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헬스장은 어디로 갔을까
이사 오고 운동력을 잃었다. 정확하게는 ‘헬스장'을 못 갔다. 이사온 곳 도보 10분 이내에 헬스장이 없어서다. 아니... 헬스장이 없는 동네가 있다고? (오 마이 갓!) 집 알아보며 동네 상권들을 체크할 때 차마 헬스장을 미리 살피지 않은 건, 내 탓이다. 그런 나에게도 변명 하나쯤은 있다. 구도심이건 신도심이건 지금껏 자라온 동네에선 전부 헬스장이 가까웠다. 이런 적은 정말 처음이다.
내겐 타협할 수 없는 헬스장 신념 하나가 있다. 일단 무조건 거주지와 근거리에 있어야 한다는 것. 왜냐? 안 그럼 안 가니까. 부모님께 까까 사달라 조르던 초딩 때 학교 같다. 가면 막 신나지, 친구들도 거기 있지. 다 좋다. 그런데 아침 일찍 일어나 등교하려고 하면 한 걸음이 천리길이다. 몸무게가 430kg쯤 불어나는 것 같지. 방구석에서 한 발자국도 떼고 싶지 않아진다. 좋은 약이 입에 쓰듯 수월하게 찾게 되진 않는 게 헬스장이다. 그나마 가까워야 드물게라도 간다.
그러나 근거리에 도무지 없어 결국 자동차에 시동을 걸었다. 차로 10분 거리에 헬스장이 있었다. 최신 기구가 즐비한 신식 초대형 짐이란다. 주차가능이라니 편하게차로 다녀도 괜찮겠다며 희망회로를 돌렸다. 그리고 도착한 목적지. 잠깐만, 그런데 주차장은 도대체 어디 있는 거지? 한참 뺑뺑이를 돌다 발견한 건 고작 임시 주차구역 두 칸이었다. 게다가 저녁 시간임에도 이미 만차다. 신이시여. 이런 곳엘 다닐 수는 없다.
두번째 헬스장을 찾아 나섰다. 이번엔 주차장 부지가 꽤 넓고 새로 생긴 깔끔한 헬스장이 타깃이다. 소요시간 15분. 긴가민가 하다, 일단 가기로 한다. 핸들을 부여잡고 5분 정도 달렸을까. 그제야 갑자기 찾아오는 현자타임. 보디빌더도 몸짱도 아닌 내가 고작 헬스장 쇠질 체험 하겠다고 15분을 운전해서 가야한다고? 5분 이내 거리도 귀찮아서 몸을 베베 꼬게 되는 게 인간일진대. 이게 나에게 정말 맞는 선택지일까? 냉정하게 물었는데 차가운 대답이 돌아왔다. NO.
결국 차를 버려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가볍게 운동하러 가는 거리를 차로 끄는 건 에너지 낭비다. 도보로 갈 수 있는 헬스장 중 그나마 가장 가까운 곳, 거기를 가야만 했다. 바로 걸어서 18분 걸리는 어느 낡은 헬스장이었다. 그곳을 애초에고려하지 않은 건 포털사이트 리뷰 때문이었는데, 헬스장 이용 고객이 직접 남겨놓은 듯한 후기에 ‘최악'이란 단어가 그리 많이 등장하는 걸 처음 봐서다. 하지만 진퇴양난. 다른 선택지가 없다.
반신반의하며 올라간 ‘문제의 헬스장‘은 놀랍게도 만원이었다. 다소 늦은 저녁에도 오래된 운동복을 입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즐비했다. 놀라운 건 미리 읽어봤던 리뷰가 어느 하나 과장된 점이 없었다는 것이다. 좁은 공간에 마구잡이로 배치된 기구들, 다 벗겨져 헤진 사이클의 손잡이, 세월에 녹슬어 빨갛게 산화철이 묻어나는 아령까지... 헬스장 흰 벽 구석 곳곳에 보이는 곰팡이들은 특히 가관이었는데, 마치 공간 전체가 실험주의 작가의 반항적인 그림 같았다.
여기서 내가 운동을 할 수 있을까. 헬스장을 한바퀴 훑는 내내 구겨진 종이신문처럼 미간이 찡그려졌다. 그러나 어쩐담. 이미 한참을 헤메다 도착한 최종 목적지다. 아무 소득 없이 그냥 돌아갈 순 없었다. 속는 셈 치고 일일 이용권을 끊었다. 낸 돈이 적잖이 아까워 겨우 운동을 마쳤다. 두 손이 다 새카매졌다. 헬스장에 굴러다닌 수만개의 먼지가 손바닥 위에서 정기집회를 열고 있는 듯했다.
다시는 오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손을 박박 닦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갑자기 기분이 묘한 게 아닌가. 황당하게도 발걸음이 가벼운 것이다. 간만의 근육운동으로 괜히 온몸이 뻐근했는데, 어라? 그것마저 괜히 좋네. 삐까뻔쩍한 새 기구 하나 없는 낡아빠진 헬스장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뤄둔 운동을 하겠다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던 것이다. 괜찮은 헬스장 찾겠다고 수 시간 길위를 서성인 지난 시간이 아깝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완벽한 헬스장’이란 애초에 없는 거였다. 완벽해야 하는 건 오히려 마음가짐이었다. 해야하는 걸 위해 작고 큰 불편을 감수할 수 있는 마음 말이다. 세상을 조금만 돌아보면 부족한 환경에서도 꽃을 피우는 사람들은 차고 넘쳤고, 최악의 헬스장에서도 언제나 몸짱은 탄생한다. 환경이 어떠하든 그건 결국 부차적인 문제. 먼지더미 헬스장에서 더 낡아빠진 건 공간이 아니라 어쩌면 나 자신이었네. 더럽고 불편한 것 안에 좀처럼 나를 녹이지 못할 것 같다고 지레 거부하고 있었던, 좁디 좁은 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