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ecky Apr 09. 2020

#07 캔커피를 마신 여행 예정자

여행 한 번 가기 더럽게 어려운 이야기

한 달 재택근무 확정 후 제주도행 항공 티켓을 예매했다.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도망 욕구'가 결국 불씨를 댕겼다.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가야 했다. 혼자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예행연습이 필요하다. 올해 티켓 예매와 취소를 두 번이나 했다. 첫 번째는 여행경비가 터무니없이 모자라서, 두 번째는 단행본 작업 때문에 도무지 시간이 나지 않아서였다. 이번에는 하늘이 두 쪽나도 취소하지 않으리라. 일생일대 첫 혼자 여행. 뒤집기, 앉기, 서기를 연마한 후 걸음마를 시작하는 아기에 비유하자면 나는 겁도 없이 허공에 발장구를 치고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발을 디뎠을 때 어떤 느낌인지, 걸음마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면서 그저 열심히만 하는 꼴 말이다. 혼자 여행은 혼밥과 (남들은 혼술을 선택하지만 내겐 필수 너무나 당연한) 혼술을 겸 해야 하기에 큰 용기가 필요하다. 앞서 두 번의 여행 무산은 솔직히 이것들을 잘 해낼 자신감의 결여도 한몫했다. 동료들의 부러움과 걱정을 한 몸에 받으면서 나는 비행기에 몸을 실을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래 봤자 오전 11시부터 오후 3시까지는 해변가 카페에서 일할 생각이지만.



출발하기 하루 전날은 인쇄 감리 날이었다. 기존에 인쇄소는 파주에 있는데, 요 몇 달간은 투자자가 운영하는 업체에서 진행해 일산에서 감리를 봤다. 인쇄소 답지 않게 내부가 굉장히 어두웠고, 눈 씻고 찾아봐도 습도를 조절하는 스프링클러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기장님들의 성향이 우리와 맞지 않았다. 4년 간 합을 맞춰온 인쇄소가 무척 그리웠다. 그건 직원이고 대표고 다르지 않았다. 나와 K는 후발대였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선발대의 인쇄가 충분히 진행되어있어야 정상이지만 어쩐 일인지 선발대는 아직 앞면을 채 보지 못한 상태였다. K와 나는 선발대와 짧은 인사를 나누고 사무실에 가방을 내려놨다. 선발대인 대표와 S는 우리에게 따뜻한 캔커피 하나를 건넸다. 캔커피를 받아 들자 S가 조용히 잠깐 밖에 나가자며 손짓했다.



전날, 밤 열 시가 넘어서야 마지막 인쇄 파일을 넘기고 퇴근할 수 있었다. 저녁은커녕 점심도 챙겨 먹지 못해 버스에서 멀미를 호소했다. 대문 앞에서 가방에서 열쇠를 찾아 문을 열고, 엄마와 아빠, 강아지가 잠든 집에 들어가 도둑놈 마냥 살금살금 걸어 내 방에 들어갔다. 방문을 닫은 후 기억이 없다. 새벽녘에 내가 들어왔는지 확인하려고 방문을 연 엄마가 바로 문을 닫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눈을 떠보니 바닥에 허물처럼 외투가 너부러져 있었고, 그 옆에 내용물을 토해낸 가방이 엎어져 있었다. 그리고 나는 옷을 갈아입거나 씻은 흔적 없이 침대 위에 그대로 엎드린 채였다. 요 일주일간 잠을 충분히 못 자서 머리가 무척 아팠고, 빈속이라 허기졌다. 하지만 손가락 까딱할 힘도 없어 다시 잠들었다. 힘을 되찾아 몸을 일으킬 수 있을 때쯤 눈을 떴더니 K와의 약속시간이 1시간도 채 남지 않아 대충 씻고 노트북만 챙겨 집을 뛰쳐나왔다. 그래서 참 머리가 아팠다. 잠은 자면 잘수록 수면시간이 늘어나는데, 왜 안 자면 안 잘수록 수면시간이 줄지 않은 걸까.



우리는 각자 한 손에 캔커피를 들고 전깃줄에 앉은 참새들처럼 인쇄소 건물벽에 기대 쪼그려 앉았다. 커피는 따뜻하고 달달했다. 뒷맛이 입안에 남는 것이 완전한 인스턴트의 맛이었다.



“얼굴색이 영 안 좋은데? 몸 안 좋아요?”


“화장 안 했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큭큭큭.”



S는 웃음이 터져 말을 잇지 못했다. 신세한탄이나 하며 울상으로 있어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 기장님이 감리를 보라며 우리에게 손짓해 커피 한두 모금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S는 내 어깨를 툭 치며 사무실을 가리켰다.


“들어가 있어요. 어차피 아직 교대시간 안됐잖아.”



 *

사무실 안에는 대표만 앉아있었다. K는 대표 대신 감리를 보러 나간 모양이었다. 대표는 계속 스마트폰만 봤고, 나는 대표 앞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핸드폰으로는 감리 보기 어려워 노트북을 항상 들고 다니지만 오늘은 감리가 아니라 단행본 보도자료를 기자들에게 뿌려야 했다. 캔커피를 마시고 나면 입냄새가 날 것 같다. 커피가 입안에 끈적끈적하게 눌어붙어 있는 기분. 아무리 물을 마셔도 좀처럼 가시질 않는다. 검색사이트를 열고 문화부 기자들의 메일 주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조중동은 물론이고 인터넷 뉴스까지 싹 뒤졌다. 엑셀 파일 30행을 채울 때쯤 대표가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내게 폭탄을 떨어트렸다.



“아무래도 우리 내일도 감리를 봐야 할 것 같아.”



생각보다 감리 진행이 늦어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내일은 공항에 가야 했다. 아직 대표에게 제주도에 간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는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나 고민됐다. 마침 S와 K가 사무실에 들어와 각각 대표와 내 옆에 앉았다.



“대표님, 그런데 내일부터는 재택근무를 하기로 했던 날이라서 제가 제주도에 갈 일정이 있어요. 오전에 저 혼자 나와서 봐도 되니까 제가 오전에 나와서 감리를 보고 오후에 다른 분들이 오시면 그때 교대하면 어떨까요?”



내 말을 들은 대표는 알겠다고 하고 K를 봤다. K는 당연히 자신이 오겠다고 했다. 나 혼자 감리를 보는 건 힘들 테니 자신도 함께 오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대표는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내게 잠깐 밖으로 나오라며 먼저 일어났다. 올 것이 왔다. 웬만하면 조용히 다녀오려 했는데, 불호령이 떨어질 게 뻔했다. 남은 캔커피를 마저 마시고 빈 캔을 쓰레기통에 버린 후 대표를 따라 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먼저 밖에 나와있는 대표가 내게 왜 자신에게 미리 말하지 않았냐고 화를 냈다. 보고도 아니고 통보는 기분 나쁘다고 말이다.



“죄송합니다.”



정신없이 시간이 지나가서 말할 타이밍을 잡는 것도 어려웠다거나 일정상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는 핑계는 댈 이유가 없었다. 그저 죄송하다고 말하면 될 일이었다. 그리고 입에서 자꾸 찝찝한 커피 맛과 향이 나는 것 같아서 대표 앞에서 입을 떼기 힘들었다. 대표는 잠시 생각하더니 한숨을 쉬었다.



“초연 씨가 정신없어서 말 못 했을 것 같긴 해.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의 양은 정해져 있으니까. 원래 잘 보고 하는 사람이라서 내가 좀 놀라서 그런 말 한 거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우선 초연 씨가 말한 것처럼 해. 그래도 혹시 모르니 P에게도 내일 오후에 K랑 감리 볼 수 있는지 물어봐 줘.”



생각보다 유연한 사람이다. 미리 말하지 않은 건 분명 내 잘못이다. 재택근무라도 일을 안 하는 건 아니니 대표에게 일정을 미리 공유하긴 했어야 했다. 직장생활 4년 차이지만 간혹 이런 일이 생기지 않게 미리 대처하는 데는 잼병이다. 대표가 먼저 사무실에 들어가고 나는 P에게 전화를 걸었다. 교정교열자인 P는 원고를 쓰면서 교정교열까지 보기 때문에 감리를 보진 않는다. 게다기 집도 무척 멀어 K와 나는 큰일이 생기지 않는 한 P에게 감리를 부탁하지 않는다. 수화음이 한참을 이어지다가 막 잠에서 깬 듯 P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오빠, 미안한데 부탁이 있어.”



작가의 이전글 #06 우울한 퇴사 실패자의 매운맛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