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4학년, 유전상담을 공부하겠다고 다짐한 그 순간부터 당시 미국 대학원 진학에 필수였던 토플과 GRE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대학을 나왔기 때문에 영어 실력 검증을 위해 토플은 무조건 봤어야 하고, GRE는 미국 대학원 입학을 위한 수능 같은 것이기 때문에 좋은 점수를 내야 했다. 지금은 GRE를 많이 안 보는 추세라고 하던데... 역시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맞구나! 생각하는 요즘이다. 당시 공부했던 생각만 하면 아직도 토할 것 같다.
대학교 4학년 2학기 때 기말고사와 토플을 같이 준비하기 시작했다. 어디서 그런 말도 안 되는 계획을 짰던 것인지 모르겠다. 초등학교 시절 아빠께서 해외 지사로 발령이 나시면서 온 가족이 외국 생활을 했던 적이 있다. 한 5년 정도? 초등학교 4학년 2학기 때 다시 한국에 들어왔는데, 학교에 가는 것이 너무 싫었다. 학교에 가기만 하면 외국에서 살다왔다면서 내 책가방을 뒤져 "미제 볼펜"이라며 막 가져가서 써보는 친구 (친구도 아니지), 눈만 마주치면 영어 해보라는 친구, 심지어 영어 시간도 아닌데 앞에 나와서 영어로 자기소개해보라는 선생님. 당시 엄마께서 촌지까지 써가면서 내가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노력하셨다는 말을 커서야 들었는데, 다행히 엄마의 사랑 덕분이었는지 삐뚤어지지 않고 잘 컸다 :) 웬 촌지냐 하겠지만,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는 (당시에는 국민학교로 불렸다) 촌지가 굉장히 흔한 인사치레였다고나 할까. 초등학교 때는 내가 좋은 선생님을 만나지 못해 엄마만 고생하신거지 뭐. 해외에서도 계속 나라와 지역을 옮겨 다녔기에 다 세어보니 초등학교만 8군데를 다녔다.
어쨌든, 외국생활로 감사하게도 영어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던 나는, 자만심 가득한 마음으로 토플 공부를 시작했다. 그.런.데. 웬 영어 단어가 이렇게 어렵고 공부할 것은 많은지... 더군다나 회화 위주로 영어를 했던 나이기에 문법은 너무 어려웠다. 무작정 한 달 후로 토플시험을 신청해놓은 상황이라 죽기 살기로 공부했던 것 같다. 영어단어를 하루에 200개씩은 기본적으로 외우고 잠도 줄여가며 공부했다. 당시 강남에 있는 해커스 어학원에 다녔었는데, 아침반에 가려면 6시에 집에서 나와야 해서 매일 5시에 기상했었다. 공부 스트레스도 심했고 새벽에 기상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짓눌린 나머지 잠을 자주 설쳤다.
하루는 영어 단어들을 외우다가 새벽 2시에 잠이 들었다. 공부하다가 자려고 누우면 뇌는 갑자기 셧다운이 되지 않기 때문에 계속 빙빙 도는 느낌이 나곤 하는데, 그날도 그런 상태로 잠이 들었다. 알람을 맞춰두었지만 알람이 울리기 전 일어났다. 그날따라 이상하게 머리가 맑았다. 잠깐 잤는데 엄청 개운한 느낌? 그리고 뭔가 집 안 공기도 다른 느낌이고. 어쨌든 서둘러 머리부터 감았다. 머리를 다 감고 수건을 두른 채 방에 와서 옷을 고르고 있는데, "참. 알람 안 껐지~" 하고 핸드폰 시계를 봤다.
끄악.
새벽 3시.
한 시간도 못 자고 일어났는데 개운한 느낌이라니...
스트레스가 심하긴 심한가 보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이미 머리도 감았겠다, 옷도 대충 봐 뒀겠다, 다시 자고 5시 반에 일어나 학원에 갔다.
다행히 토플은 각 대학원에서 요구하는 점수 이상을 받아서 그만 마무리하고 급하게 GRE를 시작했다. GRE도 해커스 어학원에 다니며 공부했었는데, GRE는 토플보다 공부량도 훨씬 많고 스트레스도 더 많이 받아 정말 공부하는 내내 시달렸다. 코피 쏟는 것은 기본이고, 한 번은 새벽에 너무 배가 아파서 엄마를 깨워 응급실까지 간 적이 있었다. 위경련. 너무 아픈데도 뭔가 열심히 공부한 흔적 같아서 뿌듯했던 기억이...ㅎㅎ 새벽 내내 병원에서 수액 맞고 바로 학원으로 향했다.
GRE는 토플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당시 GRE가 우리나라에서는 PBT(paper-based test), 즉 paper로 시험을 보는 거라 점수가 잘 안 나오고 1년에 한 번 있는 시험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시험이 자주 있는 일본 오사카에 가서 CBT(computer-based test), 즉 컴퓨터로 시험을 치렀다. 그때 같이 GRE 공부를 하던 스터디 그룹 멤버들과 함께 가서 시험을 봤었는데, 나만 점수가 안 나왔다...
뭐... 원래 똑똑한 친구들 사이에 껴서 공부한 것만으로도 참 감사한 일이다 생각했다. 퍼듀 나온 친구, 포항공대 출신 천재 오빠, 삼성 다니던 엘리트 오빠 등 나만 참 평범한 학생이었다. 역시 유학은 아무나 가는 것이 아닌가, 또 한 번 자괴감이 살짝 들었지만,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하는 마음으로 버텨냈다. 그렇게 오사카에 두 번, 세 번째 갔을 때 드디어 점수가 나왔다. 참... 오래도 걸렸다!!
이렇게 어렵게 어렵게 토플과 GRE 점수를 받았는데,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우선 지원할 학교를 선택하는 것부터가 난관이었다. 그때 당시 ABGC(American Board of Genetic Counseling)에서 인증하는 유전상담 대학원이 미국과 캐나다에 약 30여 개 있었는데 (ABGC에서 인증하는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해야 미국 유전상담사 자격증 시험을 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각 대학원에 대한 정보를 정리해 놓은 것이 없었기에 정말 일일이 다 들어가 보면서 엑셀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학교 이름, 과거 국제학생 합격 유무, 학생 수, 선수과목, 토플/GRE 최소 점수, 학부 학점 커트라인, 연계되어 있는 병원이 있는지 여부, 학교가 있는 지역, 물가 등 최대한 꼼꼼하게 정리했다. 그렇게 정리해보니 내가 지원할 수 있는 학교는 대략 7개 정도. 지금 생각해보면 7개도 참 많았던 것 같다. 각 학교마다 내야 하는 application fee부터 시작해서 personal statement라고 불리는 자기소개서, 이력서, 추천서 3개. 준비해야 할 것도 많고 신경 써서 써야 할 것도 많았다. 몇 달에 걸쳐 하나씩 해나갔다.
대부분의 학교들이 12월 말 혹은 1월 중순 정도까지 지원을 완료하게 되어있다. 내가 제일가고 싶었던 학교는 University of California Irvine (UCI) 였는데, 그 학교는 4명 뽑았다. 네 명이라니! 소꿉장난 하는 것도 아니고. 그다음이 John's Hopkins University와 NIH가 조인트로 만든 프로그램인데, 여기는 신청해서 학교 브로셔도 받아봤었다. 정말 보물처럼 간직했었는데. 지금은 부모님 댁 창고에 있는 어느 박스에 처박혀 있겠지.
그렇게 서류전형 결과를 기다리고 기다렸다. 두근두근.
감사하게도 한 군데에서 인터뷰를 보자고 연락이 왔다. 외국에 있으니 Skype로 인터뷰를 하는 편의를 봐주겠다고까지 했다. 하지만 의욕 빼면 시체였던 당시의 나는, 무슨 Skype냐, 내가 가겠다!! 라며 미국으로 날아갔다. GRE 공부하며 만난 나랑 생년월일이 똑같은 똑똑한 친구가 있는 뉴욕으로 우선 갔다. 인터뷰는 필라델피아에 있는 학교였는데, 차를 렌트해서 친구가 같이 가주겠다고 했다. 나는 미국에 가는 계획을 짜면서 내가 지원했던 University of Cincinnati 디렉터한테 나 미국에 가니까 호오옥시 나 인터뷰 한번 봐보면 안 되겠냐며 참 대범한 이메일을 보냈었다. 그런데! 디렉터가 너무나 흔쾌히 오라며, 인터뷰를 잡아주는 것이 아닌가. 우와... 그리고 마지막에는 UCI에서도 Skype 인터뷰 요청이 왔다. 내가 그토록 원하던! 하지만 그때는 이미 한국에 돌아왔을 때라 Skype로 인터뷰를 했다. 지원했던 7군데 중 3군데 인터뷰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인터뷰를 보다 보니 나한테 맞는 학교가 어디인지 감이 오기 시작했다. 역시 사람은 직접 겪어보고 부딪쳐봐야 본인에게 가장 알맞은 옷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것 같다. 인터뷰를 보러 신시내티 공항에 도착했을 때부터 뭔가 정해진 운명인 것처럼 신시내티라는 도시에, 사람들에, Cincinnati Children's Hospital Medical Center에, 그리고 University of Cincinnati 유전상담 석사과정에 끝도 없이 빠져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