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게 어렵지 쉬는 게 어렵던가
결국 걸려들었다.
나만 빼놓고 왕따 시키는 줄 알았는데. 하마터면 친구 없는 거냔 소리를 들을 뻔했는데. 결국은 걸렸다. 코로나, 문제의 코로나 바이러스 말이다.
어디 뭐, 코로나에 걸린 게 반가운 일이냐고? 아니, 전혀 그렇지 않다. 덕분에 일주일 간 모든 업무가 마비됐다. 가뜩이나 제자리걸음 중이라 이래저래 심난하던 시기에 시계태엽을 강제로 정지시켜야 하는 일은 영 마뜩잖다. 가게가 돌아가야 영업이 되고 영업이 돼야 생계를 유지하는 것 아닌가.
가게 문을 닫아야 하고, 가게 문을 닫으니까 손님 발도 끊기고. 당연히 매출도 삭감된다. 그러니까 이건 먹고사는 문제다. 자영업자에게는 살고 죽는 문제. 죽고 싶지 않은데 억지로 비즈니스의 숨을 멈춰야 하다니. 쉽지 않은 결정일 수밖에.
주변을 보면 코로나19로 심각한 건강의 위협을 받은 사람들도 적잖다. 뉴스를 켜면 연일 화장장 숫자가 모자라서 난리란다. 코로나로 인해 중증에서 사망까지 이르는 숫자가 많아졌기 때문이라고. 어떤 이는 심한 후유증에 몸서리를 친다고 했다. 확진받고 나서도 목구멍이 칼칼한 것이, 혹은 미각이 살짝 뭉툭해진 것이, 전보다 입맛도 없고 기력도 없어진 게 영락없는 부작용이라는 것이다.
현재 코로나 확진으로 인한 격리 기간은 단 7일. 그러나 후유증은 평생의 나날에서 지금껏 살아온 날을 뺀 모든 날이 될지도 모른다. 두려운 일이다. 양성 진단을 받았을 때 ‘내가 인싸이긴 한 건가’라고 생각했던 찰나에 죄책감이 들었다.
당장들이닥친 7일간의 격리기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음, 일단 밖에 나갈 수가 없다. 사람을 대면할 수도 없다. 비대면으로 처리할 일들을 해내기도 쉽지 않은 컨디션이다.
답은 하나.
일단 쉬는 것.
울며 겨자 먹기로 빼곡히 들어찬 캘린더의 항목들을 삭제했다. 7일 동안, 뭘 그리 아등바등 살아가려 했던 걸까. 생존에 대한 열망, 집착, 그런 것들이 내역마다 눈에 밟혔다. 당장 힘에 부쳐 병목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콘텐츠 제작의 생산성을 위해 새로운 직원을 뽑는 일이 가장 중요한 어젠다였다. 굵직한 클라이언트와 이어가야 하는 중요한 커뮤니케이션도 있었다. 새롭게 들어온 비즈니스 제안을 풀어나가야 하는 과제도 놓칠 수 없었다.
이 모든 일은 콘텐츠 크리에이터가 해야 할 ‘영상 제작’을 디폴트 값으로 깔고 위에 쌓는 일. 결국 쌓여가는 해야 할 일의 세부 항목을 감당치 못하고 대개 일자별로 그냥 쑤셔 넣는(?) 수준이었다. 24시간이 풍선이라면 벌써 빵! 터지고도 남을 분량이다.
솔직히 터질 걸 알면서도 쑤셔 넣기 일쑤였다.
일단 넣어 놓으면 터지기 전에 알아서 하겠지, 뭐 그런 생각이었달까.
어느 순간인가, 세세하게 하나하나 신경 쓰기 힘에 부치다 보니 원치 않게 예민해질 때가 많았다.
특히 나는 퇴사 후 개인 사업이자 프리랜서 업무를 보면서 예민함이 더욱 늘어났는데, 예민함은 좋게 표현되면 예술성이고 나쁘게 발현되면 꼴값이다. 뭐랄까, 그 예민함 대로 소위 아다리(!)가 맞아떨어지면, 유니크한 퍼즐 작품 같은 것이 완성될 것만 같은 착각이 든달까.
한 세계에 집착하고 몰입해서 예민해지다 보면 주변에 나도 모르게 광고를 하게 됐다. ‘이렇게나 빡세게 고민하고 있으니까 나 건들지 마!’라고. (…) 역시 꼴값이다. 그러다 코로나에 걸렸잖나. 아무도 털끝 하나 건들지 않는데 아무것도 못하는... 예민이의 최후.
흔히 완벽주의자들은 완벽을 추구하기 때문에 완벽에 가까워질 것이라 생각하지만, 실은 그놈의 ‘완벽주의’가 내부의 가장 큰 적일 때가 많다.
일단 세상엔 '해봐야 아는 것'들이 지나치게 많다. 반면 완벽주의자들은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만 하다가 지쳐버린다. 부딪혀 보면서 배우면 되는 건데, 그걸 용납할 수가 없다.
실수하면 어쩌지. 문제가 생기면 어떡하지. 다시 비효율적으로 돌아가면 손해 아닌가? 등등. 오지도 않은 ‘그러면 어떡하지’ 때문에 발목만 몇 번을 내어줬던가. 캘린더에 터지게 들어앉은 수많은 액션 플랜들도 결국 완벽주의가 낳은 찌꺼기들이다. 달력에 적어놓지 말고 그냥 생각났을 때 해치울 걸. 인생엔 완벽한 때도 없고, 실상 완벽한 사람도 없는 건데.
이걸 잘 알면서도 스무 해 넘게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걸 보니, 영락없는 모지리다.
바보, 완벽주의 라면서!
‘일, 생각하지 말고 쉬어’
지인들 중 팔 할은 코로나 확진 소식을 알리자, 내게 이 같은 문장을 보내주었다. 무슨 ‘You Can Do IT’ 같은 문장처럼 익숙한 명언 같은 것을 복붙 해온 느낌이다. 혹은 설날에 으레 전하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같달까. 지인들끼리 서로 몰래 비밀 단톡방을 열어서 전략 짜기라도 한 듯 비슷하게 전해온 문장을 보며 그간 그놈의 꼴값을 남들한테 많이도 내보이고 살았구나 싶다.
바야흐로 오늘은 격리 3일째.
알뜰살뜰하게 먹고 자면서 ‘확찐자’의 삶을 향하고 있다. 먹고, 자고, 다시 일어나 먹고, 또 자고... ‘7일 내 돼지 되기’를 목표로 세우고 사는 사람처럼,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지루할 법도 한 단순 반복행동을 신명 나게 하고 있다. 딱히 완벽한 격리생활을 하려 한 적도 없으면서 잘 먹고 잘 자는 거엔 왜 이렇게 진심인가.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술술 삶이 이렇게 굴러가게 방치하는 걸 보면, 어쩌면 그래야만 했던 것은 아닐까 하고 반추해본다.
당장 해야 하는 수많은 일들을 호기롭게 처리하는 일 이전에 '아주 약간의 쉼'은 필요했던 게 아닐까. 빈틈 하나 남기지 않으려고 발버둥 칠 힘으로, 딱 숨길이 오갈 만큼의 빈틈 정도는 너른 애정으로 포용해줬어야 하는 것 아닐까.
쉬어간다는 건 원치 않는 ‘정지’이고 ‘멈춤’이기도 하지만, 달리 보면 '꼭 필요한 여백'이 되기도 할 것이다.
꽉 찬 서양화의 화려함도 좋지만, 여백을 남기는 동양화에도 그 나름의 우아함과 기품이 묻어나기 마련일 터. 흰색이 1mm라도 보이면 무조건 칠해서 덮어버려야만 한다는 강박에서 조금은 벗어나는 7일을 보내야지. ‘여백의 미’는 결국 비우지 않고는 만들어질 수 없는 아름다움이니까.
고로 바쁜 완벽주의자들 혹은 치열한 워커 홀릭들 에게 코로나19의 또 다른 이름은 여백이다. 굳이 한글말로 병명을 더 풀어보자면.... ‘제발, 쉬어가세요 병’ 정도이지 않을까.
어쩌다 찾아온 여백의 시간.
이 일주일이 지났을 때, 우리네 삶이 한 폭의 동양화 산수화처럼 더 깊은 내공을 담아내길 바라며.
*** ‘제발, 쉬어가세요 병’에 걸린 모든 같은 동지들(과 제 자신)의 빠른 쾌유와 회복을 빕니다! Pea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