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
※과거 저장 글입니다.
생각보다 싱거운 퇴사로 인해 인생무상을 느낀 분들에게 이 글을 올립니다.
사람 인생이라는 게 참 묘하다. 2019년 6월 17일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말하고 나니 정신이 들었다. 내가 기자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장소에서 나는 3년 6개월 만에 나의 첫 직장, 나의 첫 직업, 나의 첫 사회생활을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그만둬야지, 그만둬야지 생각만 하다 어렵게 꺼낸 말이었는데, 생각보다 싱거웠다. 적극적으로 가지 말라고 하는 사람도 없었고,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하고 난 뒤 보니 내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뜨거운 동료애로 뭉친 직장 동료가 남지도 않았고, 사회생활의 어려움을 허심탄회하게 나눈 선배도 없었다. 모은 돈은 더더욱 없고.
직장 상사에게 그만두겠다고 말하는 순간은 너무 평범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일하는 곳 근처, 자주 찾던 쌀국숫집에서 팟타이를 시켜 먹었고, 사는 이야기, 이런저런 회사 이야기를 했다. 상사도 '그래, 그래도 이기적으로 생각해서 잘 결정해. 맘이 바뀌면 어려워말고 이야기하고.' 그게 전부였다.
그 외에는 상사의 어깨가 아픈 이야기, 회사에 있으며 느꼈던 감정들, 모두 아주 사소하게 느낀 감정의 반의 반도 안 되는 진실을 이야기했다.
밥을 먹고 일어나 옆 카페로 옮겼다. 공교롭게도 처음 '기자'가 되겠다고 마음 장소였다. 내가 방송관련한 일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던 곳. 신문방송학을 전공하겠다고 마음먹었던 자리였다. 고등학생인 나는 우연히 방송사의 20분짜리 다큐 주인공이 되고 내레이션까지 맡게 됐었다. 여의도 KBS 본관 근처에서 내레이션을 했고 처음으로 '카페'라는 곳을 알게 됐다. 그때 먹었던 게 녹차라테였다. 아직도 녹음을 마치고 녹차라테를 먹던 기억이 생생하다. 앞으로 평생 카페에 오면 녹차라테를 먹겠다고 다짐했었는데_. 지금 그 자리에는 녹차라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눈 뜨면 커피부터 찾는 어엿한 직장 4년 차, 29살의 여자가 있다.
그 여자는 지금 처음 입사하기로 마음먹었던 그 시작 점에 섰다.
내게 꿈을 줬던 처음 그 자리에서 꿈을 이룬 내가 묘했다.
이게 신의 어떤 신호라면, 나는 지금 두렵고 한편으론 슬퍼지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라는 신호일 것이다.
집도 없는 떠돌이 노숙자에서 한 투자 회사의 유명 CEO가 된 사람이 했다는 말이 있다.
"나는 안 되는구나.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세요.
세상에서 가장 큰 선물은 나에게 기회를 주는 삶입니다."
나는 오늘 그날 그 자리에서 나의 한 부분을 잘라낸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알린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