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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아랑 Aug 09. 2022

꿈을 꾸다

2012년 7월 31일.

내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온 날이다. 

오하이오 주에 있는 신시내티 공항에 도착했을 때 느꼈던 감정들이 아직도 생생하다. 

낯설지만 기대되고, 두렵지만 설레는 그런 느낌. 


가슴 벅찼던 그날을 맞이하기까지 수없이 많은 좌절과 실패를 맛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 없었던 유전상담사가 되는 꿈. 그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내 보려 한다. 시간이 지나면 잊히는 많은 기억들이 아쉽고, 지금부터 10년이 더 흐르면 내 노력의 흔적들까지 잊힐까 싶어, 조금이라도 기억이 생생할 때 나의 치열했던 유전상담을 향한 열정을 기록해보려 한다. 


대학교 4학년 1학기 전공필수로 <유전 상담학>이라는 수업을 들었다. 처음에는 그저 들어야 하는 과목이라 신청을 했는데, 수업 첫 시간에 귀에서 종소리가 띵~. 

바로 이거였다. 

내가 찾아 헤매던 그 어떤 것. 

유전상담

당시 유전학을 하는 의사가 되고 싶었던 나는 의학전문대학원으로의 진학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나타난 "유전상담"이라는 분야에 흠뻑 빠져 경주마처럼 정말 유전상담이라는 분야만 바라보고 달리기 시작했다. 솔직히 의학전문대학원은 아무나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10년 넘는 세월을 더 공부해야 한다는 사실에 눈앞이 깜깜했는데, 의대에 가지 않고도 내가 하고 싶었던 유전학을 통해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는 직업이 있다니. 정말 개안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새로 찾은 분야에 대한 흥분과 설렘이 채 가시기도 전에 정보의 부재로 끊임없이 좌절하는 시간이 금방 다가왔다. 우리나라에서 (의학)유전학을 전공하신 많은 교수님들께 이메일을 드렸지만, 답을 주신 분들은 몇 분 되지 않았다. 그마저도 잘 모르는 분야라 도와주기 힘들다는 답장이었다. 그중 한 분께서 흔쾌히 만나주셨는데, "내가 유전상담사들이랑 미국에서 많이 일해봐서 아는데, 그거 정말 똑똑한 사람들만 하는 거던데"라는 말로 내 마음에 대못을 쾅쾅 박아버리셨다. 그날 처음 본 교수님께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나는 뭐 똑똑하지 않아서 안될 거라는 식으로 들렸다. 사실 그분도 미국에서 유전학 관련 박사학위를 받으신 것이지 유전상담 교육을 받으신 것도 아니고 의사도 아니면서 환자를 상담하고 계신 것이 지금 생각해보면 이상한 건데, 그때는 뭐가 뭔지 몰랐으니까. 그러다 유학을 떠나오기 전 한 세미나에서 우연히 인사드렸었는데, 대학원 합격하여 간다고 말씀드렸는데 뭔가 통쾌한 기분이었다. 당신이 짓밟으려 했던 내 꿈을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뭐 그런 메시지를 드린 것 같아서.


어쨌든. 당시 아주대학교 대학원에 유전 상담학 석사과정이 있었는데, 지원해볼까도 많이 고민했지만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졸업 후 진로가 모호한 분야여서 선뜻 입학원서를 내기가 쉽지 않았다. 고민 끝에 유전상담이 시작된 미국으로 눈길을 돌려 정보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 NSGC(National Society of Genetic Counselors)라는 미국 유전상담사 단체를 찾았고 매년 가을에 학회가 열린다는 정보를 얻고 무작정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당시 쥐꼬리만큼 벌어놓은 아르바이트비 탈탈 털고, 부모님께 도움을 받아 어렵게 어렵게 학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비행기 값, 학회비, 체류비가 정말 너무 비쌌다. 호텔까지 예약하기에는 너무 염치가 없어서 당시 학회가 열렸던 텍사스 달라스에 있는 한인 커뮤니티를 찾아 한인 민박 같은 것을 알아봤다. 그때 너무나 감사하게도 달라스에서 일하시는 어떤 간호사 언니께서 흔쾌히 재워주시겠다고 하셨다. 집에 유학생도 한 명 있는데 불편하지 않으면 거실을 내어주시겠다는 것이었다. 인터넷에서 만난 사람이 흔쾌히 재워주겠다는데 나도 참 당시에는 겁이 없었다. 지금은 그러라고 해도 절대 안 할 텐데, 그때는 절실하기도 했고 사람에 크게 데인적이 없어서 사람을 잘 믿었던 때라 주소 하나만 들고 무작정 비행기에 올랐다. 


공항에 내려 간호사 언니가 사는 동네까지 택시를 타고 가는데 뭔가 광활한 대지 위를 달리는 기분이었다. 서울처럼 높은 건물 하나 없이 저 너머 지평선이 보이는 듯한 느낌적인 느낌을 가지고 미경 언니네 집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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