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귀한 집안이었다. 할아버지는 삼형제에 여동생이 하나였고, 아버지도 아래로 남자 형제 하나, 여동생이 하나였다. 내 세대에는 친척 포함해서 3남 1녀인데 그 1녀가 바로 나다.
아들 부럽지 않게 사랑받았다. 밥상에서도 교육면에서도 차별이 없었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나에게만 하는 묘한 얘기는 하나 있었다.
“우리 집안은 딸이 귀한데 팔자가 그런 건지 잘 키워서 시집만 보내면 그렇게 잘 못 살아. 얘는 좀 다르게 커야 할 텐데.”
그래서 남편을 잘 골라야 한다. 결혼 전에는 재산 내역도 떼어보고 건강 검진 결과도 받아와야 한다.
집안 어른들이 어린 나에게 팔자가 어떻단 얘길 하도 해대니 나중에는 할머니가 부정 탄다고 말도 못 꺼내게 할 정도였다.
미신이고 기우라고, 나는 다르게 살면 된다고 생각했다. 고모할머니, 고모와 나는 엄연히 다른 사람이다. 똑같은 삶을 살 리가 없다. 그렇게 팔자라는 단어는 내 삶에서 잊혔다.
얘 은근 지 팔자 볶는 스타일이야
내가 스무 살에 중국 유학을 가고, 돌아와서는 편입 공부를 하고, 대학 졸업 후에도 바로 취업하지 않고 창업을 하자 내 친구가 다른 친구에게 나를 이렇게 소개했다.
일이 잘 풀리는 시기였다. 만족도가 높았달까. 어려운 문제를 만나도 해결하는 과정에서 성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주말이면 남편과 교외로 드라이브를 가거나 맛집에서 식사를 했다. 우리끼리 노는 게 너무 재밌어서 다른 부부가 어떻게 사는지 별 관심이 없었다.
불임일 수 있어요.
난임 센터로 가보세요.
웃기게도 씨받이, 소박맞은 여자 등 조선시대 시나리오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이를 갖지 못한 여성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다들 비슷한 삶을 사는데 나만 그 길을 이렇게 어렵게 가야 하는 건가?’ 정말 이런 물음이 생기더라.
또래 친구와 지인들의 임신 소식이 들려왔다. 축하을 전하면 꼭 ‘나의 좋은 소식’을 되물었다. 그들은 진짜 나의 경사를 물은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지금 함께 축하할 수 있는 화제는 분명해 보였다.
그렇게 1년, 2년이 지나니 출산 휴가나 퇴사를 결심한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아직 희귀한 현역이 됐다.
‘임신과 출산’이라는 다음 스텝으로 못 넘어가서 여전히 이 퀘스트에 매진하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을까 괜히 마음이 쓰이더라.
동생이 강아지를 입양했다. 4개월 된 시바견이었다.
홀딱 반할 미모였다. 우리 가족이 키우는 강아지라니 더 애착이 가더라. 벼르고 별러 휴가 때 강아지와 산책을 한 번 했다. 그 사진을 찍어서 카톡 프로필 사진을 바꿨고 대번에 이런 질문을 받았다. 너는 강아지나 고양이 키우면서 아이 낳을 생각은 없는 부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뭘 해도 이 아이 낳는 미션을 해결하지
않고는 내 인생에 다른 해석 따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난임이라 해서 누군가 대놓고 내 팔자를 운운하도록 순하게 살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겁이 났다. 혹시나 정신 나간 누군가 나를 팔자 센 여자로 후려치는 사람이 있다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의외로 아주 평범한 지인이 ‘아기 낳고 키울 돈으로 남편이랑 둘이 여행이나 다닌다’ 넘겨짚고, ‘아기 낳아봐라 강아지가 그렇게 이쁜가’ 강아지도 안 키워봤으면서 모르는 소릴 하더라.
어쩌면 팔자 센 여자는, 어렵게 한 아이를 키우고 있는데 둘째는 언제 낳을 생각이냐 당당한 기세로 묻는 평범한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
그렇게 사방에 널린 평범한 사람과 언제든 싸울 준비가 된 마음으로 사는 동안은 팔자든 뭐든 사납게 살아야지 다른 방법이 있었을까 싶다.
하지만 그때의 나를 다시 만난다면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지금 잘 풀리지 않는 내 삶이 다른 사람의 눈에 어떻게 해석될지 너무 예상하려들지 말라고.
내 삶을 해석할 능력이 없어서 굳이 ‘팔자’라는 단어로 간단히 설명해버리는 그 누군가는. 행복해서 눈물이 나고, 너무 싫어서 웃음이 날 때도 그저 ‘헐’이라고 표현하고 말 사람이라고.