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여자를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애니메이션 회사에서 5년간 근무했다. 그땐 미처 몰랐던 사실들이 요즘 계속 뇌리에 떠오른다.
성희롱, 성추행을 당했다는 사실 말이다.
대표자 C는 40~50대 미혼의 남성이다. 지금도 C를 떠올리면 더럽고 거북스러운 기분부터 느낀다. 생각해 보면 그는 일관된 행동양상을 보였지만, 초년생이었던 내가 알아채기 힘들었다.
- 여성에 대한 외모적 평가를 입에 달고 산다.
- 자기가 대표고 나이가 많으니 처음 만날 때부터 반말한다.
- 하이파이브로 시작한다. 그것도 여성 직원에게만.
- 하이파이브를 하면 다음에는 하이파이브 하면서 깍지를 끼고 흔들며 축하 분위기 몰이 한다. 자기가 신세대 리더처럼 행세하는 것이 역겹다. 그리고 어느 리더가 직원 손깍지를 낀단 말인가?
- 회사에서 조직한 테니스 활동에서 라켓 잡는 방법을 가르친다는 명목으로 손을 더듬는다. 이를 본 기타 40대 남자 감독도 그 행세를 따라 배운다. 왜 꼭 여성에게만 가르치려고 할까?
- 힘내라고 갑자기 뒤로 나타나 어깨를 주물럭 한다. 소름 돋는다.
- 워크숍 술자리에서 40~50대 남성 감독 옆으로 젊은 여성 피디님 한 명씩 보내 술을 따르라고 한다. 거절할 때는 자기의 권한으로 승진길을 막는다는 막말을 뱉는다. 정말 미친 거 아냐?
불편했지만 모든 행동이 공공장소에서 이뤄졌고, 내가 거절할 때는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 것 같은 생각에 나의 불편함을 무마해 버렸다. 지금 다시 그때로 돌아가면 정말 그놈의 나쁜 손을 분질러 버릴 것이다. 지금도 그가 여성 초년생에게 똑같은 언행을 하고 있지 않을까 화가 난다.
퇴사하고 동료 여성들끼리 만나 그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던 에피소드들을 이야기하는 자리가 있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모두가 그로부터 성희롱, 성추행을 당한 경험이 있었다. 하여 다 같이 머리를 맞대고 그를 본사에 고발했지만 끝으로 팀장 H의 배신에 사무실 이전하는 것으로 사건은 무마되었다. 대표자 C는 한국지사 바지사장이자 협력사 대표로 사실상 아무런 권한이 없었지만, 본사로부터 아무런 처벌도 불이익도 받지 않았다.
사건 이후 그런 C에게 왜 자기는 예쁘다고 말해주지 않냐는 H. 화가 났다.
배신도 모자라, C의 추악한 언행습관을 알고도 그런 말 하는 H에게 나는 일방적으로 손절했다.
네가 그러니까 여자들이 욕먹고 꽃뱀 소리 듣지!...... C에 대한 분노가 H에게로 향했다.
요즘 페미니즘에 대해 관심을 갖고 공부하면서 H에 대한 분노가 조금씩 사그라들고 있다.
여전히 H의 언행에 공감하진 않지만, H는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들은 종종 남성의 시선에 의해 평가받고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잘못된 사회 구조의 산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H를 남성의 시선으로 꽃뱀 같은 단어를 떠올리며 분노했다는 사실에 놀란다. 나 역시 남성의 근본적인 잘못을 여성의 잘못으로 귀결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전히 남자의 사랑을 받아야 가치가 있다는 메시지를 대중 매체, 가정 환경, 사회 교육 등 다양한 영역에서 강화되고 있고, 여성이 자신을 존중하고 자존감을 지키기보다 남성의 기준에 맞추도록 유도하고 있는 사회다. 그릇된 신념에 둘러 싸여 어떻게든 살아내려고 애쓰는 동일한 여성으로서 더 이상 다른 여성을 비난할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여자를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이런 문제를 일으킨 근본적인 구조에 대해 분노하고, 이를 바꾸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는 요즘이다.
끝으로 요즘 생각의 변화를 가져다주는 도서를 추천하고 싶다. 페미니즘에 대해, 여성에 대해 관심이 있다면 아래 도서를 추천한다.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다.
<친절하게 웃어주면 결혼까지 생각하는 남자들> 박정훈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이민경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 하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