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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cky Apr 09. 2020

#08 여행 전날이 더 술맛나네

그저 취할 때까지 먹고 마시자

오후 7시가 되어서야 K와 나는 전철에 탈 수 있었다. 지칠 대로 지쳤지만 계속 꼬르륵대는 허기 때문에 합정에서 저녁 식사를 해결하기로 했다. 이대로라면 집에 무사히 도착하지 못할 것 같았다. 이 소식을 들은 P가 자신도 같이 먹겠다며 인천에서 합정으로 오고 있었다. 족히 버스에서만 한 시간 반이 걸리는 거리인데도 선뜻 나온다는 P가 어쩐지 귀여웠다. 우리는 스마트폰을 들고 계속 인스타그램을 뒤졌다. 피곤함에는 귀여운 고양이 처방전이 최고다. 이 집사 고양이, 저 집사 고양이를 구경하고 있는 틈에 P가 합정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알렸다.


나 류마카세 도착함. 뭐 먹을래?


세이로무시 세트 먹자. 우리도 곧 도착.


류마카세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자카야다. P와 내가 사귀던 3년 전, 우리는 여름휴가로 강릉을 다녀왔다. 연봉이 적은 에디터의 가벼운 주머니 사정으로는 가격이 만만치 않아 바닷가에서 회를 먹지 못했다. 그래서 P는 나를 위로하기 위해 서울로 돌아와 횟집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그렇게 찾아낸 곳이 류마카세였다. 그릇 4개를 붙이면 동그란 원이 생기고 중앙에 회가 가득 담긴 접시가 놓이는 한상차림을 보곤 “강릉에서 안 먹길 잘했다”라고 감탄했다. 그 후로 한주에 한 번씩은 류마카세에서 저녁을 핑계 삼아 술자리를 갖곤 했다. 지금은 안 계시지만 당시 서빙을 보셨던 작은 사장님은 메뉴판을 건네주면서 “항상 먹던 걸로?” 물어보셨다. 그러면 우리는 고개만 끄덕이면 됐다. 그러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술도, 음식도 항상 먹던 대로 한상이 차려졌다.


P가 막 주문을 하던 찰나에 우리는 가게에 들어섰다. 우리는 짧은 인사를 건네고 자리에 앉아 찬물부터 들이켰다. 피곤함도 피곤함이지만 우리와 저녁을 먹기 위해 인천에서 서울까지 온 P의 앞에서 심란한 모습을 보이는 게 미안해서 정신부터 차렸다. 그러면 뭐하나, 눈치 빠른 P는 그새 무슨 일 있었냐며 물었다. 낯빛만 봐도 알겠다는 듯 말이다. 내가 별일 없었다고 대충 넘기려 하자 K가 급히 화제를 바꿨다.



“그나저나 언니 내일 오전에 감리보고 바로 공항 가야 하죠? 언제 출발하셔야 해요?”


“2시 반 비행기니까. 12시에 출발하면 될 것 같아. 찾아보니까. 역 앞에서 20분이면 김포공항 도착하는 버스가 있더라고.”



술과 계란찜, 콘버터, 샐러드, 쌈채소가 먼저 나왔다. K는 하이볼, 나와 P는 언제나 그렇듯 참나무통 맑은 이슬. P가 소주잔에 술을 따르며 물었다.



“너는 왜 그렇게 여길 좋아하냐?”



그걸 이제야 묻냐.



“여기만 생각하면 그렇게 침이 고인다? 깻잎에 샐러드랑 초고추장 찍은 고추를 올리고 회 한점, 쌈장 조금 올려서 쌈 싸 먹으면 그렇게 맛있어. 짜고 맵고 쫄깃하고 아삭하고 온갖 식감이 다 느껴지거든. 거기다가 요 소주 한 잔 딱! 마시면 그냥 취해, 막 취해.”



벌써 침이 고였다. 이곳의 고추는 정말 맵다. 3년 내내 한결 같이 맵다. 다른 음식점에서 먹는 고추랑은 비교도 안 된다.



“그러니까. 꼭 여기만 오면 취하더라. 저번에도 그랬지?”



P와 나는 얼마 전 S와 함께 이곳에서 술을 마셨다. 대표와 카페에 마주 앉아 재택근무 얘기를 하기로 전, 그러니까 K와 K의 남자 친구와 주먹 고기를 먹었던 후 퇴사 선전포고 소식을 전하던 자리였다. 그날 우리가 이곳에서 마신 술이 얼마나 됐는지 세보진 않았는데 어렴풋 사장님이 더 이상 참나무통 소주는 더 없다며 다음부터는 더 많이 시켜놓겠다고 했던 말이 기억난다. 순식간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언니! 그날 술 별로 안 마셨다면서요!”



뒷목이 간지러웠다. 틈만 나면 술만 마셔대는 나를 향한 K의 걱정이 양심을 찔렀다. P를 노려보다가 어색하게 잔을 들었다.



“짠~”



종원원이 부르스타와 찜통, 모래시계를 테이블에 올렸다. 15분짜리 모래시계. 나는 모래시계를 뒤집었다. 이 모래시계가 요물인 게 아무리 재밌는 수다를 떨고 있어도 뒤집어지는 순간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일제히 한동안 모래시계만 바라본다. 나도, P도, K도 회가 나올 때까지 모래시계를 가만히 바라봤다. 우리의 침묵은 회가 테이블에 올라온 후에 멈췄다. 나는 깻잎에 샐러드와 회, 쌈장(류마카세 쌈장은 된장에 다진 마늘과 참기름을 올려서 나오기 때문에 마늘을 따로 올리지 않아도 된다), 초고추장, 매운 고추를 올리고 쌈을 싸 날름 입에 넣었다. 쌈채소는 상추와 깻잎 두 가지가 나오는데 나는 무조건 깻잎으로만 쌈을 싸 먹는다. 상추는 너무 얇고 특유의 쌉쌀한 맛이 있어 회맛이 죽는다. 거기다 깻잎 향이 쌈장이나 초고추장의 맛과 잘 어울리고 상추보다 두꺼워 식감도 좋다.



“음~ 맛있어.”


“안 짜냐?”


“나는야, 소스 요정! 안 짜, 안 짜.”


“지 입으로 요정이래. 미쳤네.”


P의 말에 K가 내 눈치를 살피며 웃음 참아냈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소주 한 잔을 들이켰다.



“『와카코와 술』에서 이럴 때 뭐라고 하는 줄 알아?”


“푸슈~”


P와 내가 동시에 '푸슈~'를 외치자 K가 그게 뭐냐며 참던 웃음을 터트렸다. 꽤 만족스러운 재롱이었다. 『와카코와 술』은  다음으로 P와 내가 좋아하는 일본 드라마다. 원작은 만화인데 정말 별 스토리 없이 퇴근 후 술 한 잔 마시는 얘기가 전부다. 술집 손님들을 구경하고 음식과 술 얘기를 하는 혼술을 다루는 작품이랄까. 먹는 것만큼 확실한 재미 요소를 가진 작품은 거의 없다.



모래시계의 모래가 다 떨어지자 종업원이 기다렸다는 듯이 찜통을 열었다. 찜통을 가득 채운 김이 한가득 빠져나간 후에야 내용물이 보였다. 위층에는 팽이버섯과 대패삼겹살, 단호박, 청경채가 담겨있고 아래층에는 가리비 같은 여러 종류의 조개와 낙지, 새우, 전복이 담겨있었다. 전복과 낙지는 식으면 질겨지기 때문에 뜨거울 때 바로 먹어야 한다. 낙지 머리를 가위로 자르자 내장이 흘러내렸다. 우리는 세이로무시 먼저 먹어치웠다. 사실 회와 세이로무시가 함께 나오는 세트를 시킨 이유도 여기 있다. 세이로무시는 식으면 맛이 없다. 주린 배를 세이로무시로 채운 후 술안주로 회를 먹으면 완벽하다. 대패삼겹살에 팽이버섯을 싸서 땅콩 소스에 찍어 한 잔, 단호박 간장에 살짝 찍어 한 잔, 전복 한 점에 한 잔, 키조개 한 점에 한 잔. 그렇게 한 잔에서 두 잔, 한 병에서 두 병이 되니 흥이 올랐다. 내일이면 이 지긋지긋한 회사를 잠시 떠날 수 있다. 비록 일은 할지라도 몸은 사무실을 떠나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하이볼 한 잔을 끝낸 K가 한 잔을 더 시키고 물었다.



“제주도 가서 뭐하실 거예요?”


“잘 모르겠어. 정말 동네마다 숙소만 정해두고 움직이는 거라 되는 대로 다니려고.”



혀가 약간 구부러지는 것 같아 습관적으로 든 술잔은 내려놨다.



“그나저나 모래부터 태풍 온다는데 걱정이에요. 언니 돌아다니기 힘들겠어요.”



아, 취한다. 그나저나 태풍이 온다는 뉴스를 보긴 했지만 대충 흘려들었는데 우산을 챙겨가야 하나.



"K, 얘 오늘 무슨 일 있었어요? 평소 같지 않게 왜 이래."


"그게... 오늘 여행 일정 공유 안 했다고 대표님이 한소리 하셨어요."


태풍 따위 내가 이길 수 있지, 내가.


"올 테면 와라, 태풍아!!!"


내려놨던 술잔을 다시 들었는데 P가 술잔을 빼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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