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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그루 Nov 24. 2024

코스트코에서 소환된 포르투갈 와이너리

포트와인만큼 숙성된 나와 나의 기억

좋은 물건들을 다량으로 싸게 팔아 나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그래서 자주 가면 안 되는 그곳. 코스트코에 갔다. 와인을 즐겨 마시는 편도 아니고 주변에 같이 와인 마시는 사람도 별로 없는데 항상 와인 코너를 호기심 가득 구경하게 된다. 물론 시음코너도 그냥 지나치면 섭하다.

 와인 라벨을 훑다 익숙한 포도 여섯 개가 그려진 와인통을 발견했다. 어 이거… 내가 포르투갈에서 사 온 것 맞는 것 같지? 심지어 할인행사 중이지?



 이미 몇 달(몇 년?)전에 방전된 휴대전화를 충전하여 사진첩을 확인해 봤다. 내가 갔던 와이너리의 그 와인이 맞았다. 와인 사진을 시작으로 그날 와이너리에 갔던 모든 추억이 사진과 영상으로 생생히 담겨 있었다. 마치 와인 한 병이 과거의 시공간으로 보내주는 포털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포르투갈의 바다 도시 포르토. 숙소에서 다리를 하나 건너면 유명한 와이너리들이 모여 있다.  급하게 사 가서 허겁지겁 읽은 가이드북에 의하면 어떤 곳은 마케팅으로 유명해, 어떤 곳은 인파가 많다고… 설명은 많았지만 그래서 어딜 가야 하는지는 선택이 어려웠다. 구글 지도를 참고해 ‘그라함’이라는 와이너리를 선택했다. 와이너리 가는 길에 택시기사님이 와이너리 잘 골랐다고 엄지를 척 들어주셔서 기분이 한껏 좋아졌다.

 그라함 와이너리에 도착했다. 널찍한 로비에는 사람들이 몇 있었다. 입구에서 와이너리 투어와  시음 패키지를 구매하면 된다. 가장 저렴한 코스를 하려다, 오래 묵은 건 뭔가 고급진가 싶어서, 이제 오면 언제 이곳을 또 오겠나 싶어 조금 무리해서 30년 묵힌 포트와인이 포함된 코스를 골랐다.

 와이너리는 조금 어두웠고 크고 작은 나무통들이 가득했다. 일단 영상으로 와이너리의 역사와 특징을 구경하였다. 포트와인은 포르투갈의 도우루 밸리라는 좋은 동네에서 직접 생산한 포도를 가져와서 발로 눌러 주스를 만들고(웩! 물론 지금은 아니다), 도수가 높은 술(브랜디)을 부어 숙성했다. 보통 와인은 과일이 발효되면서 자연적으로 알코올과 쓰고 신 맛들이 생기는 데 반해 포트 와인은 달달한 과즙에 도수가 높은 술을 부어 발효가 일어나지 않으니 포도의 달달함은 그대로 남아있고 그 과일맛에 브랜디의 맛이 어우러지게 된다. 도수 높은 술 때문에 발효는 일어나지 않지만 어떤 오크통에 얼마나 숙성시켰냐에 따라 맛과 풍미와 색깔에 차이가 커진다고.


 오크통 구경과 엄청난 와인저장고를 구경하고 나니 드디어 기다리던 차례. 시음시간이었다.

 각자 자리를 잡으면 처음 입장할 때 신청했던 와인을 시음할 수 있다. 나에게도 세 가지 와인이 나왔다. 한 가지가 향긋하고 프레시한 6 그레이프, 30년 된 와인, 그리고 2000년 빈티지 와인. 비싸고 오래 숙성한 것이 무조건 마음에 들 것이라 생각했는데 초등학생 입맛인 나에겐 상큼하고 달달한 덜 숙성된 6 그레이프 와인이 가장 맘에 들었다(아마 브랜디를 좋아하시거나 진한 맛, 오크향을 좋아하신다면 비싼 와인을 나보다 더 음미할 수 있을 것이다). 혼자서 와인 사진만 잔뜩 찍고 있으니 혼자 오신 한 한국분께서 사진도 찍어주시고 끝나고 같이 밥도 먹고 다리 옆도 걸었지만…(그 추억은 나중에 기회가 되면 풀도록 하겠다).


 시음이 끝나고 알딸딸한 상태로 기념품가게에 들렀다. 아쉽게도 한국에 돌아갈 때 입국할 때 와인 두 병 정도만 들고 갈 수 있으니, 나는 집에 가 가족들과 같이 맛볼 6 그레이프 와인을 하나 샀다. 영상을 보다 보니 현지에서는 약 10유로(약 13,000원)에 사 왔다는 걸 알았다. 갑자기 횡재한 기분이 든다.

술에 좀 취했는지 사진에서도 술냄새가 나는 기분이다


 포르투갈에 다녀올 당시에는 갓 서른이었던 나도 어느새 오크통 대신 한국의 찜통과 냉골에서 5년 더 묵었다. 여행을 다녀온 지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마트에서 식료품을 사다가 떠오른 특별한 추억은 바래지 않고 다시금 강한 추억의 향기를 남겨주었다. 추억이 빛바래지 않게 디지털 사진은 마치 어제의 기억처럼 신선한 사진을 가져다주었고.


 포르투갈에서의 모든 일정은 나 혼자였다. 혼자 여행이 처음이었는데 심지어 장소가 타국이어서 무서운 순간도 외로운 순간도 있었지만 지나고 생각해 보니 혼자여행을 며칠이라도 도전한 건 정말 잘한 것 같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끝내주게 늦잠을 자며 먹고 자고 놀았던 순간이 시간이 흐른 현재의 나에게도 큰 의미와 위안이 된다.

 

 그나저나 젊을 때 여행을 두어 번은 더 갈 걸 그랬나. 이젠 칠천 보만 걸어도 발이 시큰하고 삼일만 외국 음식 먹어도 사발면을 찾게 되던데. 야속한 세월을 아쉬워하며,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을 아쉬워하며, 크리스마스에는 한국에서 편리하게 산 포트와인을 따 추억을 한껏 마셔야겠다.


추억의 영상. 100기가는 있는 것 같은데. 이참에 다시 유튜버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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