서 경험을 쌓을 수 있었고, 국내 사립 미술관, 문화재단, 상업 갤러리 등에서 근무하며 마치 도장깨기를 하듯 여러 기관에서 경력을 쌓아왔다. 업계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느낀 것은 화려한 겉모습과 달리 이 분야의 종사자들은 마치 수면 아래에서 가라앉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는 백조와 같았으며 아무런 정보도 없이 각자 반복되는 시행착오를 통해 어려움 속에서 살아남는 위대한 개척자들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미술사를 전공한 별 시답지 않은 이유를 시작으로 지난 나의 7년 간의 경험을 글로 풀어보고자 했다. 물론 나의 경험이 곧 정답이 아니며, 나 역시도 다품종 소량생산(?)과 같은 경력을 쌓아왔기 때문에 더욱더 예리한 시각을 제시하지 못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각 기관의 특징과 자신이 미술사학 혹은 관련된 전공을 한 이유를 잘 비교/대조하여 진로를 선택했으면 하는 작은 오지랖이다.
한 편으론 지난 내 경력이 아까운데 유튜브 같은 영상으로 나를 공개하기는 싫고, 배운 것이 글쓰기뿐이라 사진과 함께 글로 풀어내면 좋을 것 같아서 때론 짧게, 때론 길게 시리즈를 연재해보고자 한다.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