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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ditduaa Oct 25. 2022

잊지 않아야 할 것까지 잊은 듯이 살게 되는 때가

사탕을 빼앗겨도 울지 않는 방법 03

남쪽으로 여행을 다녀오니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심상치 않다. 옷장 깊숙한 곳에 둔 겨울옷을 꺼내려다 괜히 이것저것 들쑤셔 집을 한바탕 뒤엎었다. 그러다 언니의 일기장을 발견했다. 



온다. 잊지 않아야 할 것까지 잊은 듯이 살게 되는 때가. 언니를 늘 그리워하지만, 언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떠올린 지는 오래다. 언니를 언제나 사랑하지만, 언니가 나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되새긴 지는 오래다.


언니는 우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별것도 아닌 것. 가령 어떤 과자의 제조사가 다른 제과회사라고 우긴다든가 목적지의 방향이 반대쪽이라고 우기는 것 따위다. 언니랑 이야기만 하면 결국 꼭 그것 때문에 사달이 나는데, ‘그래, 언니가 다 맞아’ 하고 넘길라치면 쉽게 포기하는 건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꼭 밀어붙여서 자기가 틀렸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끝을 낸다. 아홉 살 터울이지만 그런 언니를 귀엽다고 생각했다.


언니는 고드름 아이스크림을 좋아한다. 언니의 마지막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느꼈을 때, 먹고 싶은 걸 물었더니 고드름 아이스크림을 말했다. 병원 근처부터 대전 시내 바닥을 온통 뒤져도 고드름을 찾지 못해서 한겨울 길바닥에서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난다. 궁여지책으로 얼음 틀에 이온 음료와 시럽을 얼려 만들어 먹었는데, 비슷한 맛이 나서 아이처럼 좋아했다. 겨울에 나오는 아이스크림과 여름에 나오는 아이스크림이 다르다는 걸, 그때 알았다. 


언니는 책을 좋아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와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같은 일본 소설과 기욤 뮈소, 아멜리 노통브 같은 프랑스 소설, 세계 명작 고전들을 사 모았다. 아직도 우리 집 책장의 많은 부분을 언니의 책들이 차지하고 있다. 그 책들이 없었더라면 내가 글을 쓸 일도, 책을 업으로 삼을 일도 없었을 거다. 


나의 취향은 많은 부분 언니에게 수혈받았다. 언니는 나로 하여금 아직도 김현철, 심현보, 정지찬, 이한철의 프로젝트 그룹 주식회사의 「좋을 거야」를 듣게 만든다. 버즈의 <모노로그>보다 테이의 <모노로그>를 좋아하게 만든다. 12학번인 내가 피식대학의 <05학번이즈백>을 보면서 웃게 만든다. 80년대생 선배들과 술자리에서 대화를 끊이지 않게 만든다. 그래서 가끔 선배들이 내게 민증을 요구하기도 했다.


언니는 내가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사람처럼 말한다. 어릴 때는 넌 얼굴이 CD만 하니까 커서 모델을 해보라고 했다. 초등학생은 원래 그만하지 않은가. 조금 더 자라서는 아나운서가 되라고 했다. 내 콤플렉스가 어눌한 발음과 하찮은 말주변인데, 얼토당토않는 말이라 코웃음을 쳤다. 뒤늦게 미술 입시를 하겠다고 무리했을 때도 너는 원래 그림을 잘 그리지 않냐며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고, 문예창작과에 들어가니 라디오를 즐겨 듣던 언니는 라디오 작가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서른에 새로운 걸 해보겠다고 까부는 지금의 나에게, 언니는 뭐라고 말해 줄까.


내가 기억하는 언니는 사랑스러운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 넘치는 사랑을 받았다. 자존감이 바닥을 친 요즘, 그걸 생각하니 주제와 분수와 겁이 없어진다. 언니는 아직 내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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