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조로운 전개에도 후반부의 울림만큼은.
19.06.13. @CGV평촌
미국의 연방 대법관 루스 긴즈버그의 삶을 극영화로 각색한 <세상을 바꾼 변호인>을 관람하였다. <사랑에 대한 모든 것>, <몬스터 콜> 등의 작품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준 바 있는 펠리시티 존스가 주연을 맡은 이 영화는, 전개가 거듭될수록 조금은 단조롭게 흘러간다는 아쉬움은 분명 남기지만 후반부의 한 방만큼은 제대로 각인시켜 주는 작품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하버드 로스쿨 입학 첫날, 남성들로 가득한 건물 앞에서 진청색의 드레스를 입은 루스 긴즈버그가 당당한 표정으로 걸어가는 오프닝부터 다루고자 하는 바를 여실히 드러내는 이 영화는 미국 헌법에 존재하는 수많은 성 차별 조항을 하나 하나 조금씩 수정해나가고자 하는 그녀의 굳은 의지와 가치관을 확실히 드러내며 흥미와 울림을 선사한다.
영화 내내 루스 긴즈버그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다. 여성으로서 마냥 여성이 우월한 위치에 오르기를 주장하는 것도, 상대적으로 많은 것을 누리고 있는 남성들에 대한 부당함을 주장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남성과 여성이 성별에 대한 구별 없이 동등한 권리를 누리며 동등한 삶을 살아가길, 어쩌면 그저 지극히 당연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을 바랄 뿐이다. 그러나 이토록 당연한 논리가 오래도록 이어진 차별과 선례를 바탕으로 유별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시대에서 그녀는 든든한 지원군조차 쉽게 구할 수 없는 외로운 투쟁을 이어가게 된다.
영화에서 루스 긴즈버그가 의욕을 갖고 맡는 사건이 남성이라는 이유로 보육비 공제 신청을 거부당한 찰스 모리츠에 관한 사건이라는 점도 흥미롭게 작용한다. 하버드 로스쿨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음에도 단지 그녀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어떠한 로펌에서도 쉬이 받아주지 않던 그녀가 명백히 남성에 대한 역차별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을 맡음으로써, 미국 헌법에 수많은 조항에 존재하는 남녀 차별에 관심을 보이고 이를 깨뜨리기 위해 나아가는 과정은 이것이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는 그 자체로 큰 흥미를 자아내며 전개에 몰입하게 만든다.
결국 영화를 이끌어가는 인물인 루스 긴즈버그를 연기한 펠리시티 존스의 활약이 얼마나 두드러지는가가 무엇보다 중요한 영화에서, 그녀는 개인적으론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이름을 올렸던 <사랑에 대한 모든 것>에서보다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이며 영화의 무게감을 더한다. 더불어 그녀의 든든한 지원군이자 동료인 마틴을 연기한 아미 해머의 안정적인 연기도 내내 돋보인다.
다만 여성에 대한 차별이 어느 정도 당연시되었던 시대를 살아가는 루스 긴즈버그가 모리츠 사건을 맡기 시작하기까지의 과정에 비해 중반부의 전개가 다소 단조롭고 무난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쉽게 느껴진다. 어딘가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루스 긴즈버그의 삶을 소재로 하는 영화로써 이보다 더욱 힘 있게, 이보다 더욱 완성도 있게 다뤄질 수 있었을 것이라는, 혹은 그래야만 했어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전개가 거듭될수록 힘을 잃는 연출이 몰입을 깨뜨린달까.
그럼에도 영화의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을 후반부 법정 시퀀스가 갖는 힘은 이전까지의 아쉬움을 어느 정도 상쇄시켜주기에 충분하다. 오랜 시간 이어져 온 선례에 저항하고자 하는 긴즈버그의 변론을 탐탁치 않게 여기던 세 명의 남성 재판장들을 설득해나가는 루스의 변론은, 어쩌면 영화가 이를 위해 지금까지 달려왔다고 할 수 있을 상황에서 커다란 쾌감과 울림을 선사한다. 강인한 여성들의 실제 이야기를 훌륭히 그려낸 <히든 피겨스>나 <미스 슬로운>이 자아냈던 카타르시스를 다시 한 번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장면이자, 그 장면만으로도 이 영화가 갖는 가치가 무척 돋보이기도.
정리하자면 언젠가 시간이 흘러서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의 삶을 이보다 더욱 훌륭히 담아낸 극영화를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펠리시티 존스의 열연을 바탕으로 한 후반부 시퀀스와 소소한 울림을 선사하는 엔딩의 한 방만으로도 확실한 의의를 느낄 수 있던 작품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 최소한 마찬가지로 자신의 분야에서 확실한 노선을 개척한 여성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3월 개봉작 <콜레트>에 비해서는 충분히 만족스럽게 느껴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