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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연 Apr 23. 2018

여행할 때 사진보다 손그림이 좋은 이유

유럽여행은 기내식으로부터 시작한다

    나는 비행기 타는 걸 굉장히 좋아한다. 스무 시간이 넘는 비행시간을 거뜬히 견디는 건 기본, '비행시간은 길면 길수록 좋다'주의이다. 좁은 이코노미 클래스의 좌석에 구겨 앉은 채 몇시간이고 죽은듯이 잘 수 있는 잠자리 소화력, 좋아하는 영화는 두번이고 세번이고 다시 볼 수 있는 재탕가능한 취향, 그리고 붕 뜨고 흔들리는 비행기의 운동감을 놀이기구처럼 좋아하는 철없음이 합쳐진 결과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좋아하는 것과 무서워하는 건 별개다. 나는 쫄보라서 그런지, 비행 거리가 길어지면 "대서양 비행기 추락사고, 생존자 0명!"따위의 뉴스 헤드라인들이 자꾸 눈 앞에 아른거린다. 그래서 이번에 친구와 남유럽으로 떠나면서도 왕복 70만원 안팎의 저가항공 대신 눈물을 머금고 100만원이 넘는 대한항공의 표를 끊었다.


중국 상공에서 먹은 점심


  어쨌든 기왕 대한항공을 타게 된 이상, 비싼 서비스를 맘껏 즐겨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됐다. 그런 의미에서 비행기에 타자마자 내가 제일 먼저 확인한 건 다름 아닌 영화 목록과 기내식 제공 시간! 6시간 내외의 비행 시간이면 기내식을 한 번 먹을 수 있지만, 15시간 정도 비행을 하면 당연히 두 끼는 챙겨주게 된다. 내 목적지는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두 끼는 족히 먹는 비행 거리였다. 나는 첫 식사를 할 때까지 얼추 3시간은 있어야 된다는 빠른 계산을 마치고, 마침 얼마전에 재밌게 봤던 2시간이 조금 넘는 러닝타임의 마블 영화를 다시보기로 했다.

  영화를 보고 게임을 깨작대다 보니까 금방 기내식이 나왔다. 현 위치를 찍어보니까 이름 모를 중국의 어느 도시 언저리였다. 내가 중국 상공에서 먹은 첫끼는 따뜻한 소고기 조림과 으깬 감자였다. 여기에 치즈가 들어간 샐러드랑 빵이랑 망고케이크도 있었다. 나는 기내식을 꽤 좋아한다. 일단 내 입맛에 맞기도 하지만, 특별한 상황에만 먹을 수 있는 별식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우주식량이 특별히 맛있는 건 아니지만, 우주비행사들이 우주에서 먹는 음식이라는 점만으로도 매력적인 것처럼 말이다. 내게 기내식은 뭐라고 해야할까, 내가 아주 멀리 떠나고 있다고 뱃속으로 먼저 보내는 신호같은 느낌이다.

좁은 식탁에서... 펜으로 주섬주섬.... 내가 미대를 못 간 이유가 여깄네...

  먹고나니까 사진을 찍는 걸 깜빡했다는 걸 깨닫고 기억을 떠올려가며 끄적여 보았다. 착시현상 그림처럼 진짜 같진 않아도 사진 찍었을 때 좌석 선반이랑 각도를 딱 맞춰서 그리고 싶었는데.... 음... 그래도 뭐, 그리는 내가 즐거우면 됐지. 약간 내 마음이 담긴 그림이 되어버렸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메뉴는 비프스튜가 아니라 그 왼쪽의 빵이었다. 상공에서 제공하다보니까 기압 차 때문에 빵봉지가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는데, 그 안에서 통통 튀는 동그란 모닝빵이 왠지 더 맛있어보였다. 원래도 빵순이인 나는 다른건 다 조금씩 남겼는데 이 빵만큼은 버터를 싹싹 발라서 가루 하나 안 남기고 다 먹었다. 지금 이 그림을 보니까 너무나도 빵이 맛있었던 나머지 원근법을 무시하고 최대한 빵이 크고 잘 보이게 그려버린 것 같다.



그림의 가성비


  내가 좋아하는 그림 그리는 도구는 펜이다. 0.5 하이X크는 단가가 비싸고 심이 부러질 때 너무 마음이 아파서 안 쓰고, 대신 잃어버려도 안 아까운 동X파인테크를 쓴다. 왜 좋아하냐고 하면, 그냥 저 섬세한 펜선이 좋고, 가격이 싼데 꽤 괜찮은 미술 재료인데다가, 연필 잡기에 익숙한 내 손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서 그렇다. 색칠할 때는 주로 수능 때 애용했던 컴퓨터용 싸인펜(컴싸)를 사용한다.

조금 비싼 종이

  솔직히 말해서 내가 추구하는 건 가성비다. 나는 장비 욕심이 있다기보단 '장인은 도구를 가리지 않는다' 주의이다. 베리에이션으로 '곰손도 도구를 가리지 않는다'가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특별히 비싼 걸 쓴다고 뭔가 달라질 걸 기대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림을 그릴 땐 언제나 가성비 좋은 도구를 찾는 편인데, 예외가 있다면 종이. 종이는 차이가 나는 게 많이 느껴져서 조금 비싼걸 쓴다. 그리고 비싼 종이를 사야 좀 더 성심성의껏 열심히 그리게 되고 그리는 맛도 나는 것 같다. 앗, 이렇게 쓰고 보니 좀 장비 따지는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그런 이유로 나는 이번 여행은 펜 몇 자루랑 컴싸 몇 자루에 조금 비싼 드로잉북을 들고 떠났다. 사실 진짜 가성비를 따지자면 사진이 최고일 것이다. 손으로 열심히 따라 그리는 것보다 사진 한 방이 얼마나 쉽고 간편한가. 실제로 나 역시 가서 그림은 정작 몇 장 못 그리고, 사진은 천장 넘게 찍어서 용량초과를 찍었다. 하지만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가성비 딸리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


  잘 그리고 못 그리고를 떠나서, 나는 손으로 낙서를 끼적이는 걸 좋아한다. 미대를 나온 엄마는 전업주부가 된 지금도 그림을 좋아하시는데, 나도 그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 같다. 어린 시절, 엄마가 전화기를 들고 수다를 떨면서 한 손으론 모나미 볼펜으로 꽃 몇 송이를 슥슥 그려내는 모습이 난 왜 그렇게 인상 깊었는지 모르겠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그림(솔직히 낙서에 가깝지만) 그리는 취미가 현재를 온전히 느끼는 사람의 취미라고 생각해서 그랬나보다.


  개인적으로 사진보다 여행드로잉을 좋아하는 이유는 선에 감정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특히 내가 직접 그린 그림들은 잘 그린 그림이 아니라서 내 마음을 오히려 그대로 반영한 것 같다. 거짓말을 못하는 사람이 두서없이 내뱉는 수다 같은 느낌? 삐뚤빼뚤한 펜선이 빵을 너무 좋아한 내 마음을 고스란히 보여준 것처럼 말이다.

  또 그림은 그 무엇보다도 훌륭한 기록이 되기도 한다. 셔터를 누르면 나오는 사진 한 장보다 더 긴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그린 그림은 여행 장소의 하나하나를 눈으로 담고, 손으로 되짚는 과정이다. 개인적으로는 그림을 그릴 때 세밀하게 관찰하고 재현하려고 노력하다 보니까 여행지의 정취를 최대한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만난 하늘이었다. 나는 복도 쪽 좌석이라서 가까이 볼 수 없었는데, 하늘색에서 분홍빛으로 서서히 물드는 그 모습이 너무 예뻐서 그림으로 남겼다. 당연하지만, 사진에 비해 훨씬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다. 하지만 사진도 그 날 내 눈이 느낀 것만큼은 담아내지 못했다. 나는 이 그림을 볼 때면, 떨리는 곡선들에 담겨져 있는 내 설렘과, 고운 색을 담아내지 못했던 그 날의 안타까움이 기억 나서 좋다. 이렇게 보면 그 어떤 기록보다 생생한 일기가 바로 여행드로잉인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여행을 갈 때 사진보다 손그림이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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