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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요일 또는 예술가 Jun 21. 2023

어느 길고양이의 죽음에 부쳐

어렸을 때 여름방학 숙제 중에 곤충채집이 있었다. 매미나 장수풍뎅이, 사슴벌레, 잠자리, 사마귀 같은 것이었는데 이 중에서 매미나 자기 철보다 조금 일찍 나온 잠자리가 나의 포획망에 걸렸을 뿐, 장수풍뎅이와 사슴벌레는 잡아본 적이 없다. 그것들은 희귀하여 눈에 잘 띄지도 않거니와 설령 잡는다 해도 과제물로 내지는 않았다. 대신 값을 후하게 쳐주는 사람들이 있어 비싼 값에 팔았다는 후문도 들었다. 잡은 곤충을 그대로 건조하거나 액체 보존, 슬라이드 마운트를 통해 보존하는 방법이 있다고 하는데 내 경우는 잡은 것을 그대로 제출했던 것 같다.

주로 잡기 쉬운 매미가 내 채집의 주 대상이었다. 집 근처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고, 나무나 벽에 달라붙어 우는 사이에 잠자리채로 덮치면 잡기도 쉬워서 방학이 끝나 박제처럼 마른 매미를 과제물을 제출하곤 했다.   


   

 중학교에 들어가 <파브르 곤충기>를 읽은 이후, 매미를 다시 보게 되었다. 매미는 유충이 3년에서 17년간 땅속에 있으면서 나무뿌리의 수액을 먹고 자라다가 지상으로 올라와 성충이 된다고 한다. 무려 7년에 달하는 유충 때의 수명에 비해 성충의 수명은 매우 짧아 한 달 남짓 된다. 그러니 나의 곤충채집은 7년이라는 시간을 기다려 겨우 한 달밖에 살지 못하는 삶을 반토막 내는 행위였던 탓에 더는 매미를 잡을 수 없었다.

잠자리채 없이 잠자리를 잡으려고 바짝 다가가 잡다가 날개 하나를 부러뜨린 일도 많았는데, 그 또한 마음에 걸렸다. 아니 그보다 더 어릴 적 부뚜막에 앉아 빵부스러기를 향해 달려오는 개미들의 대열을 관찰하다 그들의 보금자리를 파헤쳐 햇볕 아래 드러나게 한 일도 마음에 걸렸다. 개미들이 우왕좌왕하며 대열을 벗어나 피난하는 모습을 즐긴 것처럼 그동안의 나의 삶이 모두가 맘에 걸렸다.     



그렇다고 내가 착하디 착한 사람인가.

그것도 아닌데 왜 갑자기 나의 지나온 삶이 마음에 걸렸을까. 거스름돈을 많이 받으면 달려가 사실을 말하고 토해내야 하는데 나중에 알고 기뻐한 적도 있었으며, 남의 불행에 대해 겉과 속이 다르게 행동한 적도 있었고 타인보다는 나를 위한, 나에 의한 삶을 지금껏 살아왔다.

그러니 나의 생이란 적당히 타협하며 불의를 융통성으로 돌려 말하기를 반복하며 원치 않는 외부의 힘에 훼손당하지 않기만을 힘써온 시간이 아니겠는가. 그중에 행하는 아주 눈곱만 한 선행, 선의, 연민을 바탕으로 나는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착각하고 살아온 것은 아닌가. 적어도 타자의 삶에 무력으로 개입하여 훼손하지는 않았노라고, 그러니 이만하면 나의 삶이란 그런대로 괜찮은 것이 아닌가 하고.      


 어제 읽은 소설가  y선생님의 글 속에 나온 길고양이의 사진이 계속 나를 붙잡고 있다. 죽기 전에 카메라에 잡힌 고양이의 그 초롱한 눈은 나에게 묻고 있다. 그래서, 대체 당신은 무엇을 했나요,라고.

마음이 아프다.

그러나 그뿐, 나는 오늘의 밥을 먹고 하루치 고상함을 토대로 도덕과 온정을 베풀고 그것이 나의 정체성이라고 평온하게 살아갈 것이다.


모든 생명은, 그것이 미물이든 인간이든 더없이 소중하고 중요한 것이다.

벌레를 잡을 때 문득, 나는 가끔 무지막지하게 큰 거인이 벌레같이 조그만 인간인 나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죽이는 상상을 하곤 한다. 그 거인의 입장에서 나는 개미만도, 매미만도 못한, 그냥 벌레일 수 있기에 오늘 내가 죽이는, 잡는 사물들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다.

     

당신은 무엇을 했나요?

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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