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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cky Apr 07. 2020

#06 우울한 퇴사 실패자의 매운맛

퇴사 무기를 든 을이라도 갑 앞에서는 영원한 을

다시 얘기하자던 대표의 낯짝을 본 건 그로부터 3일 후였다. 사업상 미팅 때문에 사무실에 방문할 수 없다는 연락을 당사자가 아닌 팀장님께 전했다. 덕분에 퇴사 욕이 치솓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사그라들었다. 오죽 돈이 없으면 돈 구하러 다니느라 사무실에 오지 못할까, 월급도 못 주는데 직원들 볼 낯이 없겠지, 오래 다닌 에디터의 퇴사가 확정되는 순간 다른 에디터들의 근속도 장담할 수 없을 테지. 안쓰러운 마음도 들었다.


K와 점심거리를 사기 위해 편의점에 들어서자마자 P에게서 톡이 왔다.



사무실 대표 출몰 경보.



확인과 동시에 대표에게 전화가 왔다. 근처 카페에서 커피 한 잔 마시자는 내용이었다. 낯간지럽게 커피라니. ‘참치김치 덮밥이냐 제육덮밥이냐 그것이 문제로다’를 시전하며 컵밥 고민에 빠진 K에게 불닭 리소토를 해 먹자고 제안했다. K는 자신 없는지 괜히 번거롭게 해드릴 것 같다며 자신은 컵밥으로도 괜찮다고 둘러댔다. 내가 괜찮지 않았다. 아무래도 매운 음식을 먹어야 했다.



“언니 믿지? 헤헤. 내가 해줄게요. 대표랑 잠깐 얘기하고 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줘.”



K는 컵밥에서 리소토로 노선을 변경하고 불닭소스, 체다치즈, 단무지를 골라 계산했다. 길어봤자 30분. 30분 안에 퇴사를 확정 짓고 싶었다.



*


대표와 나는 각자 커피 한 잔씩을 시키고 야외 테라스에 앉았다. 소개팅도 아닌데 날씨와 풍경 얘기만 해대다가 무난한 대화 주제가 떨어져 커피만 홀짝였다. 점점 바람이 차지는 시기였는데 따뜻한 커피를 시킬 걸 고민하고 있던 찰나 대표가 먼저 입을 뗐다.



“요즘 잡지 만들면서 단행본 작업도 했고, 주말에 출근해서 일하는 것도 알고 있어. 많이 지친 것 같아. 그런데 초연 씨 에디터 하고 싶다며. 나는 초연 씨 보면 예전에 날 보는 것 같아서 일반 에디터들이 하는 경험보다 더 많은 경험을 할 수 있게 기회를 주고 싶어.”



아니다. 찬 커피를 시키길 잘했다. 목이 타서 후루룩 마실 커피를 시킨 내가 대견했다. 이 대표는 무슨 생각인 걸까? 보통은 나간다는 직원을 잡으려면 K의 남자 친구 말대로 월급을 올려준다거나 일을 줄여준다고 하지 않나? 이건 어디서 나오는 배짱일까. 난 단 한 번도 대표에게 에디터로써 많은 기회를 달라고 한 적 없다. 내가 하고 싶으면 하고 싶다고 직접 말한 적은 있어도 “내게 기회를 주세요!”라는 섣부른 말 따위는 뱉은 적 없단 말이다. 거기다가 주말에 출근한 건 대표 알라고 한 짓이다. 다른 에디터들은 집이 멀고, 주말까지 회사 나오기 싫어서 출근하지 않았을 뿐이지 모두들 주말에도 일한다. 그리고 예전의 대표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당신과 동일시하지 마라. 나는 정말 글 쓰는 게, 정 많고 일 잘 하는 동료들과 잡지를 만드는 게 좋았을 뿐이다. 회사 다닌 지 3년 만에 처음 참석한 (그것도 초대로) 서울 국제도서전에서 재미있게 보고있다고 말해 준 독자분의 얼굴이 떠올라서, 사무실 이사 후 연 첫 파티에 참석한 독자분이 내가 에디터임을 밝히자 티 없이 맑은 웃음으로 어떤 분인지 궁금했다며 아이돌이라도 본 마냥 함께 사진 찍자는 모습이 선하고 감사하고 죄송해서 책임감을 가지고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동안 일하면서 즐겁고 행복했지만, 최근 정신적으로 힘들어서 자꾸만 현실 도피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까지 입히고 있어요. 일단 쉬어야겠다는 마음이 들어요.”


“초연 씨. 우리 콘텐츠, 회사 엄청 좋아했잖아. 다시 생각해봐. 그리고 지금 그만두면 나중에 배 아파서 어떡하려고 그래. 회사가 잠깐 힘든 시기라서 월급이 제때 못 나오고 있지만 이 시기만 지나면 버텨준 사람들한테는 포상도 주려해. 그게 금전이든 뭐든 말이야.”



흔들렸다. 이미 두세 달을 버텼는데 조금만 더 참으면 보상이 나온다는 말에 한숨이 나왔다. 밖으로 내보내진 못했지만. 어쨌든 도망치고 싶다는 마음은 한결같았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밖에 없다.



“저... 쉬고 싶어요, 대표님.”



사실 퇴사를 마음먹긴 했지만 퇴사한 후에 다시 취업시장에 뛰어들 자신이 없다. 취업한다는 확신도 없다. 변변찮은 학벌, 할 줄 아는 제2외국어 없음, 자격증 없음, 다룰 수 있는 작업 툴 없음. 뭐하나 특기라고 뽑을 게 없다. 내게 재산이라고는 지금까지 만든 잡지 마흔 권 가량과 프로젝트, 이벤트, 단행본이 전부다. 이건 경력직 에디터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재산이다. 거기다가 매달 나가는 통신비와 카드값, 적금은 어떻게 해야 하지. 갑자기 혼란스러웠다. 대표가 결심이라도 한 듯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정 쉬고 싶으면 한 달 쉬어. 초연 씨 3년 넘었지? 다른 사람들 말 나오는 건 싫으니까 3년 이상 근속한 사람들은 한 달 재택근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걸로 하자. 대신 일의 특성상 교정교열 기간에는 출근해주고, 한 주에 한 번은 출근해서 업무 보고 하고. 어때?”



일단 알겠다고 답했다. 매주 한 번씩 출근해서 회의와 업무 보고, 교정교열 기간 출근은 너무 당연해서 받아들였다. 우선 한 달 쉬면 뭐든 답이 나오겠지. 그런데 왜 내가 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거지. 기분 탓이라고 넘겨짚었다. 그때 그렇게 넘겨짚었으면 안 됐는데 결국 일하는 건 똑같다는 걸 왜 몰랐지?!


*


대표와 함께 사무실로 돌아왔다. 대표는 곧장 디자이너의 자리로 가 평소보다 한 층 높은 톤으로 시안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나는 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탕비실에 들어갔다. (사무실은 책꽂이로 구역이 나눠져 있다. 딱히 방이 있거나 하진 않다.) 내가 돌아온 걸 확인한 K가 대표가 눈치채지 않도록 종종걸음으로 탕비실에 들어왔다. 그러고는 나를 냉장고 쪽으로 밀어붙였다.



“어떻게 됐어요? 퇴사? 아님 근속?”



그만둘 거라며 여기저기 시끄럽게 떠든 처지에 근무하기로 했다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후자.”



K는 당황한 기색이 영력 했지만 선반에 놓여있는 햇반을 뜯어 전자레인지에 돌렸다. 전자레인지 돌아가는 소리가 유난히 컸다. K는 긴 머리카락 묶는 시늉을 하며 입모양으로 '어쩌다'라고 물었다.



“한 달 재택근무 하기로 했어.”



생각보다 반응이 떨떠름했다. 물론 한 달 쉬게 해 주면 계속 다닐 의향이 있다고 언급한 적이 있지만 한 달 휴가와 재택근무는 차이가 크다. K는 내가 불쌍했는지 울쌍을 지었다. 나중에 다시 얘기하기로 하고 우리는 점심 준비를 시작했다. 어쩐지 매운 음식이 먹고 싶더라니.



K가 냉장고에 넣어둔 불닭소스와 단무지, 체다치즈를 꺼내고 도마와 칼, 큰 그릇을 닦았다. (회사에 도마와 칼이 있다는 사실이 놀랍겠지만, 대표가 종종 사무실에서 파티를 열기도 하고 중요한 손님이 오면 직접 음식을 조리하기 때문에 가스레인지만 없을 뿐이지 필요한 조리기구는 다 있다.) 다 돌린 햇반을 박박 긁어 그릇에 담고 거기에 스트레스를 잔뜩 퍼부은 다진 단무지를 넣었다. 거기에 불닭소스를 양껏 뿌렸다. 밥을 섞는 건 K에게 맡기고 나는 밥그릇 두 개를 꺼내 닦았다. 다 섞은 밥을 밥그릇에 나눠 담고 그 위에 체다치즈를 올렸다. 밥이 무척 뜨거워서인지 매운 냄새가 확 올라와 재채기가 나왔다. K는 다시 그릇 두 개를 전자레인지에 넣었다.



“언니, 얼마나 돌릴까요?”


“흠.... 두 그릇이니까. 2분?”



*


매운맛이 보고 싶을 때는 불닭소스가 최고다. 다른 거 다 필요 없고 불닭소스 하나만 있으면 무슨 음식에 곁들여도 환상이다. 치킨에 찍어 먹어도 좋고, 밥에 비벼 먹어도 좋고, 냉면에 조금 곁들여도 된다. 단맛이 좀 있지만 티스푼으로 한 스푼만 넣으면 확실한 매운맛을 보장한다.


테이블에 앉은 내게 K가 치즈가 녹아내린 불닭 리소토를 내려놨다. 먼저 점심을 시작한 P가 약간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비주얼은 그럴싸한데?”



K가 먼저 한술 떴다. 어찌나 뜨거운지 김이 올라왔다. 후후 불어 곧장 한 입. 그런데 K가 황급히 컵을 들고 정수기 앞으로 뛰어갔다. 컵에 담긴 물을 싱크대에 다라버리고 냉수를 받기 시작했다. K는 원래 찬물을 잘 안 마신다. 대체로 정수를 마시는데 어지간히 매웠나 보다. P와 나는 당황해하는 K를 보고 계속 웃었다.



“정수리에서 땀나요. 와, 진짜 맵다. 속 아프겠는데.”



이번에는 내 차례였다. 한술 떠서 입에 넣자마자 혀가 아플 만큼 매운맛이 올라왔다. 치즈가 녹아 밥이 찐득찐득한대다가 맵기까지 하니 미칠 노릇이었다. 황급히 정수기로 뛰어가 찬물을 떴다. 콧등과 인중에 땀이 맺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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